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꽃 울타리가 있는 풍경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집 울타리엔 장미꽃이 만발합니다. 마치 누가 우리집을 향해 축제용 꽃폭탄이

라도 쏘아 댄 듯 몽울몽울 피어난 붉은 꽃들이 화려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렇게 울타리에 장미가

만발하면 슬레이트 지붕 위를 나는 비둘기 날갯짓 소리에도 생기가 돌고 초봄에 이미 털갈이를 끝낸

우리집 개 백장군도 괜시리 목소리를 높이곤 한답니다.

   어디 비둘기나 개뿐이겠습니까. 올해 갓 중학교에 입학한 딸아이를 비롯하여 이미 마흔 고개를 넘

어선 우리 부부까지 모두다 웬지 장미 울타리 옆에만 서면 상기된 얼굴이 되어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

곤 한답니다.

  아마 일 년 중 우리집이 이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적은 이맘때 말고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골목길

을 분주히 걸어가던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잠시 우리집 울타리 옆에 걸음을 멈추는 것만 보

아도 여실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장미꽃 덩굴 우거진 집.

  그런 집에 사는 행복한 우리 가족.

  비록 도시 변두리에, 그리고 슬레이트로 지붕을 인 남루한 집에 살더라도 일 년 중 내가 가장 행복

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이맘때가 아닌가 합니다.


때론 장미꽃 향기에 무슨 환각 성분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분

석이야  과학자들의 몫으로 두고 나는 그저 장미 향기에 흠뻑 취해서 약간의 정신 질환을 앓는다 해

도 후회할 것 같지 않은 기분입니다.

  그래서였을 것입니다.

그날 오후, 나는 붉은 레이스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궁궐의 뜰안을 거닐고 있는 동화 속의 공주가

된 착각에 잠시 빠져 있었습니다. 작은 난장이 일곱 명은 일터로 나갔고, 나는 이웃 나라 왕자가 타

고 온 백마를 우아한 손길로 어루 만져주고 있었답니다.

   "컹컹, 컹컹컹, 컹컹컹컹......"

  그놈의 백마가, 아니 우리집 개 백장군이 그때 마침 그렇게 미친 듯이 짖어 대지만 않았다면 나는

울타리 뒤에 숨어서 그윽한 눈길로 나를 훔쳐보던 그남자와 결코 눈을 맞추는 불상사를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알 수 없는 그남자와 단지 눈 한번 마주쳤을 뿐인데 그날부터 나는 동화 속의 백

설공주가 아닌 또 다른 환각에 시달리곤 하는 것입니다.

   학창 시절, 세 번째 미팅 때 만나서 잠시 사귀다가 헤어졌던 찬우.

  바로 그 찬우의 눈빛이 그때 하필 왜 내 기억의 표면으로 떠올랐는지, 그 이유는 나도 잘 알 수 없

습니다. 아마도 얼핏 보았던 그 사람의 짙은 눈썹이 찬우의 그것과 닮아 보인 때문인 듯 싶습니다.

겪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장미꽃 향내의 환각 작용은 정말 대단한 위력을 가졌습니다.

   나와 눈을 마추친 후 황황히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 가던 그 사람의 뒷 모습. 그 뒷 모습 위

에, 그놈의 장미 향기가 자꾸만 추억 속에 남아 있던 찬우의 눈빛을 겹쳐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심

지어 그남자가 바로 찬우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 정말로, 우연히 이 동네로 이사 온 찬우가 우리집 앞을 지나다가 울타리 안에 있는 나를 보곤

잊었던 옛날을 그리워하며 그처럼 그윽한 눈길로 나를 훔쳐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내 환각

증세가 아무래도 중증에 이른 것 같다고요?

   싹뚝싹뚝 싹뚝싹뚝.......

  그런데 오늘은 장미 울타리에서 가위질 소리가 요란합니다.

  "시든 꽃들을 잘라버려야 다시 피는 꽃들이 탐스럽게 피는 거야."

  남편의 설명에 나는 그만 현기증을 느낍니다.

   싹뚝싹뚝....... 아무 것도 모른 채 가위를 들고 장미 울타리를 누비는 남편의 손길은 가혹합니다.

남편 몰래 감춰 두었던 내 마음 속의 비밀들이 하나씩 하나씩 잘려나가는 섬뜩함에 나는 다리가 다

후들후들 떨립니다.

   '그래도 아직은 새로 피어날 장미 봉오리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속으로 중얼중얼 마음을 달래 봅니다. 저 장미꽃들이 모두 지기 전에 찬우의 눈빛을 닮은 그 남자

가, 아니, 정말 찬우였을지도 모를 그남자가 다시 이 울타리를 찾아와 주었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를

나는 차마 버리지 못합니다.


  "어이, 나 물 한 컵만 갖다 줘. 그리구 수건두......"

  남편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주방의 창문을 넘어 날아듭니다. 나는 곧 냉장고 문을 열고 물통을 꺼내

유리컵에 찬물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컹컹 컹컹컹 컹컹컹컹......"

  무엇 때문인지 우리 개 백장군이 또 길길이 뛰며 짖어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창문을 내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장미 울타리를 사이에 둔 두 남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울타리 안 쪽에는 전정 가위를 든 내 남편이 서 있었고 울타리 밖에는 장미 덩굴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눈썹만큼은 확실히 짙은 한 남자가 우뚝 서 있었습니다.


  그들의 대화가 아무런 장애도 받지 않고 장미 향기에 실려 내 귓속으로 파고 들었습니다.

   " 지나가다 봤는데 저 녀석 참 맘에 드네요, 수놈 틀림읎죠? 진돗개 잡종이구요? 실은 저어......
   우리 집에......"

   "아하, 암놈이 있으신 게로군요. 그럼 뭐, 잠시...... 근데 나중에 새끼 한 마리 주실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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