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
2부:
한 여자 (9) 당신의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한 여자 (8) 비엔나 숲속에서의 떨림..(클릭)..전편
-44.-
로렌스옹과 대화하던 데까지 추억하다 정신이 번쩍든다.
그래, 벌써 20여 년 전의 일들인데..어찌 이리도 선명하단 말인가 . 그런데 오늘 여기는 왜 왔지? 내 안에 남아 있는 것들을 이제는 완전히 연소하기 위하여? 파울이 무엇을 나에게 주려고 했는지를 알고 싶어서? 그를 이제야 수용하려고 하다니...
여자는 한참동안 추억에 젖어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난다.
여자가 이 집을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그때, 파울이 여자에게 전해주라고 했던 듬직한 봉투를 이 집 관리인 마르크스로부터 받았었다. 여자는 펼쳐 보기가 두려워 피아노책상 ( 주:피아노 처럼 생긴 가구 뚜껑을 열어 앞으로 내리면 책상이 됨)제일 아래 서랍에 넣어두고는 서랍 열쇠구멍에 껴있던 열쇠로 잠가 두었었다. 그때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었기에... 파울의 진심을 대하는 것이 그토록 힘들었었기에...그리고는 그 열쇠를 탁자 위 파울의 잡동사니 함에 넣어 두었었다. 언제인가 파울이 모든 열쇠를 그 함에 넣어둔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던 것이다.
사물함을 연다, 수많은 크고 작은 열쇠들이 들어있다. 그러나 여자는 즉시로 알아본 책상열쇠를 가지고 책상 쪽으로 간다. 제일 아래 서랍에 열쇠를 꽂는데, 가슴이 떨린다. 그때처럼 ... 파울이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모아 잡았을 때처럼.
오른쪽으로 열쇠를 돌린다.찰칵! 카메라 샤터가 내리는 듯한 미세한 소리다. 서랍을 앞으로 당긴다. 안에는 그녀가 넣었던 봉투가 그대로 봉한 채 들어있다. 파울을 만난 듯 가슴이 뛴다. 두 손으로 봉투를 잡아 가슴에 댄다. 다시 소파 쪽으로 돌아와 가만히 앉아 봉투를 쓰다듬는다.
이 봉투를 열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세월이 지났는가? 그 세월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이제는 모든 것에 대처할 내가 과연 되었는가?
여자는 가만히 봉투를 연다
두꺼운 가죽표지 노트북과 같은 크기로 접혀 엷은 종이에 쌓여진 것이 있다. 차분히 종이를 펼친다. 그 안에는 여자와 파울이 같이 웃는 사진 몇장이 들어있다. 아! 연주회 포스터 사진!...여자는 사진 속 남녀를 보며 가슴이 저며온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그러나 사진 속 그들은 영원히 웃을 것이다.
사진을 옆으로 비켜 놓고 두꺼운 노트북을 펼친다.
" 나의 제이드에게,
당신을 내안에 쌓아 놓은 흔적입니다."
첫 장 가운데 적힌 그의 만년필체 글을 보며 눈물이 고인다. 다음장으로 넘기는 것이 벅차다.
시구를 적은 것이 보인다. 가만히 살펴보니 생상의 '삼손과 데릴러'의 아리아 라는 글이 눈에 띈다.
Charles-Camille Saint-Saens
"당신의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동트는 새벽에 입 맞추며 꽃이 피어나듯이
허나 내 사랑하는 이여 이 눈물을 말리기 위해
그대 목소리를 좀 더 들려다오!
영원히 데릴라 곁에 돌아온다고 말해 다오.
지난날의 언약을 내가 좋아한 그 언약을
다시 한번 되풀이 해 다오!
아, 내게 응답하라 나를 황홀감 속에 잠기게 해 다오!
보리 이삭이 산들바람에 출렁이듯이
체념하려던 내 마음은 이제 그리운
그대 목소리에 떨며 몸부림친다.
죽음을 실어 나르는 화살보다도 빠르게
사랑하는 사람이 그대 팔 안으로 날아간다.
아, 내 사랑에 응답하여
나를 황홀감 속에 잠기게 해 다오.
내 사랑에 응답해 다오. "
??
그 아래에는 그의 산문체 글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무런 날짜 언급 없이 ..
..........
제이드가 여행을 떠난 지 어느덧 사흘이 되었다. 그녀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내 생애에 이리도 지루한 나날이 있었던가.. 그녀를 어디서도 볼 수가 없으며 전화할 수도 없다는 것이..
그녀가 비인에 없다는 것이 나를 서성이게 한다. 아무 곳에서도 안정이 안 된다. 그녀를 처음으로 현수학생 교습 시간에 만났던 날부터 나의 삶에 변화가 왔다. 그녀의 반주아래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던 순간부터였으리라...언제나 그녀의 반주로 노래하고 싶은 열망이 생겼다. 독창회 반주를 부탁하려고 현수학생으로부터 그녀의 전화번호를 건너 받은 날부터 그녀에게 전화 걸고 싶은 것을 참느라 힘들었다. 그러나 비인 같은 하늘 아래에 살고 있으니 우연히라도 만날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설레게 하는 것이라니...
우연히? 아니 숙명적으로 학교연습실에서 다시 만나던 날, 연습실 밖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그녀가 치는 피아노 소리에 그녀와의 환상을 시작한 것이다.우리가 칼렌베르그로 올라가오면서 지내며 그녀는 어찌 그리도 흡수하듯이 나의 얘기를 듣을 수 있는 것일까? 경청하는 그녀의 모습은 나의 영혼을 붙잡는 것이었다.
그녀를 생각하며 매일마다 생이 충만했다. 그녀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면, 나의 목젖이 탄탄히 긴장하며 윤기있는 소리가 저절로 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내 생에 이미 깊숙히 들어와 버린 것이다. 나로 하여금 빛나는 즐거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내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눈을 감게 하는 것이었다.
눈을 감으면 제이드 모습이 가까히 떠오른다. 웃는 듯 말듯 눈가에 떠오르는 미소, 환하게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어깨까지 흔들며 발랄하고 천진하게 웃는 자태..그러나 우리 둘만이 있던 시간 중,우리 영혼이 억만 분의 일 초 일치되었던 일 순간마다 파르르 떨던 모습.. 내 손이 닿으면 바로 날아 갈 듯하여 조심조심 달 듯 말 듯 그녀 곁에서 지내던 그 순간들..
승마연습장에서 촬영을 하다가 그녀가 돌연히 쓰러졌을 때 너무나 놀라 정신이 멍해졌었다. 임신으로 인한 빈혈로 쓰러졌다는 의사진단을 듣고.. 소름이 쫙 돋아나던 어처구니 없는 내가 한심했다. 그녀가 한 아이의 엄마라는 것은 정 듬뿍 받아 들이며 그녀의 아이와 기쁘게 지내면서도 한 남자의 아내라는 것은 까마득이 생각을 못 하고 있어서 이리라. 아니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제이드가 깨어난 후 그것이 의사의 오진이었다는 것에 얼마나 기뻤던가.
왜?
그녀는 처음 볼 때부터 완전 자유롭게 보였다. 오로지 딸애와만 연결을 이루고 어느 사람과도 연결이 안 된 정신과 육체의 홀로섬이 도두러지게 보였었다. 오랜 고독의 기운이 그녀를 감싸고 있음을 사진촬영 내내 느꼈었다. 그런데, 왜 그녀는 고독하게 보이는 것일까? 누군가를 그리움으로 아직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오! 제이드! 당신을 생각하면 나의 심장이 터질 것 같습니다. 당신이 기운을 못 차리고 옆 방에서 잔다는 것을 느끼며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었던 그밤의 생생함이 아직도 여전합니다. 그날 핼쑥하여 침대에 누운 당신을 보며 나는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나의 독창회 때문에 당신이 촬영에 임하며 우리 모두에게 시종 웃음을 선사하던 것.. 그러나 내면으로는 그리도 무리했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나를 믿으며 따라준 당신 또한 나를 좋아하는 이상의 것이다는 뜻으로 받아 들이고 싶습니다.
제이드!
지금 나는 삼손과 데릴라에서 나오는 아리아 '당신의 음성이 내마음 열리고.' 를 듣고 있습니다.
당신의
반주에 마추어 이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되면 당신은 내 목소리를 듣고 당신 맘을 다 열어 나를 받아 줄 것입니다.
제이드! 어서 연락해 주어요.
당신의 목소리를 하루속히 들어야 살 것 같습니다.
..............
그 페이지의 글은 여기에서 마쳤다.
여자는 다음 장으로 넘기지 않고 그대로 노트북을 덮어 놓고 자리를 일어나 중간 유리문을 열고 유리방으로 들어간다. 유리창 너머 어둠이 내린 아래 마당은 촛수가 낮은 등 아래 고즈넉하다.
-45.-
그랬었구나...
그러니까 내가 여행 떠난 후부터 글이 시작된 것...그때 나는 잘츠부르그에서 지내며 그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여행하며 매일마다 만나는 새로움에 정신이 휘청거리는 시기였었지.. 당시는 내가 읽을 수 없었을 독일어로 쓴 글이다. 첨부터 그는 자신을 위해서 적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후에 나에게 전달되었을 때는 이미 내가 어느 정도 독일어를 읽게 된 때였으나, 읽지를 않고 또 한 세월이 지나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오! 파울!
우리는 이렇게 평행선 위에서 서로 쳐다보는 운명을 갖었었군요. 당신이 첨에 이리도 저의 맘이 열리기를 열망하였음에 미안함이 그지 없어요. 저는 그때 당신을 담을 자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어요.
여자는 전등을 키지 않은 유리방 창가에 서서 바깥의 빛을 바라보며 그날 여자가 정신을 잠시 잃었던 때를 기억해 본다.
그래! 그러니까 로렌스옹이 곧 떠날 여행계획을 물었었지. 그러면서 그리스를 떠올리고 마음이 흔들렸었어. 그리고는 몇 가지 얘기를 나누는데 나의 생각은 그곳을 떠나고 있었지.
갑자기 로렌스옹이,
"제이드! 무슨 생각을 그리 해요? "
" 아! 네? 죄송해요.잠시 떠오르는 생각에 .."
" 그럴 수도 있지요. 뭐.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서요.
여행 가기 전에 며칠간 여기에서 좀 쉬면 좋을 듯해요.어린 은지에게도 좋은 추억이 될 거에요. 아까보니 승마에 재질이 보이더군요. 경험이 많은 호텔주인이 놀랍디다."
" 예? 그 애가 아직 승마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데요..."
" 글쎄. 누가 잡아 주어도 아이들은 무서워 하는 편인데, 은지는 잡은 사람보고 빨리 가라고 성화를 하며 즐기더랍니다. 허허허!"
로렌스옹이 유쾌히 웃는 소리가 그들이 있는 홀을 울린다. 리셉숀에 있던 주인이 그들에게 다가온다.
" 아주 즐거운 일이 있나 봅니다 .. 콘테 로렌스!"
" 허허허! 자네가 전해준 은지 승마얘기를 하다 보니 허허허!"
" 아.. 제이드씨께 말씀을 하셨군요.."
주인의 얼굴을 쳐다보던 로렌스옹이 흥미롭다는 듯이 말을 한다.
"마틴! 제이드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 같네.. 어서 말해보지"
" 로렌스옹님은 어찌 제 맘을 그리 잘 읽으시나요 ..."
" 아니, 자네와 내가 알아온 게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허허허!"
" 그렇지요, 저의 아버님 생존하여 영업하시던 제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참으로 오래되었네요. 이렇게 뵈오니 더욱 옛날이 떠오릅니다. 좀 자주 들려 주세요."
" 내.. 이제 나이가 들다보니 여행이 점점 부담스럽구만 ..그건 그렇구, 어서 얘기를 시작하지."
" 예, 그러지요. 제이드씨 제가 부탁 좀 드릴까요..."
" 제게요?"
" 예, 제가 오늘 따님이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찬찬히 보았습니다. 참으로 영리하군요, 그리고 제이드씨와 따님의 관계가 참으로 긴밀해 보입니다 그래서 모녀분을 모시고 우리 호텔 홍보 사진에 올리고 싶은데요. 두 분이 승마하는 모습을 꼭 담고 싶숩니다."
"하지만 저는 승마를 못 하는데요. .."
" 잠깐 포즈를 잡기만 해도 됩니다. 따님이 아까 말을 겁내지 않고 타는 것 보았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우리 호텔홍보책자에 제이드 모녀를 꼭 담고 싶습니다."
아니, 웬 사진 복이 어제 오늘 이리도 많누 허참!
여자가 난처해 하는 모습을 보이자 로렌스옹이 거든다.
" 제이드, 그냥 가볍게 해보지요.이렇게 마틴이 부탁하는 것을 보니 흥미가 있군요, 제이드 모녀에게도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 같고 허허허!"
이분이 왜 이리 유쾌해 하시지.. 권하는 데로 한 번 해볼까? ㅎㅎ
" 예, 그럼 해보지요.. 그런데 승마 복장이 없는데요."
" 아.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마틴이 승마복과 장비를 준비하러 자리를 뜬다.
대화를 조용히 듣던 로렌스 옹이 말을 시작한다.
? 파울! 저기 우리방에 가보거라, 너의 어머니가 사용하던 승마복이 아직 있을 거다. 제이드 크기가 비슷하니 맞을 것 같구나..“
? 아! 그렇군요. 그럼 제가 방에 가서 보고 올게요.“
파울이 자리를 뜨자 로렌스 옹이 설명을 한다.
? 내 아내가 여기를 좋아해서 우리가 장기적으로 방 몇 개를 전용으로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녀가 떠난후에도 여전히.. 아내가 죽은 다음 나는 비엔나에 머울지 않고 이태리 가까운 국경지역 오스트리아 캐른주에 살지만 비엔나에 올 일이 생기면 여기를 꼭 찾고 있어요.“
그가 말하는데 호텔주인이 돌아온다.
? 어린이 승마복은 있는데, 제이드님에게 맞을 만한 어른 것은 없습니다. 어떻하죠?“
? 잠간만 기다려 봅시다. 내 아내가 쓰던 승마복을 찾으러 파울이 방으로 갔으니까요.“
? 아. 맞어요. 사모님 것이 있었네요..“
파울이 돌아온다.
? 제이드, 승마복이 있어요. 마틴씨 제이드 도와줄 여종업원을 불러주시겠어요? 같이 올라가서 한 번 입어 보지요.“
여자는 호텔주인이 데려온 비올렛이라는 인형같은 아가씨가 안내하는 2층 방으로 딸과 같이 올라간다. 방문을 여니 오후의 옅은 햇살이 레이스 커텐사이로 들어 온다. 모든 가구가 앤틱으로 되어있다. 옷장문이 열려 있고 옷걸이에 승마복이 이미 걸려 있다.
같이 따라온 비올렛이 놀라는 눈을 하며,
? 와! 제가 이곳에서 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이 방은 처음 구경해요. 오늘에야 로렌스옹의 전용실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로렌스옹의 재력은 익히 상상하고 있지만 이렇게까지 이곳에다 이런 휴양처를 두고 계신 것은 몰랐었어요... 어머머! 승마복도 대단하네요.. 자, 제이드씨! 우선 지금 입은 옷을 벗으세요. 여기 모든 일체가 있네요.. 완전히 사극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것들이에요.“
한 벽에는 옛적 말타는 모습의 액자도 보인다.
흠.. 정말 사극영화? ㅎㅎ
모녀를 비올렛이 정성으로 단장해 준다. 아랫 층으로 내려오니 어느 틈에 비디오기사 클레멘스와 베로니카가 싱긋거리며 웃고 있다.
어머! 그 사이에 사진사와 분장사도 불렀네그려. 허 참!
? 퍼펙트! 세상에 이렇게 어울리다니요? 그렇잖아도 제가 은지주제로 영상을 찍고 싶었었답니다. 우리가 비엔나로 돌아가던 중에 카폰으로 연락을 받자마자 베로니카와 부리나케 달려왔지요.“
로렌스옹과 파울은 제이드의 승마복 차림에 놀라운 눈으로 그저 바라만 본다.
베로니카가 가까히 닥아온다.
" 제이드! 그새 완전히 몇백 년 전 여인으로 탈바꿈을 했군요 ㅎㅎ"
" 우습지요? 동양여자가?"
" 아니요, 호텔주인이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잖아요?
자, 잠깐 승마모자만 벗어 보아요. 머리를 뒤로 모아 볼게요."
베로니카가 시키는 데로 맡긴다.
참, 이 여자는 사람을 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어.
베로니카가 모녀단장을 마치는 데는 불과 몇 분이 걸렸다. 은지는 살짝 화장하는 동안 즐거움이 얼굴 가득하다. 모든 것 준비가 마치자 호텔주인이 승마장으로 데리고 간다.
은지는 눈을 말똥거리다가,
? 엄마, 우리 용인 민속촌에서 말탔던 거랑 똑같이 타면 되는 거지?“
? 그래, 맞아.. 우리 은지 이제보니 그때 탔었구나.. 와우! 은지 그 생각을 하네, 안심해 , 알았지? 그때는 아저씨가 끌었는데, 이번에는 엄마가 대신 끌어줄거야.“
? 알았어. 엄마. 나는 지금 신나. 히히“
그래, 다행이구나. 신나다니..
호텔주인이 딸애를 어린 말 안장 위에 앉혀준다. 그리고 말줄을 여자에게 건너 주기 전에,
? 그냥 살살 걸어요. 이 말은 얌전하여 초보자용이에요. 혹시 말이 앞서려고 하면 그냥 잠간 서서 있고요. 자, 그럼 줄 받아요.“
줄을 건너주고 나간다.
여자는 딸애를 쳐다 보며 웃는다.
? 은지야 , 자! 그럼, 거기 꼭 붙잡어.. 엄마가 앞선다.“
? 네“
비디오촬영에 소리가 녹음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한다. 여자는 잡고 있는 줄을 꼭 붙잡고 앞으로 간다. 그러다가 울타리 밖 저 멀리 보이는 파울과 눈이 마주친다. 그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번쩍 들어 올린다.
아, 어쩌나..
그가 아까 숲에서 자연의 소리를 들으라고 눈을 가려주던 때처럼 다시 떨려온다. 더 이상 몸이 안 나간다.
말은 그럴수록 점점 앞으로 가려고 한다. 그녀가 멈춘다.
?
제발, 말아 너도 멈추어라 . 끈을 놓치면 안 되는데..
여자가 푹 쓰러진다.
-46.-
아니!..무슨일이지? 모두들 놀래서 어찌할 줄을 모른다. 파울과 호텔주인이 울타리 안으로 달려 들어간다. 호텔주인이 말줄을 재빨리 잡는다.파울은 은지를 말 위에서 내리고 뒤늦게 따라 들어온 클레멘스가 바닥에 쓰러진 여자를 붙잡는다.
? 제이드, 정신 차려요!“
그녀는 아무 대답도 없이 실신상태다.
? 어서 응급의사를 불러요. 제이드가 기절했어요.“
파울이 은지를 비올렛에게 건네주고 여자를 업어 2층 방으로 옮겨간다.
호텔주인으로부터 전화로 연락받은 마을의 의사가 도착한다. 비올렛만 남기고 모두 나가라고 한다. 놀란 은지를 파을이 안고 나간다. 비올렛이 여자의 옷을 벗기고 목욕가운으로 편하게 갈아입힌다. 의사가 여자의 맥을 집어보고 눈과 혀등을 모두 검진한다.
? 흠.. 오늘 이분이 피곤하셨나 보네요.“
? 예. 아침부터 이제까지 사진 촬영을 했다고 합니다. “
? 잘 아시는 분인가요?“
? 아니요, 오늘 제가 승마복 같아입는 것을 도와 드렸는데요.“
?음, 그럼 어느 분이 이분과 제일 가까운 분이신가요. 불러 오시겠어요?“
? 예, 잠간만 기다리세요“
비올렛이 아래층으로부터 파울을 데려 온다.
? 제가 이분하고만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잠간 우리만 두게 해 주시겠어요.“
? 예, 알겠어요“
비올렛이 나간다.
의사가 파울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한후,
? 단도 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분은 지금 임신 중인 것 같습니다. 임신초기에 오는 빈혈증상에다 오늘 과로가 겹친 것 같습니다. 오늘은 움직이지 않고 안정을 취해야겠습니다. 제가 지금 이분에게 링겔주사를 놓아 피로회복을 시킬테니 오늘 행사진행은 여기서 멈추셔야겠습니다.“
파울은 충격받은 눈으로 잠시 아무 말도 못한다.
? 확실합니까? 임신이?“
?우선 이분이 정신차린 후에 상담을 해 봐야 더 확실할 듯하군요.“
? 예, 그럼 제가 나가서 진행자들에게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께서 뭐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가요.“
? 아, 괜찮습니다. 링겔주사 맞는데 한 시간 반정도 걸릴겁니다. 그 사이 깨어나면 환자랑 상담을 하겠습니다.“
? 그럼, 저는 아래로 내려 가겠습니다.“
파울은 아래층에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간단하게 제이드가 빈혈이 심해 쓰러졌으니 오늘은 이제 일을 마치자고 전한다. 모두들 그럼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며 돌아간다. 파울은 비올렛에게 좀 남아서 은지를 돌 봐달라고 부탁한다. 그녀는 기꺼히 응락한다.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던 로렌스옹이 파울에게 한갓진 곳으로 가자고 한다. 아까 인터뷰한 곳으로 가서 앉자마자 묻는다,
? 무슨 일이냐? 무슨 빈혈이 그리 심하냐? 의사가 다른 소리는 안 하더냐?“
? 아버님, 조금 있으면 깨어난다고 하는데요,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지내야 될 것 같아요. 비엔나 집에 가도 돌 봐줄 사람이 없습니다. 아버님께서는 비엔나 집으로 가셔서 편히 쉬시지요.“
? 아니, 이사람아!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어찌 무심하게 가겠느냐. 일단 정신 차리는 것 보고 의논하자꾸나. 저기 어린 은지가 많이 놀랐으니 안 됐구나. 우리라도 같이 있어 주어야겠는데, 말이 안 통하니 어쩌누..“
? 아버님, 제이드가 일어나면 한국 사람으로 애 돌 봐줄 사람을 알아보겠어요.“
? 참, 그것도 좋은 생각이구나“
한 편 2층에 누워있는 여자가 눈을 뜬다. 곁에 앉아 있는 의사가 조용히 말한다.
? 제이드씨, 여기가 어디인 줄 아시나요?“
아니, 이게 어쩐일이지.. 왜 내가 누워있지? 어머 옷도 벗고 목욕가운 차림이고,,
? 당신이 승마연습장에서 쓰러졌어요. 평소에도 빈혈이 심합니까?“
? 아, 네... 좀 가끔 어지럽기는 했어요. 그런데, 제 딸이 어디 있어요?“
? 아래에 로렌스교수가 잘 보고 있습니다.제가 몇 가지 물어보겠습니다. 생리를 언제 마지막으로 하셨는가요?“
? 예? 제가 좀 생리가 불규칙한 편이에요. 잠간만이요..제가 비엔나 와서 아직 한 번도 안 했으니... 한 6주 전에 한 것 같은데요..“
?흠... 그럼 지금 임신초기 같습니다.“
? 아니에요. 그럴리 가 없어요. ?
?왜, 그렇게 확신합니까?“
?제 몸에 스피랄 피임기구를 한 상태이거던요"
" 그러나 그 기구도 가끔 실수할 때가 있죠.."
" 그리고 또 제가 부부생활을 안 했거던요."
? 예? 별거 중이십니까?“
? 제가 여기 온 지 한 달이 되었고요.. 오기 전에는 남편이 일본출장을 갔었기에..“
? 흠.. 알겠습니다. 허나 당신의 맥박은 임신부와 같아서요. 일단 안정하셔야 됩니다. 너무 저혈압이네요. 오늘은 여기서 쉬셔야겠어요.“
? 선생님, 저 애가 보고 싶어요. 링겔주사가 언제쯤 마칠까요.“
? 지금 내려가서 올려보낼게요. 잠간만 기다리세요“
의사가 나가자 여자는 얼굴이 확 달아 오르는 것이다. 내가 쓰러진 동안 의사가 누구에게 혹시라도 임신얘기를 한 것은 아닐까?
아래층에 내려온 의사는 로렌스 교수를 따로 불러 바깥으로 나간다.
? 로렌스교수님, 임신은 아닙니다. 본인이 생리일과 더불어 확실히 아니라고 합니다. 제가 잡은 맥박수로는 영락없는 임신같았는데요..빈혈과 저혈압이니 며칠간 잘 보양해야 할 것입니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쉬도록 하시지요. 며칠 여기서 쉰다면 제가 왕진와서 보아드리겠습니다. 환자하고 의논해 보시지요. 저는 일단 돌아 가겠습니다. 링겔주사는 거의 마감에 주사기를 빼시고 반창고를 붙히시면 됩니다.“
의사가 돌아가자 파울은 호텔 안으로 들어가서 로렌스옹에게 제이드가 깨어났으니 딸애를 우선 보여주고 거쳐를 알아보겠으니 잠시만 더 기다리라고 당부한다.
은지는 파울을 따라 2층 방으로 올라가 엄마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린다.
? 은지야. 울지마, 엄마 많이 아픈 것 아니야. 머리가 좀 어지러운 것이야. 이제 링게를 다 맞으면 일어날 거야. 그런데, 저녁이 되었는데, 배는 안고프니?"
? 할아버지하고 먹었어. 엄마 그럼 우리 언제 집에 가?“
?엄마가 교수님하고 의논할게, 조금만 기다려“
애를 달래는 것이 마치는 듯하자 파울이 여자에게 묻는다.
? 제이드, 이제 보니 겉만 멀쩡하고 속은 비어진 사람이군요..어찌 이리 되도록 몸을 방치했어요. 건강을 지켜야지요. 오늘은 늦어서 어짜피 집에 못 갈 거에요. 집에 가도 아무도 없잖아요.그런데, 여기서 며칠 지내면서 몸을 추스리면 어때요? 그래 혹시 은지 돌봐줄 한국 사람 없어요? 현수 학생말고 다른사람으로..“
? 한 학생이 있긴 있어요. 원래 내일이나 모레부터 같이 잘츠부르그 여행가려던 학생이거던요.“
? 아, 그럼 그 학생 전화번호 주어요. 제가 사정얘기를 하고 내일 부터라도 이곳으로 오게 할게요.“
? 제가 내일 그냥 비엔나로 갈게요. 파울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
? 제이드, 정말 이렇게 어린 애처럼 행동할 거에요? 당신을 어제 오늘 내리 피곤하게 하여 내가 얼마나 미안한 줄 알아요? 안 돼요, 여기서 푹 쉬어야 해요.“
그래, 쉬자. 은지도 나도...
"전화 번호 드릴게요. 그래도 제가 직접 전화해야 해요. 저와 은지가 입을 옷과 몇 가지 필요한 것을 그 학생오는 편에 가져오게 하려고요“
? 그것 좋은 생각이네요.. 자, 여기 전화있어요. 번호를 불러봐요. 제가 다이얼 돌릴게요.“
여자의 한 손이 주사맞고 있어 불편함을 배려하며 전화다이얼을 돌린 후 통화가 가자 여자 귀에 대어준다.
? 소연학생? 나, 은지엄마...“
여자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쾌히 승낙한다. 내일부터는 시간이 자유롭다고 한다. 여자와 여행가려고 했었기 때문인데, 잘츠부르그대신 비인숲이 되었네요..하며 명쾌하다. 로렌스 교수와 의논 후 내일 여기 오는 시간등을 알려주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는다.
? 소연학생이 쾌히 승낙해요. 그런데, 집 열쇠를 내가 가지고 있으니 파울이 전해 주어야 소연학생이 집에 들어가 준비해 올텐데요...“
? 아, 그러면 제가 집주인에게 연락하여 내일 아침일찍 소연학생을 만나 집에 들어가도록 조치를 할게요.
그런 후 내가 픽업하여 여기로 올게요. 그럼 되겠지요.“
너무나 미안하다. 대학에도
가야 할 사람이..
?
제이드, 당신 아무 생각말고 있어요. 오늘 밤은 그냥 은지랑 같이 있어요. 제가 아버님과 말씀나눈
뒤 다시 올게요,“
그가 나가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진다.딸애가 휴지로 닦아준다.
정신차려야지.. 이 어린것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주다니..
파울이 로렌스옹에게 온다.
? 아버님, 여기서 주무시겠어요? 아니면 비엔나 집에가셔서 편히 주무시지요. 제가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비엔나 가서 한국학생을 데려오려고해요.“
?
그럼 그렇게 해도 좋은데, 자네는
내일 대학 수업도 있을텐데 괜찮겠나?“
?
예, 지금 조교에게 연락하면 됩니다.“
?
그럼 나는 돌아가겠네. 파울은 내 방에서 지내도록 하고...“
배웅하러 호텔 주차장으로 나오니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차문을 열고 나오며
?
노이발덱 빌라로 모실까요? 교수님“
?
예, “
?
예, 그럼 잘
알겠습니다.“
?
참, 파울 잠깐! 나 좀...“
?
예, 아버님.“
? 여기 호텔은 우리 가족이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용하는 곳이다. 혹시라도 이상한 소문이 나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잘 하겠지만.
“?.....“
?
그럼 소식 전해주고.. 오늘밤
잘 쉬거라’
차가 호텔주차장을 떠나 경사진 출구로 올라가며 왼쪽으로 꺾여 도로를 달리는 것을 보며 천천히 호텔 안으로 들어선다.
참으로 기인 하루구나.
호텔 로비의 전화기로 제이드 집주인과 소연학생을 연결해주자 온몸의 기운이 빠지는 것 같다.
오늘 몇 번이나 그녀가 떨었던 것을 안다. 그것은 단순히 빈혈에 의한 것만은 아닌 것이다. 그녀도 자연의 소리를 바로 감지하듯이 나를 이미 감지하며 떨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가 전화기 앞에 오래 앉아있자 호텔 주인 마틴이 음료를 권한다. 따뜻한 차를 제이드에게 보내 달라고 부탁하고 2층으로 올라간다. 바로 제이드 방앞에서 잠시 서 있다가 그 옆방으로 간다. 로렌스옹의 전용방이다.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부터 두 방 가운데 문을 달아 서로 통하게 했던 스위트룸이다. 제이드가 누워있는 방은 어머니전용이다. 파울이 어릴 적에는 또 하나의 방을 연결하여 썼는데, 어머니의 죽음과 더불어 다시는 이곳에서 숙박을 안 했다. 아버지는 비엔나 오게되면 꼭 찾아오면서 어머니 전용방을 그대로 놔두고 있는 것이다.
옷을 편하게 갈아입은 후 옆방으로 간다. 방에서 직접 통하는 문도 있지만 복도를 통해 제이드 방문에 서서 노크를 한다.
?
예, 들어오세요“
?
어때요? 기분은?“
?
좋아졌어요.“
?
배는 안 고파요?“
?
그러고 보니 좀 고픈데요.. 은지는
먹었다고 하던데요.“
?
예, 아버님과 같이 먹었어요. 아!
주사를 빼야겠군요. 잠간만요.“
파울은 조심스럽게 주사를 빼고 의사가 놓고 간 반창고를 붙힌다.
?
정말 안 아프게 잘 하네요“
?
어머니 주사를 제가 종종 뽑았던 경험이 있어서요“
?어머님께서 오랫동안 편찮으셨어요?“
?
그 얘기는 나중에 할게요.. 뭘
먹고 싶어요? 따뜻한
스프를 보내달라고 할까요.“
?
그게 좋겠네요.. ?
방전화로 주문을한다.
?
좀 전에 차를 부탁했었는데, 스프와
같이 보내주세요.“
전화기를 놓자 여자를 쳐다본다.
그 사이에 핼쑥해졌네..도대체 이 여자의 남편은 어떤사람일까. 아.. 내가 왜 이런생각을 하지?
여자는 잠자는 딸애를 껴앉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도 그의 눈길을 느낀다.
왜 저사람이 저리도 침묵하지?
똑똑똑!
노크 소리가 나고 주문한 것들을 종업원이 가지고 들어와 창가의 탁자에 놓고 나간다.여자는 딸애를 살며시 침대에 누이고 일어나서 음식놓인 곳으로 간다. 그 곳에는 의자가 둘이 있다.
?
여기 앉을래요?“ 그녀가
묻는다.
?
아, 나는 내 방으로 갈께요.바로 옆방이에요. 필요하면
전화 주어요“
?
예, 오늘 저 때문에 걱정끼쳐서 미안해요“
?..........“
아니, 이사람이 왜 이러지...나한테 화가 났나?
?
제이드, 미안한 사람은 나에요. 다시는
그런 소리 말아요.“
그러더니 그녀에게 가까히 다가온다.
?
제이드, 나에게 당신 얼굴을 똑바로 보여줘 봐요..“
?............“
아, 다시 어지럽다. 이러면 안되는데..
파울이 그녀를 감싸듯이 포옥 껴안는다.
생상의 곡 삼손과 데릴라 중에서 마리아 칼라스가 부르는 곡입니다.
Maria Callas "Mon coeur s'ouvre a ta voix "
"My heart opens to your voice"..
"My heart at thy dear voice"
Samson et Dalila
Camille Saint-Sa?ns
Georges Pretre
1961
Para Mai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