미국 국경을 찾아 떠난 길은 참으로 멀었다.

이른 아침,  해도 뜨기 전에 출발하였는데 캘거리를 벗어나  한참 들판을 달려가자 동 쪽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요사이 건강이 좋지 않아 장거리 여행이 무리인 줄 알면서도 떠난 길이었다.

어머니 영주권을 의뢰한 뉴욕 버팔로 이민 사무소에서 기쁜 소식이 날아온 것은 지난 주였다.
이제 모든 절차가 끝났으니 미국 국경에 가서 이민 수속을 밟으라는 것이었다.
그 날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마냥 기뻐하셨다.

왜 아니 기쁘실까?
영주권을 기다리시느라 장장 3년여의 시간을 기다림 속에 보내시고...

매일을 하루같이 우편함을 체크하시더니...

그 날은 느낌이 이상하시어 서류봉투에 있는 영어이름을 버스표에 있는 이름과 대조를 해보셨다고 한다.

서류 봉투를 받아들자 감사하고 기쁘면서도 왠지 모를 가슴 싸한 아쉬움의 물결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기다림에 지치실 때마다 어머니는 내게 불평 아닌 불평을 하시곤 하셨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거냐..."

"나오기는 나오는 것이냐?"

그러실 때마다 나는 나의 짜증을 더하여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하였다.

이제와서 돌아보면 후회스럽기 한이없다.

아! 나의 이 작은 그릇이여!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들판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뜨겁던 여름의 흔적들이 서서히 사라지면서 모든 것들이 벗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무들은 잎새를 떨구고 들판의 곡식들은 이미 추수를 마치고 있었다.
어김없이 계절은 바뀌고 시간은 흐른다.

계속 이어지는 상념 속에서 나는 나의 자세가 갑자기 불편해 짐을 느꼈다.
"아, 그렇지. 몸을 조금씩 움직여야지..."

목도 조금씩 움직여주고 왼 쪽 팔도 맛사지를 해주면서 나는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나의 고통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모두 다 알고 계시는 그 분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신다고한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주시는 이 아픔의 고통은 ...

그 동안 이민온 지 다섯해...
정말 뒤도 안돌아보고 달려만왔다.

이제 쉬면서 뒤도 돌아보고 주위도 살펴보라는 그 분의 뜻인가싶다.

어느 덧 차는 레스브리지를 지나가고 있는데 그 어디에도 "미국국경" 간판이 보이질 않는다.

간판이 나오겠지 하면서 조금 더... 조금 더 간 곳은 옥수수를 베어낸 들판이 끝없이 이어지는 테이버였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우리는 주유소가  있는 근처 몰에서 내렸는데...

이미 미국 국경은 지났다는 것이었다.

온 길을 다시 돌아 35번 도로로 들어서자, 얼마 안되어 국경 간판이 보였다.

시계는 어느 덧 정오를 향해 가는데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어보이고...

길 옆으로 여러 가지 채소를 재배하는 농장이 보였다.

양파, 브로콜리, 당근 등...

끝없이 이어지는 푸르른 들판이 지나가면서 마치 우리 나라의 60년대  농촌 같은 마을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면세점 광고가 보였다.
그렇다면...
국경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미국 국경으로 들어가는 커다란 트럭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검문소에서 우리는 간단한 질문을 받고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그들의 위압적인 자세와 삼엄한 경비는 우리를 질리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화장실에도 갈 수 없었다.


사무실을 한바퀴 돌아 캐나다 이민 사무소를 들어갔다.
거기에는 총을 찬 사람들도 없었고 위압적인 자세로 우리를 겁주는 이도 없었다.

마치 동사무소를 들어온 듯 편안한 느낌이었는데...

몇가지 질문을 마친 뒤 우리는 임시 영주권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편안하게 화장실에도 다녀올 수 있었다.

차에 올라타자 그제서야 배가 고파왔다.
돌아오는 길 우리는 국경 근처 밀크리버에 사시는 남편 선배 댁에서 맛있는 막국수를 얻어먹었다.

너무 시골이라서 한국 식품점도, 한국 신문도 없는 그 곳에서 선배 부부는 열심히 살고 계셨다.
강인한 코리안의 그 기상으로...

머나 먼 국경 여행은 내게 여행 이상의 그 무언가를 말해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