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
전편 한 여자 (14) 사람들의 음악이 있다. (클릭)
-58.-
여행을 생각하니 지금처럼 침대에 누워지내는 것이 아깝다.
이 생각 저생각 하는데 어제 의사가 왕진을 왔다.
? 굳 모닝! 혈색이 좋아 보이네요. 좀 푹 쉬었어요?“
? 굳 모닝! 예, 여기가 조용하니 저절로 맘도 푸근해지네요.“
혈압을 재고 영양제를 놓아준다. 그러는 사이 비올렛이 찾아와 은지를 데리고 승마시키러 갔다.
? 한 이삼일 편히 지내시면 회복이
되겠어요. 식사도 열심히 하고요.“
? 예...제가 그 후에 여행을 떠나려고 하는데요.. 괜찮겠지요?“
? 어지러운 것 없어지면 괜찮지만 다니면서 음식이 입맛에 안 맞는다고 식사를 제대로 못하면 다시 현기증이 날지도 모르지요.“
? 아, 그것은 걱정마세요.
딸애랑 다니니까 식사는 제대로 챙겨 먹을 거에요.“
? 흠... 따님하고 다니신다고요? 둘이서만?“
? 며칠간은 다른 학생도 대동하고요..
그 후에는 우리만요“
? 예, 그럼 제가 내일 까지 상비약을
준비해 드릴게요. 다니시다 필요할 때 복용하세요. ?
? 예.. 정말 감사드려요.
이리 배려해주시니...“
? 하!하!하! 저의 첫 번째 한국 환자분이시니 이 정도는 해드려야지요.하하하!“
어머! 이 의사분이 농담도 하시네.
? 똑! 똑! ? 노크가 들린다.
여자가 팔에 영양제를 맞고 있는 상황이라 움직이지를 못한다. 의사가 대신 문으로 가서 열어 준다.
? 어머! 은지 어머니! 많이 편찮으셔요?“
소연학생이 들어 오며 걱정의 소리를 한다. 두 손에는 여자의 여행 가방과 두툼한 쇼핑가방이 들려있다.
그 뒤에는 파울이 웃으며 서있다.
? 소연 학생 걱정 말아요. 좀 어지러운 것이에요. 이렇게 누워있으니 내가 무슨 병자 같지요? 주사 다 맞고 일어나면 평소 같아요.“
? 그래도요..조심하셔야지요.우선 비엔나 집에 있는 것 중에서 좀 골라 왔어요. 그리고 로렌스 교수님하고 동양상회 가서 은지간식거리와 라면도 사왔어요. 은지가 한국음식 먹고 싶을 거라고 교수님이 그러셔서 저도 그렇게 생각이 들더라고요..“
? 어머.. 나도 생각 못했던 것을.. ?
여자가 소연 학생하고 얘기 나누는 동안 파울은 의사와 여자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다.
의사가 여자에게 닥아 온다.
?주사 바늘은 어제처럼 로렌스 교수님께서 빼드릴 거에요. 저는 이제 돌아가고 내일 다시 올게요. 그때 상비약도 가져오지요.“
? 예, 안녕히 가세요“
그와 작별이 마치자 파울이 가까히 다가온다.
? 제이드, 오늘 내가 얼마나 바뻤는지 알아요? 그런데 지금 여기 도착하니 한없이 여유가 생기네요.“
? 대학에는 안 가셨어요? 이리 빨리 오시고요.“
? 조교에게 연락해 두었어요. 어차피 학기 방학이 얼마 안 남아서 요즘은 좀 한가한 편이거든요.. 제이드가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같이 지내고 싶어서요. 소연 학생은 영어, 독일어 모두 능통하니 대화가
잘 되고 좋네요.. 참 한국어도 잘 하겠지요?
하하하!“
? 아니, 없어요. 어제 전화로 부탁한 것 준비해 왔으면 되었어요. 조금 있으면 점심 식사때이니까 은지에게 가 봐요“
? 은지 어머니. 저에게 존댓말 하지 마세요. 조카처럼 말을
놓으세요.“
? 그래요.. 천천히 그럴게요. 그나저나 이렇게 소연 학생
시간을 뺏어서 어떡하죠?“
? 며칠 저도 쉬려고 했었으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여기 처음 왔는데 너무 제 맘에 들어요. 그래서 고마워요. 오히려.“
참 말도 예쁘게 하네..
소연이가 나가자 여자는 파울과 단둘이가 된다. 둘이는 잠시 묵묵하다. 파울이 음반들을 살펴본다.
? 제이드, 어떤 음악을 듣고 싶어요?“
? 판이 그리 많아요?“
? 어머니가 모아 놓으신 것이라 성악곡이 대부분이에요.“
? 갑자기 곡이 떠오르지 않네요. 참! 모짜르트 심포니를 듣고 싶어요 그런데 여기서 지내다 보니 이곳의 고요함이 점점 좋아지네요. 어제 말씀해주신 자연의 소리를 듣는 것이 이제서야 이해되는 거에요. 고마워요“
?주사 마치고 점심 먹은 후 우리 모두 비엔나 숲으로 나갑시다. 아! 여기 모짜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5번이 있어요.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곡이에요.“
파울이 음반을 올리고 곡을 틀자 온방안에 음악이 꽉 차온다.
며칠 후면 모짜르트의 고향 잘츠부르그로 갈 거지.. 어서 몸을 추스리자.
? 음악이 참으로 좋네요..한국에서 피아노로 반주한 적이 있어요.역시 오케스트라와 하니 진미가 있어요.
참. 그리고 숲 산책하는 것은 은지가 돌아오면 상태를 보고요. 승마연습으로 지쳤으면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 당신이 은지 얘기를 할 때 보면 역시 엄마가 생각하는 것이 다르구나 싶어요. 나는 자식을 키워본 적이 없어서 은지 생각에는 모자라군요.“
? 아니에요. 오늘도 은지 간식 챙기신 것 보면 엄마 보다 나아요 . 호호!“
? 당신이 웃는 것을 보니 이제 좀 나아진 것 같아 안심이 되네요. 하하하!“
복도 쪽에서 좀 왁짜한 소리가 나더니 은지와 소연이가 방으로 들어온다. 땀이 송송난 딸애가 기분이 좋다.
? 엄마! 나 오늘 정말 신나.. 소연 언니가 오니까 정말 정말 신난다. 한국말을 하니까 말이야.“
? 그렇게 좋아?“
? 응 , 엄마 나 지금 배고파. 소연 언니가 그러는데 라면
가져왔다고..그것 먹어도 되지?“
아. 어린 것이 저리도 한국음식이 그리웠나?
여자는 소연이에게 호텔주방에 가서 부탁하라고 시킨다. 딸애와 소연이가 나가자 파울은 영문을 몰라 눈이 둥그래졌다. 여자가 설명을 해주니 웃으면서,
? 저런 꼬마를 데리고 어디로 여행을 간다고 해요.. 비엔나에서 쉬다가 칠월에 연수 받고 나와 독창회 해요.“
흠.....
여자는 아무소리도 않는다.
? 제이드는 꼭 여행하고 싶은가 봐요..얼굴에 그렇게 써있어요.“
? 그래요? 일단 저의 현기증이 없어지는 걸 보고요.“
파울이 링게르 주사가 얼마 남았나 보다가
? 이제 뽑아야겠어요. 벌써 시간이 이리 지났나요? 제이드하고 있으면 시간이 왜 이리 빨리 가는 것 같은지...“
주사를 뺀후 반창고를 붙여준다. 그의 손길이 그녀의 피부를 닿자 여자가 훔찔한다. 파울이 짐짓 모른 척하며 모든기구를 한쪽으로 밀어놓고,
? 제이드! 그럼 가져온 물건들 정리 좀 해요. 나는 내려가서
점심식사 준비 시킬게요. ?
? 예, 저는 따뜻한 스프정도면 되어요.“
? 안 돼요. 의사 말이 당신 영양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대요.알아요?“
? 그래도 느끼한 것은 거북해요.“
? 오케이. 그럼 좀있다 아래로 내려와요.“
파울이 나가자 여자는 가방을 열어 옷을 꺼내 갈아입는다. 엊그제부터 얼마나 옷을 갈아입었던가 한참동안 같은데 사실은 어제와 그제 이틀에 일어난 일들인 것이다.
사람이 살다보면 순간이 영겁으로 이어지는 것인가 싶은 때가 있고 오랜동안의 일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때도 있다. 요즘 여자에게는 이런 현상이 번갈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얀 면티에 하얀 긴 치마를 받쳐입고 얇은 하얀 부라우스를 걸친다. 장농 거울 앞에서 서 보니 너무 흰색이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흰색에 대비하여 누렇게 보인다.
아.. 그냥 되는데로 입어야지 어째.
흰 옷들을 벗어내고 베이지색에 신문지 종이처럼 영문 갈색무늬 들어간 긴 스커트에 같은 천으로 사파리 남방형 부라우스를 허리에 집어놓고 좀 넓은 검은벨트를 찬다. 며칠 전 여행갈 준비를 하며 동네 부틱에서 사 놓았던 것이다. 화장은 안하고 입술만 살짝 바른후 아랫층으로 내려간다.
로비에 있던 모두가 놀란눈들을 한다.
? 엄마! 우리 엄마 맞아요?“
? 아줌마! 언제 그 옷을 ? 멋지네요.“
파울은 아무 말도 안하고 웃음가득히 쳐다본다.
? 얼마 전에 산거야. 길이가 길어서 줄일까 했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지금은 그냥 입어야지 뭐.. 무슨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하는 여자 모습이지? 호호!이제부터 반말한다. “
? 예, 그렇게 말을 놓으세요. 정다운데요, 호호!그리고 . 요즘 유행이 롱스커트이잖아요. 아줌마! 너무 잘 어울려요. 자르지 말어요. 그게 더 멋진데요.“
? 알았어. 호!?
?제이드가 내려오기 전에 소연이하고 의논했는데요. 점심 식사후 소연이는 은지랑 그냥 호텔에 있겠데요. 좀 쉬고 싶다고..제이드는 나랑 잠시 드라이브하며 근처를 돌아 보지요. 그냥 침대에서만 지내는 것도 건강에 안 좋을듯해요.“
? 소연아, 그렇게 쉬고 싶어? 같이 가지.“
? 아줌마. 저 그냥 은지랑 한국말 하면서 쉬고 싶어요. 그런 것 있잖아요.독일어 듣고 말하는 것을 라디오 스위치 끄듯이 스톱하고 싶은 것...“
?그동안 이곳에 적응하느라 힘들었나 보구나. 그럼 그리해. 은지도 한국말 고팠나 보다. 어제오늘 엄마랑 떠나 지냈었거든 . 은지야 그렇지?“
? 엄마. 나 그냥 언니랑 침대에서 뒹굴래. 언니가 동화책도
가져왔어“
여자가
파울에게 말을 전해준다.
? 그럼 소연 학생방에 침대가 두 개 있으니 은지랑 같이 써도 되겠네요. 자, 그럼 우리 식당으로 갑시다.“
딸애는 이미 라면을 먹었다고 간단히 먹는다. 식사 내내 은지와 소연이 키득거리는 것을 보는 파울은 신기한가 보다.
? 은지가 행복해 보여 다행이에요. 그동안 말친구가 없어 힘들었었나 보네요“
식사를 마치고 2층으로 올라와 소연학생방을 들여다 본다. 창가에 꽃들이 밖으로 늘어진 것이 하얀 얇은 커텐뒤로 보인다. 목재가구도 오스트리아 전통적이다.침대가 두 개 놓여 있다.
? 엄마! 여기서 언니랑 같이 지내는 것 맞아요? ?
? 그래, 근데 너는 그리 신나니? 엄마랑 지내는 것 보다도?
섭섭하네“
? 아이, 엄마방에는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서 내가 맘대로 움직이지 못 하잖아요. 그리고 소연언니랑 처음으로 지내니까..“
딸애가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니 여자도 흐믓하다.
? 자 그럼 제이드, 우리는 이제 드라이브 가지요.. 우리 공주님들은 편히 쉬고 계시고요 하하하!. 맛있는 거 사올게요.“
모두들 파울 차 주차한 곳으로 온다. 파울이 차 문을 열어준다.여자가 오른다.
? 그럼, 좀 있다 보자.“
? 아주머니 걱정 놓으시고 재미있게 지내셔요“
? 엄마! 아주 아주 천천히 와! 그래야 언니랑 싫컷 놀지
?
파울이 문을 닫고 시동을 건다. 여자는 차가 호텔 주차장을 빠져 나오는 동안 백미러로 딸과 소연이 안 보일 때까지 쳐다본다.
? 제이드, 그리 안스러워요. 은지를 놔두고 오는 것이...“
? 글쎄, 여기가 외국이라 그런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곧잘
친정아버지나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했었는데요..“
? 아버님께서 손녀를 봐주어요. 어머니는요?“
? 오래전에 돌아가셨어요.“
? 그래요? 그럼 우리 모두 엄마 없는 반 고아이네요. 아, 그래서 제이드가 은지를 유독히 아끼는 군요. 엄마사랑을 흠뻑주려고“
? 그럴지도...“
차는 기분좋게 달린다. 파울이 일부러 서행을 하는
것이다.
? 제이드 조기 아래 십자가가 보이지요..거기가 '하일리겐크로이츠’라는 수도원이에요. 옛날에 하이든, 슈베르트등 이곳에서 오르겐 연주를 했었지요. 지금도 올겐 연주회가 종종 있어요.제가 전에 이곳에서 독창을 했었어요. 그래서 수도원 종사자들이 저를 잘 알고 있어요. 제이드 하고 같이 가면 무척 좋아할 거에요.“
파울이 설명하며 내려오는 동안 이미 차는 주차장으로 들어선다.수도원 색갈이 거의 흰색에 엷은 분홍, 엷은 파랑으로 선을 두른 모습이 중세적 모습을 그대로 하는 것이다. 세워둔 차들만 다른 곳으로 움직여 놓는다면 시대가 영락없는 그때의 모습이리라.
차가 선다. 파울이 차를 내려 여자의 문을 열어 주러 온다. 열린 문 밖으로 오른쪽 다리를 먼저 내놓고 내리려는데 올려간 스커트 옆쪽의 터진 사이로 여자의 허벅지가 언뜻 보인다. 여자는 깜짝 놀라 스커트를 두 손으로 부여지고 차 바깥으로 나오지를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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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이드! 손을 풀고 균형을 잡아야 제대로 내리지요. 자,
내 손을 잡아요 어서“
그가 손을 내민다. 여자는 스커트를 부여 잡았던 손을 풀며 스커트 기장을 내리고 몸의 균형을 잡아 그의 도움없이 차를 내린다.
부끄럽다. 왜 내가 이리 당황할까.
촌스럽기가 무슨 사춘기 소녀인냥..
파울이 그녀가 완전히 내린 것을 보고 차를 잠그면서 빙그레 웃는다. 여자는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
? 제이드, 자 이제 안으로 들어갑시다. 흠... 수도원장님이 놀라시겠네.웬 여기자가 오셨나하고 하하하!“
여기자? 아... 내 옷무늬를 보고 농담하네.
? 왜요? 여기자만이에요, 아프리카
여자사냥꾼도 되지요.푸훗!"
"오케이. 그럼 둘 다요. 그런데, 제이드가 그리 입으니 여태 보아왔던 제이드하고 분위기가 전혀 다르네요.. 당신은 연구를 해볼 만해요.하하하“
? 너무 놀리지 말어요. 저도
스스로 잘 모르는 게 많아요. 이곳에 와서 특히요.“
수도원 안마당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탑이 중앙에 있다.
여자가 분위기에 압도하여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다.여자의 모습을 바라보던 파울이 말을 시작한다.
? 제이드, 당신이 감격하는 모습은 무어라 형용하기 어렵게 나에게 감동을 주어요. 오늘 여기 온 것 잘 했네요.잠깐 여기서 기다려요. 저기 수도원 안 회랑은 아무나 못 들어 가요. 제가 관리 수사님께 가서 열쇠를 받아 올게요.“
파울이 다녀오는 동안 여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사방을 쳐다본다. 커다란 나무들 그 뒤로 아치형 길...처음 보는 것들인데도 낯에 익다. 소설 읽으면서 상상하던 모습이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이다.
파울이 다가와서 그녀의 손을 잡으며 커다란 열쇠를 건네준다.
? 제이드. 이곳은 봉쇄수도원이라 옛날에는 세속의 사람들이 아무도 못 들어 오던 곳이에요.특히 여자는 더.. 그런데 세월이 지나니 이리 들어 오는 거에요. 오늘은 제이드가 문을 열어 나를 저기로 들어가게 해 주어요.“
그가 인도 하는 곳으로 간다.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석주로 즐비한 회랑에 압도된다. 정사각형의 회랑 안에는 마찬가지로 정방형의 아름다운 화원이 있는데, 둘러싼 고색창연한 기둥과 어울려 대조를 이룬다.
? 이곳 회랑을 수도사들이 돌던 곳이지요. 자 우리도 돌아 봅시다.“
여자는 고개만 끄덕이고 걷는다.
바깥은 6월의 열기가 익어가는데 이 안은 서늘하다.아무도 없는 회랑을 걸으면서 파울의 설명을 듣는다.여자가 회랑중간에 있는 석조분수대에서 멈춘다.물이 야트막하게 흐르면서 돌을 빛나게 한다. 아랫부분은 촛불에서 촛농이 쌓인듯이 석암이 쌓여 있다. 얼마나 유구한 세월의 흔적이려나..
스테인드 글래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이 너무 고웁다.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두 눈을 감는다.
아! 화원으로부터 새가 날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소리도..
파울은 가만히 여자의 행동을 쳐다보며 아무 말이 없다.
(지금 기도를 하는가? 내가 옆에 있는 것을 의식조차 안하는가?)
여자의 감은 눈에 파울이 손을 얹는다. 여자의 눈이 파르르 떨린다. 그러나 그대로 감은 채이다.
? 제이드, 이제 나갑시다.“
여자가 눈을 뜨며 '왜요?' 라는 눈빛으로 묻는다.
"당신의 모습을 보니 나의 맘이... 이곳 수도원에서는 도저히..."
여자는 파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 ..' 여자가 이런 표정으로 파울을 바라본다. 파울이 앞장 서 뚝뚝 나간다.여자가 당황하여 그의 뒤를 따른다. 밖으로 나오니 눈이 부셔 잠시 그냥 서 있는다.
?제이드, 또 어지러워요.? ?
? 햇빛이 부셔서요,그리고
왜 당신이 갑자기 회랑을 떠나 나온지 이상하고요.“
?.............“
? 얘기 안 해도 되어요..자
그럼 가요."
?................“
그가 차세워 놓은 곳으로 간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여자는 파울을 따라가는 대신 주차장 옆에 있는 레스토랑 쪽으로 간다. 잠시 서 있다가 노천 카페의 빈자리에 앉는다.차에 도착한 파울은 그제서야 여자가 뒤에 없는 것을 알아챈다.주위를 돌아보니 노천카페에 앉아 있는 여자가 보인다.
여자는 파울이 자기를 발견한 것을 보았지만 아무 표시도 안 하고 커다란 플라터나스 나무의 생김새를 감상하듯이 하늘 쪽을 바라본다
잠시 그러고 있는데, 파울이 다가온다.
?여기 맘에 들어요?“
? ....................“
?기분 상했어요?“
? 좀 어색해요. 그래서 잠시
당신과 떨어져 있고 싶어요...“
? 미안해요...기회가 되면 얘기해 줄게요.우리 좀 더 드라이브 할까요? 아직 해가 좋은데요..“
? 아니요.. 여기 좀 더 앉아 있으려고요. 저는 이런 곳에 처음 왔어요.이제서야 정말로 유럽의 한 가운데 있는 느낌이에요.특히나 로마네스크, 고딕, 중세 시절의 한 가운데....“
? 제이드, 정말 미안해요. 나는 당신이 이렇게 유럽문화를 속속들이 받아드릴 줄 몰랐어요. 그렇군요... 당신에게는 여기 비엔나에 와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처음 대하는 유럽생활이군요. 여기에서 태어나 성장한 나는 유러피안이므로 그런 점에 생각이 모자랐어요.“
? 미안할 필요 없어요. 저도
마찬가지로 파울의 생활방식을 제대로 알 수가 없으니까요.“
? 제이드 ...흠...그렇네요.. 우리가 만난지도 얼마 안 되었고.. 그리고 당신은 떠날 거고..“
? 그래요 저는 떠날 사람이에요. 파울이 우리 모녀에게 대접해주는 것들에 너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스러워요.. 학교까지
쉬면서...“
? 제이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에요. 부담 갖지 말아요.
다 나를 위해 독창회 준비하다 병이 난 것을
생각하면 내가 고마워해야지요..“
? 파울.. 그렇게 생각할게요.
자, 그럼 돌아가지요. 이제 여기서 이만 일어나요.“
여자는 말하면서 일어난다.
? 제이드, 당신은 항상 즉결적으로
행동해요? 맘이 그리 간단히 움직여요?“
? 무슨 뜻이에요? 제가 지금
그래요?“
?예, 생각의 방향을 돌리면 즉시로 행동하는 것이..지금도 '이제 여기서 이만 일어나요’ 말하자 마자 일어났잖아요“
? 어머? 정말 지금 그랬네요. “
?................................“
파울이 아무말도 안하고 여자를 뚫어지게 본다.
? 왜 그래요? 오늘 파울이
좀 이상해요.“
? 흠...제이드, 당신을 이렇게 가까히 곁에 두고.... 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 지금 너무 힘들어요.“
(계속)
여자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 앉는다. 오... 파울! 그의 고뇌에 찬 얼굴을 차마 바라볼 수가 없어 다른 쪽을 바라본다. 이 사람은 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쳐다 보지도 못 할 때의 그 어려움을 그대는 아는가..
대학시절 만났던 박영빈이가 한국을 떠난 후 단 한 번이라도 얘기만 나누어도 좋겠다고 얼마나 그해 가을에 그리워 했었던가..귓가에 들리던 그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 듯하여 거리를 걷다가도 몇번씩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던가...이제는 서로가 다른 세상에 산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세월이 흐른 것인가.
얘기를
잇지않고 끊다가 어렵게 연결하는 파울을 바라보며 그때의 여자 가슴처럼 울려오는 것이다.
안돼, 이렇게 다시 누군가와 시작하는것은.. 멈추어야 해.. 잠시동안 '음악의 동반자’일 뿐이야.
?제이드,
그래 갑시다.아까 내가 준 수도원 열쇠를 이리 줘요.돌려 줘야 해요“
여자가
손에 들고있던 열쇠를 건네 준다.
? 같이 갈래요? 수사님이 아까 제이드와 같이 왔다고 하니 회랑 돌아 본 다음 당신을 보고 싶다고 했었거든요.“
? 아니에요. 그냥 여기 있을 께요...어서 다녀와요. 요 며칠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어질거리는 것 같아요. 그냥 쉬고 싶어요.“
?
알았어요. 금방 다녀올게요.“
잠시
후에 돌아오는
파울의 가슴에는 한 아름 물건이 든 쇼핑백이 들려있다.
?
우리 공주님들에게 줄 선물을 수도원 숍에서 좀 장만했어요.“
?
아니, 뭐 이렇게 많이요?..“
? 은지와 소연이뿐만이 아니라 당신이 흥미로워 할 음악카세트도 들어있어요. 호텔에 가서 열어보아요. 여행다니면서 워크맨으로 듣기 좋을 거에요.“
?정말
파울은 못 말려요..알았어요.“
그가 짐을 트렁크에 싣고는 하늘을 쳐다 본다.여자도 하늘을 보니 구름 한점없이 아주 맑다.
파울이
차문을 열어주며,
? 제이드. 지금 부터 모두 나에게 맡기고 드라이브해요..아까는 미안했어요. 다시는 제이드에게 부담 안 줄게요.“
?......“
아무 대답 없이 여자는 차에 올라탄다. 운전석에 앉은 파울이 그녀가 안전벨트 아직 안 맨 것을 발견하고
?
안전벨트를 매야지요.. 자, 어서“
벨트를 채우는 것이 습관이 안 된 여자는 천천히 벨트를 찾는다. 그가 재빨리 여자 오른쪽 창가 쪽 위에 있는 끈을 찾아 사선으로 찬찬히 피워 왼쪽에 채워준다. 그러는 동안 여자는 너무 가까히 풍겨오는 파울의 체취에 어지러워 눈을 감는다.
파울도 안전벨트를 맨다. 그러나 시동만 걸고 달리지는 않는다. 파울이 라디오를 튼다. FM 방송에서는 오후의 클래식음악을 내보내고 있다. 차 안의 두 사람은 음악을 감상하듯이 그대로 앉아있다.
?
제이드, 당신은 아직도 어떤 한 사람을 그리워하며 사랑하고 있지요? “
여자가
놀라며 눈을 뜬다.?
?
아니, 왜 그런 생각을 해요?“
? 당신에게서는 한 남자의 아내라는 안정성보다 모든 것에 호기심을 둔 감성이 돋보여요. 그것이 당신이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싱싱한 모습이며 먼곳에 대한 동경을 뿜어 나타내고 있어요 ..“
여자는 파울의 얘기를 곰곰히 생각해 본다. 내가 스스로 아내라는 위치에 안주해 보려고 했던 적이 있었던가? 그래 ... 맞아, 내가 바라보고 그리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과거.. 그 때 그 설레이던 순간들? 그러나 지나간 일들인데...미래?.. 묘연한 앞날에 대한 기대감...
?제이드가 아무 말도 안하고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외로워 지네요. 당신에게 한 발자국도 더 이상 가까히 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 같군요.“
?..........“
이
사람은
어찌 이리 섬세한 감성을 가질 수 있는가.
?파울,내가 스스로 나를 확실히 몰라서 아무 말을 못 하는 거에요. 그런데, 당신에게 보여지는 내 모습이 또한 나의 일부분이겠지요...“
? 그럼 당신 자신도 모르겠다는 그 부분에 내가 들어가도 되겠지요?“
?
네? ... 무슨 의미?“
? 그렇잖아요. 우리의 지금은 얼마 전만 해도 우리 모두 몰랐던 미래였었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알게 되었고 그리고 내일 모레.. 미래에는 어떻게 될런지는 아무도 또 모르고요..“
이
사람의 유추력은 뛰어나네..
? 파울 그러나 이미 계획된 일들이 있어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다고 보아요. 또한 지난 과거의 추억과 경험으로 현재를 실감하고요...“
?..................“
?
파울, 이제 가요. 좀 피곤해요. 이런 주제로 얘기했던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도 안 나네요. “
?
그래요? 나는 아직 한 번도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없어요.“
차가 서서히 움직인다. 그는 앞만 바라보며 운전한다.
여자는
파울의 감정을 느끼는 순간에 먼 옛날의 박영빈이 떠오른 것을 뒤돌아 본다.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것이 13년전 가을이었지. 그해 가을에 나는 그리움이란 것을 배웠었지.
그리고는 그가 그의 동생에게 쓴 엽서 귀퉁이 글귀로 부터 모욕감으로 떨었었지.. 그러나 작년에서야 동생으로 부터 아버지가 그에게 한 모든것을 알았지..이유를 알고나서는 다소 위로가 되었던가?
한달전 이태원에서 그의 동생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했던 나.. 과연 무엇이 나에게 산재해 있는 것일까..과거는 그냥 과거인가.. 아니면 문득 문득 나타나 현재에서 미래로 연결되는 것인가..
그런데, 왜 지금은 여기서 서성이고 있는 것인가....
(계속)
Mozart Violin Concerto No 5 A major K 219 2nd mov. Kremer Harnoncourt Wiener Philarmoni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