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 - 오탁번

 

거실에서 자정까지 티브이를 보고 나서 잠을 자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침대 위에 스탠드 전등을 켜고 잡지를 읽는 안경 낀 장모님이 계셨다. 아니 장모님 어쩐 일이십니까 목구멍까지 올라 온 말을 황급히 삼키고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장모님이라니 장모님은 벌써 몇 해 전에 돌아가셔서 지금은 천안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신데 장모님이라니 아뿔싸

 

잡지를 읽고 있던 아내는 나의 착각이 대수롭잖다는 듯 웃고 말았지만 그날부터 우리집에는 참으로 이상한 평화가 도래했다 아내와 다툴 일도 없고 깨 쏟아질 일도 없게 되었다. 장모님 모시고 사는 사위의 예절만 있으니까 남편과 아내로서의 비장의 무기도 탄약이 다 떨어졌다.

 

아내가 스물한 살 처녀일 때 부산까지 가서 당신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말했을 때 아주 난감해 하시던 스물다섯 해 전 장모님의 모습이 어쩌면 지금 아내의 모습과 이토록 흡사하단 말인가. 우리들의 가난한 사랑을 근심하는 어른들의 뜻은 아랑곳하지 않고 해운대 해변을 손잡고 거닐던 그 시절의 바닷물결이 어느 날 자정 무렵에 나의 집 안방 침대 위에까지 밀려와서 나를 벌주는 것인가.

 

낯모르는 사람끼리 저녁 이슬 내리듯 새벽 안개 걷히듯 이상한 인연으로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고 울고 웃고 비장의 무기 꺼내어 첩보전 국지전 전면전 치르면서 휴전 종전 항복 탈주를 밥먹듯 하면서 살아가는 남편과 아내의 사회는 중성자 망원경으로도 포착되지 않는 전자파들의 폭풍우일까 모든 시간과 공간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는 블랙홀의 무서운 운명일까.

 

아내여 장모님이 된 나의 아내여 이제는 흰 뼈로 흔적만 남아 민들레 씨앗처럼 가벼워진 그 옛날의 장모님이여 오늘 밤 나를 울리는 미운 아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