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
고등어와 크레파스 / 이현세(만화가)
나는 태어나자마자 큰집에서 양자로 자랐다. 6?25 전쟁 통에 큰아버지가 딸 둘만 남기고 돌아가셨으므로 작은집의 장남인 내가 양자로 간 것이다. 그 사실은 할머니의 엄한 함구령으로 내가 다 클 때까지 아무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아서 나는 전혀 몰랐다. 젖을 떼자마자 아버지는 나를 큰어머니에게 넘겨주며,
“이놈은 이제 죽든 살든 형수님의 자식입니다.”
하고는 평생 동안 두 번 다시 나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만주 사변으로 할아버지를 잃은 할머니는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어린 아들 셋을 데리고 고향 울진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길쌈으로 어린 아들 셋을 키우셨다. 그러다가 6?25 전쟁 통에 맏아들과 둘째를 잃고 막내인 아버지만 할머니 곁에 남게 되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셨다. 그때 우리가 사는 흥해 하천 앞에는 몇 킬로미터가 족히 되는 넓은 자갈땅이 있었다. 가난한 아버지는 적은 돈으로 값싼 자갈땅을 사서 개간을 시작했다. 그러나 개간을 해도 자갈땅이긴 마찬가지여서 호미로 땅을 파서 모를 심어야 할 지경이었다. 자갈땅을 일구느라 아버지와 어머니는 손톱이 다 빠질 정도였다.
아득한 내 기억의 끝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 자갈땅이 있다. 봄철에 언덕에서 달래와 냉이를 캐다가 뱀을 보고 놀라 달아나던 어머니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있고, 대문 앞에는 넓은 미나리꽝도 있다. 또 그해 여름 내내 이삭이 나올 때까지 개간한 논고랑에서 혼자 미꾸라지를 쫓던 다섯 살 먹은 내 어린 모습도 있다.
긴 여름이 가고 들에 누런 물결이 일렁일 즈음에 우리 가족은 흥해에서 첫 수확을 맞았다. 그 시절에 개간이란 엄청난 모험이었던 까닭에 당연히 수확을 맞은 아버지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해 가을에 사라호 태풍이 전국을 뒤덮었다. 그래서 제방이 터지고 홍수가 몰고 온 자갈과 모래가 개간한 논을 덮어 버려서 나락을 한 톨도 수확할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밤새 절망과 안타까움으로 황토물에 떠내려가는 나락을 한 톨이라도 건지려고 허우적대고 다니셨다.
우리 가족은 그해 겨울 내내 보리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래도 아버지의 고집은 꺾이지 않아서 그 이듬해에도 다시 그 땅을 개간했다. 그러나 자금이 모자라 지난해의 절반도 개간을 못한 터에 흉작까지 겹쳐 그 겨울도 우리는 보리죽을 먹으며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그 뒤로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조각난 것들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적에 아버지 손을 잡고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던 일과 나무하는 데에 따라갔던 일, 여름철에 재래식 방법으로 마당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드시던 모습과 강에서 나를 목말을 태우고 조개를 채집하시던 일.
아버지는 어쩌다 해 질 녘에 약주 한 잔에 얼큰해진 모습으로 큰집에 와서는 할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사는 걸 죄스러워하셨다. 그러나 아무리 아버지가 모시려고 해도 할머니가 완강하게 장손 집에서 기거하겠다고 하셨다. 할머니의 그 고집 한편에는 어린 나에 대한 걱정이 있었을 것이고, 아버지가 그토록 큰집에 자주 들르신 것도 실상은 내가 보고 싶어서였음이 이제야 헤아려진다. 그뿐만이 아니라 한 번도 나를 안아 주시지 않던 어머니와 어쩌다 내게 오는 아버지의 손길을 꺼리시던 할머니와 큰어머니의 속내도 그때의 나에게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한번은 식구들이 저녁상을 놓고 둘러앉았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일어나서 같이 드시기를 권하는 두 누님들처럼 나도 아버지를 반겨 맞았으며 아버지가 얼마나 흡족해하셨을까? 그러나 나는 모처럼 상에 오른 고등어에 정신이 팔려 고개도 들지 않고 밥 먹는 데만 열중하였다. 크게 화가 난 아버지는 처음으로 나에게 회초리를 들었고 나는 난생처음으로 당하는 호된 매에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작은 아버지 집에 가! 아버지도 아니면서 왜 때려?”
하고 바락바락 악을 쓰는 나를 할머니가 감싸 안아서 매질을 피하게 해 주셨다. 저녁 시간에 갑자기 나타나서 밥을 양껏 못 먹게 한 아버지를 원망하던 철없는 아들을 뒤로하고, 밥 한 수 뜨지 않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신 당신의 심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러나 아버지는 큰어머니가 하시는 잡화점이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덕분에 자식이 세 끼 밥이나마 배불리 먹는 것을 작은 위안으로 삼으며 가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즈음 아버지는 경주역의 기차 수리 공장에 취직하셨다. 모처럼 으스대는 걸음걸이로 들어오셔서 첫 월급봉투에서 할머니 용돈을 드리며 어린애마냥 좋아하시던 것이 이제는 가장 그리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유월도 중순으로 치달아 매미 소리가 들렸음직한 어느 날로 기억한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날 나는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기만을 안달하며 기다렸다. 그 이틀 전에 모처럼 들른 아버지에게 크레파스를 사야 한다고 졸랐더니 선뜻 돈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머니에 돈을 넣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길거리에는 정말 재미있어 보이는 만화가 있었고, 서부 영화 포스터가 있었으며, 군것질거리가 풍족했다. 나는 그 유혹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영화는 정말 재미있었고, 만화책을 보며 주머니에서 과자를 하나씩 꺼내 오도독 씹어 먹는 맛은 처음으로 느껴 보는 즐거움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진 다음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불 속에 누워서 이미 저지른 이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는 사이에 꾀가 한 가지 생각났다. 아버지가 다시 오셔서 크레파스를 확인하기 전에 큰어머니에게서 돈을 타서 사고, 가능하면 아버지와 큰어머니에게 따로 보여 드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아침이 되니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학교에 갔다.
그날 저녁에 전쟁놀이로 해 지는 줄 모르고 놀던 내가 큰누나에게 끌려가다시피 하여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머리끝이 다 솟구쳤다. 저녁상을 놓고 둘러앉은 가족 속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아버지가 연 이틀 큰집에 오시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잔뜩 주눅이 들어 밥숟가락을 드는 내게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는 크레파스를 구경하고 싶다고 하였다. 엉겁결에 나는 아버지가 돈을 준다고 하고는 그냥 가셨다고 둘러댔다. 맙소사! 정말이지 그것은 기적이었다. 아버지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돈을 주신 것이다.
그 이튿날 새로 받은 돈을 들고 바로 달려 나가 크레파스를 샀다. 그러나 주머니에는 그 이틀 전에 쓰고 남긴 돈이 들어있었다. 교실에 앉아서 손에 만져지는 동전의 감촉에 정신을 팔고 있는데 느닷없이 작은누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우리 교실에 뛰어 들어왔다. 나는 작은누나를 따라 마구 뛰었다. 소방서에서는 열두 시를 알리는, 점심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대고 있었다. 기차 수리 공장에 들어서자 웅성거리는 사람들로 마당이 가득 차 있었다. 사무실 앞에 할머니와 큰어머니, 작은어머니(어머니)가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계셨다. 머저 온 큰누나가 울고 서 있었고 잇달아 작은누나도 울음을 터뜨렸다. 사무실 한 귀퉁이엔 두 동생이 무심히 흙장난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누전사고였다. 전선이 끊어져서 땅바닥에 깔린 것을 당신이 미처 보지 못하고 밟아서 생긴 사고였다. 흰 무명천을 들치고 보니 아버지는 새까맣게 타 있었다. 그것이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났지만, 사실은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죽음을 알기에는 너무 어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 때까지도 아버지는 내 작은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삼일장으로 치러졌다. 멋쟁이처럼 웃고 찍은 아버지의 사진을 뒤로하고 시신을 불에 탔겠지만 나는 보지 못했다. 그보다는 보지 않았다는 편이 정확하다.
나는 할머니와 두 어머니가 그렇게 말리는데도 기어코 학교에 갔다. 죽어도 학교에 가야한다고 장례식도 안 보고 간 어린 철부지를 두고, 차마 돌아가신 이가 네 아버지라고 말해 줄 수 없었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학교에서 조퇴를 하고 온 내가 친척 손에 끌려서 화장터로 갔을 때는 이미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타다가 만 뼈 몇 조각과 재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때서야 내게도 슬픔이 다가왔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아버지에 얽힌 추억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뒤로 우리 가족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얼마나 절망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냈는지, 아들 셋을 모두 잃은 할머니의 한숨과 통곡이 어떠했는지, 아버지 죽음의 보상으로 방 안 가득 쌓인 쌀가마니를 보며 그 쌀을 날마다 한 줌씩 퍼내서 밥을 지으시던 서른 살의 어머니가 어떤 세월을 살아왔는지, 철없던 내가 다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가난이 늘 쫓아다녔다는 것과 그래서 서로 아끼고 결속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나는 내 출생의 내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무 살 되던 해에 우연히 방학을 맞아 들른 고향에서 아버지의 함자에 내 이름이 자식으로 따라다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중 어른들은 도리어 내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집안에서 가장 큰 남자로서 제주가 되었고, 해마다 여름이 오기 전 그날이면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담담하게 당신의 혼백을 만났다. 그러나 어째서 당신 제상에 삼 년 터울인 동생를 두고 내가 제주가 되어야 하는지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또 그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시던 어머니를 어쩌면 그렇게 무심히도 세상에서 가장 착한 작은어머니로만 생각하고 지내 올 수 있었을까? 나는 미련하고 둔한 나 잣니에 질식할 듯했다. 두 동생까지도 알고 있었으면서 온 가족이 한 순간도 내색을 하지 않고 나를 대해 왔다는 것에 놀랐다. 나는 날마다 술을 마시고 몸도 가누지 못한 상태로 어머니를 찾아갔으며, 한마디 말도 없이 쓰러져 잠을 잤다.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였음을 알고 나서 새롭게 되새겨지는 그 많은 기억 속에서 유독 나를 괴롭힌 기억이 있었다. 아버지를 속였던 크레파스 대금. 정말 속은 것이 아니라 가족들 앞에서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당신이 알면서도 속아 준 것은 아니었을까? 분명히 담배 한 갑도 귀한 형편이었을 당신이 그 큰돈을 내게 준 사실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양자로 보낸 자식이 열 살의 나이로 태연하게 당신을 속이고 있는 모습에 얼마나 슬퍼하셨을까? 작업 시간 내내 어린 자식 놈만 생각하지 않았다면 끊어진 전깃줄을 보았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당신의 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장례식 날 학교를 간 내 행동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 행위 자체가 이미 불효였겠지만 그것이 학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빠져서는 안 된다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당신을 속인 것에 대한 죄의식이 작용한 것이었는지 다시 곱씹어 생각해 보았다.
한 달 내내 괴로움에 빠져 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어느날 아침, 누군가 가만히 내 방에 들어왔다.
“네가 나를 봐서라도 이래서는 안 된다. 더운밥 한 그릇 제대로 못 먹인 너는 내 가슴을 후벼 판 자식이다.”
짤막한 그 한 마디 말씀이 쇠못처럼 내 가슴을 꿰뚫고 들어왔다. 머리 한 번 짚어 보시지 않고 어머니는 나가셨지만, 가늘게 떨리기까지 하던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전해져 온, 그 평생의 한을 토해 내는 듯한 느낌을 나로서는 글로 표현할 길이 없다.
한 순간에 아들의 눈빛을 읽으신 어머니와 이십 년 동안 어머니의 눈빛을 읽지 못한 아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아울러 한순간에 아들의 눈빛을 읽으신 아버지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눈빛을 읽지 못한 아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당신은 분명히 내 거짓말을 읽었을 것이고 상처받지 않게 나를 위기에서 구해 주신 것이다.
나는 학업을 포기하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리고 일년 내내 마음만 먹으며 햇빛 한 번 보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만화 그리기를 직업으로 선택했다. 나는 3년 동안 집에 가지 않았고 어느 한 구석에서나마 쓸모있는 인간이 된 나를 아버지에게 보여 드리고 싶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다. 나는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가족을 위해 웃음을 던질 수 있었던 아버지를 생각했고, 그런 아버지를 그리고 싶어 했으며, 아들과 같이 흙구덩이 속에서 전쟁놀이를 할 수 있는 아버지를 그리고 싶어 했다. 잃어버린 아버지와의 세월을 되찾고 내게 주고 간 당신의소리 없는 사랑을 그려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쩌면 그럼으로써 혈육을 못 알아보고 흘려보낸 지난 시간까지도 보상받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서 나는 내가 그런 아버지를 끝내 그릴 수 없었던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조건 없이 사랑을 준 당신을 그리려면 나도 당신을 조건 없이 맞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존경하는 아버지의 업적을 적을 것도 없고 짧기만 했던 당신 인생을 비판해 볼 수도 없다. 다만 당신과 보낸 세월이 하도 허망하여 한 조각 하찮은 기억들이라도 안타깝게 붙잡아 볼 뿐이다.
어느 날 내게 정말 아버지의 존재가 가까이 다가오는 날, 당신이 그렇게 즐기면서도 한 번도 마음껏 마셔 보지 못한 술을 대신해서 내가 마시고 별들이 차갑게 쏟아지는 한 겨울 밤이라도 길바닥에 길게 누워 볼 작정이다.
TellMe : "만화는 나에게 밥이다" 까치 이현세 작가
04.10.2012
만화백서1 - 만화책은 죽지 않았다. 다만 진화할 뿐!
만화책에 얼굴을 파묻고 낄낄거리고, 신문 속 만평을 보며 속이 후련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만화산업은 책을 넘어 캐릭터 산업, 인터넷 속으로 들어와 있다. 딱딱한 책보다 작은 웃음이 필요할 것 같은 가을. 노컷V는 만화계에 한 획을 그은 작가들을 만나 작가의 삶과 만화산업 이야기를 나눠봤다. [편집자 주]
서울 강남구 개포동 작업실에서 만난 이현세(56) 씨는 함박웃음으로 인터뷰를 온 손님을 맞아 주었다. 월남전을 다룬 '저 강은 알고 있다'로 1979년 만화가로 정식 데뷔한 그는 이제 30년 차 작가다.
'까치' 캐릭터와 함께 1982년 발표한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한국 만화계의 한 획을 그으며 인기 만화가로 우뚝 선 이현세 작가. 대학 강의를 병행하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현역'이었다. 만화를 그릴 때 가장 행복하다는 이현세 작가에게 그의 만화 이야기와 한국 만화산업 현주소를 들을 수 있었다.
[기획/제작 : 박기묵 방기열 기자]
08.03.2013 발표된 동영상입니다.
이현세 만화가의 두딸이 표현하는 아버지 이현세,
두딸의 의견과 더불어 회상하는 아버지,,,,
......우리 아버지 그러면 떠오르는 것은 그리움 같은 것이지요 .... (3:22초부터 27초)
윗영상중에서
윗글로 표현하는 모습에서 충분히 그를 이해하게 되는군요.
?충청도에서 태어난 시아버지는 아들 없는 큰집에 양자로 가셨어요 한번도 그분의 느낌이나 양자로서의 삶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요 단지 실제로 태어난 큰 집 누이들보다는 양자로 간 작은 집 누이들하고 더 가까운 것을 보면서 함께 자란 정이 더 크구나-- 어렴풋이 짐작해볼 뿐이었지요 우리는 여기서도 설 추석 차례를 지내는데 바로 그 양자로 간 작은집 부모님이지요 남편은 아버지의 못다한 책임을 다하느라---두분 제사날에는 더 숙연해지지요 시골땅을 물려받으신 아버지의 가장 큰 책임은 바로 제사봉양이었답니다--딸만 있는 작은집의--- 옥인선배님 만화가 이현세에 대하여 자세한 정보 감사합니다 다부진 얼굴과 만화에 대한 열정이 그대로 묻어나네요 올 한해도 음악과 글 안에서 자주 만나기 바랍니다
금재 ~!
이현세님의 글을 읽으며 내가슴이 저린것은 무슨이유인지....
솟구치는 아버지의 사랑을 감지하지 못한 아들.
(늘 날 감싸주시던 울아부지 생각도 나고...우째 늙어 갈수록 아부지하고 같아지는지....)
본인도 원하지 않는 삶을 사셨으니 그분은 많이
괴로우시고 결코 행복하진 않으셨겠지만
그로인해 수많은 만화 애호가들이 그분의 만화를
만났으니 그도 결코 헛된 삶은 아니신듯....
어릴적~
만화가게에 가서 살다시피 했던 나는 아련한 그리움이 떠오르네
몇시간씩 박혀있어 그집에 시집 보낸다고 엄포 놓으시는 엄니때문에
발을 끊었지만....(그집아들이 공부도 못하고 띨띨한 애가 하나 있었거든 ㅎㅎㅎ)
아마도...
책 좋아하는 것은 그시절에 생겨났었던 듯.
이곳에서 옥인도 만나고 금재도 만나니 반갑네 그려.
옥인~! 이제 좀 괜찮니?
금재~! 서방님 안녕하시고?
모두들 건강하길
?순호 선배님--- 여기는 다시 눈이 오려는지 하늘이 흐려지네요 반년 이상 되는 겨울이지만 그래도 해가 바뀌어 새해가 오니 봄이 멀지않은 듯 기다려지네요 만화가 이현세의 글을 보면서 그분 마음 안에 자리잡은 아픈 상처가 만져지고 그 상처를 승화시킨 그분의 만화세계가 다시 보여지네요 순호 선배님 건안하시기를---
내가 결혼하고 일본 가서 처음 신기했던 게 어른들이 만화를 즐겨보는 거였다.
출근길도 포함해서 전차 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화에 빠져 있는 모습이 좀 납득이 안됬었다.
만화는 어린이들만 보는 게 아니라 하나의 장르라는 개념이 없을 때였으니까!
80년대 중반 들어서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가 대 히트를 치면서
오락이 아닌 인문서적도 만화책으로 변신할 수 있다는 획이 그어진 것 같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외할아버지도 아기를 못 낳는 큰집에 양자로 가셨대.
큰 댁은 대 지주였고 작은집은 어렵게 살았다는데 딸도 없이 아예 아기를 못낳아보신 큰 어머니(나에게는 외증조할머니?)는
자식 사랑이 뭔지 모르셨고 가슴으로부터 양 아들을 사랑하시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큰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시고 큰 어머니께서 큰 살림을 다 주관하셨다는데
그 많던 재산이 많은 부분이 큰 어머니 친정으로 넘어갔다고....................
외할아버지께서는 지금으로 말하면 예술분야에 뛰어나셨던 모양으로 아주 예민하고 섬세한 분이셨던 모양!
글씨쓰기 그림 그리기가 뛰어나셔서 집안에 불국사 모형도 만들어 놓으시고 연못에 청운교 백운교도 놓으시고
그 당시로서는 드믈게 사진까지 찍으시고 집에 아예 암실도 꾸며놓으실 정도로 심취하셨다는데
장성하고 결혼 한 이후로는 그냥 주색잡기에 빠지셔서 가산 다 탕진하시고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다.
친정 엄마가 들려 주셨던 외할아버지이야기는 주로 원망이셨다
아버지 노릇 가장노릇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고 그런 아들의 모습이 불안하신 엄마의 할아버지께서
손주들의 학자금 결혼자금까지 목록을 다 따로 만들어놓고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포함한 모든 가산을 다 탕진하셨다고.
아마도 섬세한 성격의 외할아버지께서는 친어머니가 아닌 큰어머니의 가식적 애정에 갈증을 느꼈을 것이고
재산도 뒤로 다 빼돌려서 친정에만 퍼주는 그런 어머니에 대한 반항이 아니었을까 싶다고.(우리 친정어머니의 해석)
옥인이 금재 순호
이 방에서 만나니 정말 새롭게 반갑네!.
근데 이현세 작가의 딸은 정말 탈렌트 해도 되겠다.
이제 보니 이 현세씨가 완전 배우처럼 잘 생겼구나
?짠한 글이군요♥
아버지 사무치게 그립고
예전에는 아들을 양자로
보내고 맞이하는 일이 당연시 되었나 봅니다.
이현세님 관련 여러 정보
잘 보고 갑니다.
안녕 --현숙
눈이 오려는지 인디언들 사는 앞산에이안개처럼 뿌예지더니---차차 밝아지네
참으로 사고, 생각이--라는 게 무서워서---제사 지내줄 아들이 없다고---
서로에게 상처되는 삶을 만들었을까
우리는 남편이 좀 늦게 유학을 가는 바람에 두살 터울인 시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다.
첫 딸을 그 것도 제왕절개를 해서 낳고 (고루하신 시아버지께서 난리를 피셨대나?)
그 다음에 우리가 결혼하고 아들이 태어나고 그 집은 또 딸을 낳았지.
제왕절개라 더 이상은 못낳는다고 하고!
장자도 아닌 그 집에 아들이 없다고 어찌나 걱정(내가 보기에는 순 심술)을 하시던지.
우리 남편까지 나중에 우리 아들이 그 집 제사를 지내준다나 뭐라나.
우린 공부 하느라 8년이나 더 지나서 둘째를 낳았는데 고 녀석도 아들이었다.
정식으로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지만 식사 때나 지나가는 말씀으로(아마도 어머니랑은 이야기 하셨는지도)
"아들 보내기는 힘들 꺼야.ㅎㅎㅎㅎ등등등 요상한 말씀을 흘리시곤 했다.
난 그 당시도 상당히 민주적인 가정에서 할 말 다 하고 자랐는지라 속으로 그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 하시면
당장 보따리 싸들고 애들 데리고 갈 꺼라고 코웃음 쳤는데 실제로 그 당시만 해도 양육권이 여자에게는 없었다.
허지만 실제로 있었다 한들 내가 난리치고 안살겠다는데 조카 데려 갈 집도 없을테고
그런 표를 자주 내시는 우리 시어른만 솔직히 인심 팍팍 잃고 계셨다.
우리 시댁이 5남매인데 그 집 빼고는 모두 아들만 둘씩!
아들 8에 딸이 2인데 고게 한 집으로 몰려서.ㅎㅎㅎㅎ
그런 구시대적인 발상은 전혀 구체적으로는 거론된 적이 없이 지금에 이르렀지만
그 집에 대한 우리 남편이나 다른 사람들의 배려가 어찌 지나친지
우리 아들들은 그 집을 항상 의식해야 했고 난 점점 그 사람들이 싫어져버렸다.
(그 사람들은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삼촌은 30대에 c형 간염을 앓기 시작해서 40여년간 투병 생활중!
동서가 열녀처럼 극진히 보살펴서 생활 자체는 크게 불편한 게 없이 정년까지 갔고(간은 통중이 없어서)
이제는70이 넘었는데 결국 순서대로 간경화에 이어 간암으로 변한지도 10년이 넘는다.
맨날 검사에다 색전술인가 하는 치료를 벌써 수십 번 째 하고 있는 형편(처음에는 5번 이상 못한다고 했는데)
그러다 보니 우린 평생 그 집에 대한 배려를 해야 했고
인간성이 참 좋았던 그 부부도 점점 자기들의 처지에 대한 특권의식 같은 것이 생겨 버렸다.
자기들은 실제로 아무 것도 안하면서 장남이나 큰며느리에 대한 비판이나 하고.
아픈 우리도 이 정도 하는데..........(우리에게는 실제로 전혀 도움 안되는데) 하는 웃기는 자만심이라고나 할까?
우리가 경조사 다 챙기느라 쩔쩔 맬 때도 아들아니라고 무시당한 보상심리였는지
넉넉지도 않은 살림을 딸들의 엄청난 과외비로 썼고 다행이 다들 좋은 대학 나오고 잘 되긴 했다.
일찌감치 강남에 자리잡은 덕분으로 실제 현금은 없지만 10억이 넘는 집에 살고 있으면서
항상 돈이 없다고 2억짜리 집에 사는 우리에게 다 부담시킨다.
바보같은 우리 남편은 현금이 없다는 걸 강조하면서 우리나 같다나
슬슬 지쳐가던 중에 내가 아프게 됬다.
희안하게도 내 마음이 엄청 편해지고 "이제는 나도 맞먹으니 당신 집에 무리해서 배려 할 필요가 없다"
는 생각이 들게됬다.
그런데 오래 아픈 사람과 그 가족은 남의 질병을 좀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더라구.
수술한 형수는 차례상 차리게 두고 자기 마누라는 손주봐야한다는 말을 스스럼 없이 하고!!!
나도 그럴 때는 남편에게 일부러 무식하게 응수했다
"아니 딸집 손자 봐주는 게 윤씨댁 차례 못지내는 이유가 되나?
무신 사람들이 그리 본데가 없나?"
솔직히 사정이 이래서 못 가니 정말 죄송하다고
되도록 간소하게 하시라고 하면 서로가 기분좋게 넘어갈 일을 고리 얄밉게 하니........
이 나이가 되고 마누라도 아프고 하니 뭘 몰라도 한 참 모르던 울남편도 열이 받히는 듯 하다.
암튼 우리 남편은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미명 하에 (그것도 장남 컴플렉스지. 실적 좀 올리고 싶어서!)
같이 사는 사람을 아주아주 힘들게 한 결과 (마누라가 약자인데)
난 시어머니 돌아가신 후에 모든 시댁에 관계된 식구들을 그냥 예의로만 대하게 됬다.
상태가 안좋아졌다고 해도 못들은 척! 누가 아프다고 해도 무관심!
그래서 이 나이에 어쩌라구?
결정적인 사유가 발생할 때만 축의금 부의금 챙기고 참석!
내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권장사항은 아니지만
안믿는 우리 남편 눈에는 못마땅은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판단한 모양!
특히 부산에 함께 살면서 수십년의 생활을 보아 온 사촌형제들은 무조건 내 편이다.
금재 후배가 올린 글에 결국은 별 소리 다 해요.
언제나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도 이 문제의 모든 주범은 우리 시어른들이었어요.
평생 자식들을 엄청스레 들볶았기때문에 자식들이 서로 따뜻하게 감쌀 여유가 없었어요.
서울에 사는 자식들은 부산에서 형이 좀 잘하지 하는 생각을 한 거고
우린 정말 한 시도 편할 수가 없이 못살겠는데 그런 원망까지 들으니 서운했던거구요.
참 사이좋은 형제들이었는데............................................
부모라고 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게 해준 분들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절대로 남에게 강요하지 말자 싶네요.
?명옥 선배님 마음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아있는 이야기에 공감이 가네요 저는 가난한 장남 만나서 시동생들 대학가르치고 시어머니에게는 큰아들이자 어머니남편이면서 나의 남편이기도한---결혼 30년이 다 되어가는데 --그동안 무슨 일만 있으면 그 상처가 흔들리면서 바닥에서부터 올라오지요 요즈음 많이 나아졌어요 홍성남 신부님이라고 마음공부 하시는 분인데 도반신부님 사이트 들어가서 마음다스리는 공부룰 하지요 그동안 내고생 알아달라고 소리쳤고 사람들에게 의지하려던 구태의연한 마음을 바꾸었어요 명색이 천주교 신자라면서 ---돌아보면 안타까운 부분들이 많아요 지나간 날들 후회되는 일들, 아쉬운 것들---조금씩은 보속하면서 지내렵니다
금재후배!
먼저 이런 귀한 글을 올려주어서 고마워요.
이현세님의 진솔한 표현이 심금을 울리며 여운이 깊게 남아요.
이곳 친지중에 만화애호가가 있어요.
처음에는 성인이 되어서 만화를 보는 그 사람을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어느 날 빌려주며 보라는 만화가 있어 읽었었는데,
바로 어느 인물의 전기를 만화로 그린 것이었어요.
선 하나 하나가 얼마나 섬세하던지,, 내용보다도 그림에 빠졌었지요.
그 후로는 가끔씩 빌려보고 있어요.
문학작품을 글과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은
'그림소설'이라는 또 하나의 예술로 승화 되었고요.
어떤 만화가는 과감한 생략으로 줄거리 위주로 하기도 하는데,
저는 섬세한 그림이 있는 것을 더 좋아해요.
어느 날은 일본 만화가 OSAMU TEZUKA의 일생을 무용극으로 하는 공연도 다녀왔어요.
일본 만화가들이 그린 것들이 많이 선호되고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우리 나라만화도 이렇게 국제적으로 알려지기를 바랬었지요.
작년 봄에 비엔나에서 열리는 '만화 전람회'에 갔다가 딱 한권을 보고 구입해 왔어요.
오늘 금재후배가 올려준 본문 글을 읽으며,
이현세님 내면의 소리를 듣게되어 많이 기뻐요.
유년기의 운명 전이를 극복하고
온몸을 부어 가꾸는 그의 예술에 박수를 보냅니다.
기회가 되면 만화도 구해서 더욱 친해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