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밤에 하이쿠를 읽다 / 장석주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졌다. 서리 내리고, 곧 얼음 얼겠다. 초빙이 얼고 북풍 몰아치는 밤에 문득 깨어나 칠흑 같은 어둠과 마주한 적이 있었지. 괜히 벽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속으로 물어보았지. 천 년 뒤에 나는 어디에 있을까? ‘밤은 길고 나는 누워서 천 년 뒤를 생각하네.’ 천 년 전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었나 보다. 시키라는 시인이다. ‘인생은 순간, 믿지 못하겠거든 번개를 보게’라고 바쇼는 썼다. 둘 다 하이쿠다. 하이쿠는 일체의 잉여를 배제하고 한 줄의 궁극에 닿음으로써 언어 낭비를 죄로 만들고, 탐욕을 추문으로 돌린다. 현대의 긴 시들이 수사학적 노동이라면, 하이쿠는 최소의 언어로 찰나를 겨냥하고 본질을 뚫는다.

1960년대 일본을 찾은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17자로 응축한 시(詩)에서 ‘원인 없는 사건, 인간 없는 기억, 닻줄 없는 언어’를 보고, 그것에는 ‘붙잡을 수 있는 중앙부, 즉 광휘의 핵심부가 없다’고 썼다. 하이쿠에서 불교의 무(無)와 선(禪)의 깨달음에 상응하는 빛을 보고, 단박에 매혹당했던 것이다. 하이쿠는 언어의 고군분투가 아니다. 차라리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에서 달아난다. 그것은 직관이고 계시이며 해탈 그 자체다. 의미를 지시하지 않는 언어에 덧붙이는 해석이란 사족(蛇足), 쥐뿔, 헛발질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하이쿠라는 17자로 이루어진 말 화살을 맞은 적이 있는가? 추분 지나 길어지는 가을 밤에 하이쿠는 즐겁게 읽고 금세 잊어도 좋다.

이싸는 노래한다. ‘이 가을 저녁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결코 가볍지 않네.’ 바람이 불 때마다 단풍나무의 붉은 잎들이 우수수 지며 흩날린다. 이 구멍 저 구멍에서 귀뚜라미들이 튀어나온다. 달 높이 뜨고, 득음한 풀벌레 청아한 소리 드높다. 무덤 도굴꾼들조차 문득 저희가 하는 짓이 덧없다 여겨져 잠시 연장을 쥐었던 손을 놓고 이게 과연 옳은 일일까 하고 의문에 잠긴다. 이 해거름, 나는 애초에 형체도 없고 모습도 없었는데, 어쩌다가 인간으로 태어났을까.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므로 이 생은 가볍지 않다. 생이 무겁다면 죽음은 가벼운 것이겠지. 장자는 아내의 주검을 윗목에 두고 장구를 두들기며 노래를 했지. 생이라는 무거운 굴레를 벗고 홀가분하게 애초에 있던 곳으로 돌아감을 기뻐했다. 오는 새벽엔 땅에선 나무닭이 울고, 북쪽 하늘에선 별들이 울며 지겠다.

다시 이싸의 시. ‘울지 마라, 풀벌레야, 사랑하는 이도 별들도 시간이 지나면 떠나는 것을!’ 사람은 왜 소리를 듣는가? 특정한 소리가 지닌 물리적 진리를 자각하려는 본능 때문이다. 소리는 위험과 기회를 식별하게 만드는 신호다. 모든 동물에게 청력(聽力)은 생존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포유류가 제 청각 기관을 완성하는 데 2억 년이 걸렸다. 온갖 소리를 듣는 귀의 값으로 따지자면 천문학적인 수치로 따져야 할 만큼 비쌀 테다. 이 정교한 소리채집 기계를 우리는 얼굴의 좌우 양쪽에 달고 산다. 두 귀가 똑같은 찰나로 소리를 듣는 것은 아니다. 소리가 한쪽 귀에서 반대쪽 귀까지 가는 데 몇 마이크로초가 걸린다. 그 차이로 양쪽 귀 사이에 있는 두개골에 ‘소리 그늘’이 생긴다. 그 귀로 가을밤 풀벌레 울음소리를 듣는다. 듣고 보니, 울음은 풀벌레가 갖춘 우주적 지성이고, 음향학적 교양이다. 가을밤은 풀벌레들의 교양으로 충만하다. 달밤에 풀벌레가 우니, 사랑하는 이도 운다.

소칸은 노래한다. ‘달에 손잡이를 매달면 얼마나 멋진 부채가 될까?’ 둥근 달은 어둠 속에 하얀 가면을 쓰고 나타난 태양이다. 달의 철학이란 태양에 대한 고찰이고 명상이다. 달은 밤의 야경꾼이다. 달은 어두운 골목골목을 하나도 빠짐없이 비추고 돌아다닌다. 달의 반려동물로 어울리는 것은 고양이다. 달밤에는 발정한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보들레르 시집을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달은 주기에 따라 크기와 모양이 달라지고, 각각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로 불린다. 초승달은 막내딸 같고, 하현달은 헤어진 애인 같다. 달은 따먹을 수 없는 하늘에 매달린 과일이다. 달에 손잡이를 매달면 멋진 부채가 될 거라는 옛 시인의 상상은 어린아이의 그것과 같이 천진난만하고 철이 없다.


다다토모는 노래한다. ‘이 숯도 한때는 흰 눈 얹힌 나뭇가지였겠지.’ 두말할 나위없이 숯은 검다. 숯이 처음부터 숯인 건 아니다. 옛 시인은 까만 숯에서 흰 눈 얹힌 나뭇가지의 내력을 추적한다. 숯이 온몸으로 드러내는 검정은 음양학(陰陽學)에서 음의 기운을 품은 색이다. 양이 높고 따뜻하다면 음은 춥고 낮다. 오행으로 풀면 검정은 계절로는 겨울, 방위로는 북쪽이다. 숯, 까마귀, 검둥개, 흑암신(黑闇神) 따위가 검다. 검은 것으로 치자면 오계(烏鷄)도 빠지지 않는다. 오계는 뼈와 깃털, 껍질, 살, 발톱, 부리, 눈까지 다 검다. 오계가 한국을 대표하는 토종 먹거리로 뽑혔다. 내 고향과 지척거리인 충남 논산시 연산의 한 농원에서 오계의 명맥을 잇고 있다 한다. 고려 말 신돈이 오계로 정력을 보충하고, 조선 숙종 임금이 오계로 중병을 떨치고 일어났다 한다. 검은 것은 건강에 좋다.

가을 햇살이 여섯 자 장지문을 환하게 물들이는 시골집에서 파초와 모란과 작약을 심고, 마당에는 오계 열댓 마리 풀어놓고 키우며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