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
전편 한 여자 (20) 무언가/ Lieder ohne Worte / Songs without words(클릭)
한 여자 (21)
-72.-
여자의 시선을 느낀 클라우스가 여자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더니 심각했던 표정을 피고 여자의 손을 다정스레 잡으며 입을 연다.
"제이드, 지금 피아노 치는 자네의 모습을 보니 그동안에도 꾸준히 혼자서 쳐 왔었다는 것이 나타나는군.. 그러는 동안 자네가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생각하니 맘이 아프네.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해야 할지 지금 한동안 생각에 머무렀었네.."
"선생님, 외롭지만은 안 했어요. 이 곡을 칠 때마다 선생님과 잘츠부르그 산장호텔에서 연탄으로 치던 때가 떠오르며 또한 아름다웠던 지난 여러 날들이 저를 채워주며 위로 되었어요. 그래서 이 곡을 친 것이고요 더우기나 선생님과 지금도 같이 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기뻐요.“
"그래서 내가 더욱 맘이 아프네. 그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자네의 음악을 한눈에 알아보았었지.
그러나 내가 그 시절 갑짜기 다가온 나의 위치격변에 적응하는데 정신 차리기가 어려웠기에 파울과 자네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 했네. 이제 도리켜 생각하니 회한이 밀려오네. 이해하겠나? 제이드!“
물론 이지요.. 선생님의 당시에 힘드셨던 고뇌도요...
여자는 깊은 이해심으로 클라우스를 바라보며 대답한다.
"예, 그때 선생님은 바람처럼 다니셨지요."
"아? 바람처럼? 허허허 표현이 딱 맞네그려. 그 시절은 내가 너무 여기저기 다니면서 바쁘기가... 허허허!
내가 왜 이리 말이 많은고.. 제이드, 자네를 만나니 한꺼번에 쏟아 나오는구만."
"선생님, 천천히 말씀하세요. 어차피 오랜 기간의 공백이 쉼표로 남겨질 거잖아요..."
"제이드, 자네가 이리도 문학적인 면이 있었는가? 표현력이 시적이라니..."
"선생님, 제가 오스트리아에 사는지가 20여 년째에요. 아이가 태어나서 자랐다 해도 이제는 성인이잖아요. 그런데 저의 독일어는 아직도 만년 미성숙아에 머무는 것 같아 부끄러울 때가 많아요..."
"아니야, 충분해 자네의 진심을 알아 듣게 할 뿐만 아니라 여운을 남기는 표현이...그러니까 자네와 파울이 파트너가 되어 무대에 섰을 때 얼마나 어울리는지 참으로 부러웠어. 아마 그때 모두들 그렇게 느꼈을 거야. 그런데, 돌연히 자네가 그와 음악활동을 절연하고 자신의 길을 간다고 다른 음악가들과 앙상블 연주회를 했을 때 놀라웠지..여기저기 매스컴에서 다루는 기사는 어땠었고..파울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나 대로의 일때문에 그저 방관 할 수 밖에. 그러던 어느 날 파울의 소식을 듣고 너무나 망연하였었지.. 그에게 그리도 고통스런 나날이었다는 것을 모르고 지냈다는 자책감이 들어 로렌스옹을 찾았지. 아들의 상황에 처절한 로렌스옹을 만나면서 제이드에 대하여 물어 볼 겨를이 없었네.
그런데, 오늘 자네의 연주를 듣고 보니.. 내가 자네를 챙겼어야 하는데.. 라는 회한이 드는 거야.. 그 상황에서 한국으로 갔겠거니 생각하고 자네 일을 미루었던 것이 나의 실책이구만. 내가 이제 살면 얼마나 살겠나.. 며칠 있으면 생일이 돌아오니 더욱 더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데, 명롱했던 세월보다도 어두움에서 움치렸던 순간들이 더 부각 되면서 자네의 싱그러웠던 웃음이 그 속에서 빛나네 그려. 허허허!.“
그가 독백처럼 하던 말을 잠시 끊고 잡았던 손을 풀며 그녀를 가슴으로 안는다. 그의 행동에 의아하면서도 앙상한 겨울나무가 강인하게 서 있는 느낌과 더불어 아직도 섬세하고 부드러움을 가진 그에게 편하게 의지한다.
" 선생님, 저는 지금 선생님을 만나 너무 반가웁고 경이로와서 더 이상 다른 생각을 못 하겠어요. 그만 파울얘기를 하세요. 그 사람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멍멍해요. 더군다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할 수 없는 것이고요... 선생님 제발 그만이요" 여자는 결국 울어버린다. 클라우스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더욱 끌어 안는다. 들쑥이며 오열하던 여자의 어깨가 조용히 잦아들때 까지..어디선가 성당의 종소리가 평화롭게 울린다. 이른 저녁의 모색이 내리기 시작한다. ?제이드, 내가 오늘 자네를 이리도 보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만나고 싶어서만은 아니야. 자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여자는 조심스럽게 그를 쳐다 본다. ? 내가 지금의 제이드 나이 시절에, 그러니까 20년 전에 나는 가장 왕성하게 음악활동을 했었어. 그래서 말인데, 지금이라도 제이드가 음악활동을 하겠다면 도움이 되어주고
싶어.“ ?..........“ ? 선생님! 저는 오늘 이렇게 만날 준비를 못 하다가 만나서 정신이 없어요. 차차로 생각해 볼게요.“ ? 그래, 그러자구. 자 그럼 이제 바깥으로
나갈까?“ ? 예, 선생님을 이리 혼자서 독차지하니 정신이 빠지는 것 같아요 ㅎㅎ“ ? 허허허! 참으로 놀랍네, 제이드가 이리
독일어를 유창하게 하다니..세월이 이리도 지났단 말인가...“ ? 왜 그러셔요, 놀리시는가요?“ 클라우스가 열쇠를 극장관리인에게 돌려 준 다음 둘이는 테아트로를 빠져 나온다. 근처 골목길을 산책하다 골동책방에 머무른다. 여자가 옛 악보와 음반을 뒤적인다. 클라우스는 여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주시한다. 여자가 그의 시선을 의식하여 쳐다보다 싱긋 웃는다. '제이드!..." 이름만 부르고는 말을 끊는다. "예? 왜 그러세요?" "그리스 코르프 섬에서 벼룩시장을 헤메며 골동품을 찾던 제이드 모습이 떠올라서.. 참, 그런데 그때 그 한국대사관의 제이드의 옛친구는 잘 지내나?" "어머? 그 사람을 기억하세요?" "그럼 .. 어찌 잊을 수 있나. 그렇게
우리 일행을 위해 애써준 사람을...그리고 사실 제이드때문에 열 일제치고 아테네로부터 코르프섬을 찾아준 것이란것도
아네..내가 이리 느끼니 파울은 어땠었을지.." 이분은 참으로 세심하게 살펴 보았었구나. 나는 철부지처럼 모든 것을 노출하였었고. "오래전에 귀국하였어요." "흠... 그렇게 되었군.. 이래 우리가
오랫동안 헤어졌었다는 것이 점점 실감나는군..."
-73-
호텔로 돌아오니 리셉숀에서 기다리던 오르넬라가 다가온다.
" 파! 왜 이리 오랫동안 다니셔요. 약 드실 시간도 지났는데..."
" 어.. 그런가? "
" 어서 방에 가셔서 드시고 좀 쉬세요." 영문을 모르는 제이드는 주춤한다.
" 제이드! 나하고 얘기 좀 할까? 파는 올라가시고요"
" 오르넬라 ! 내 걱정을 하는 것은 좋은데, 제이드에게 책할 것은 못된다. 내가 좋아서 돌아다니는데 동행했을 뿐이니까"
"파는 내가 제이드에게 뭐랄까 봐 그러세요? ㅎㅎ 아니에요. 나도 오랫만에 만나 제이드와 얘기를 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동안 어찌 살아왔는지 얼마나 궁금한데요."
" 그렇다면 .. 내가 잠간 올라가 약만 먹고 내려오마. 아,참! 저녁은 몇시에 예약 했는고?"
" 7시로 해 두었는데, 좀 늦어도 괜찮을 거에요. 어서 올라 가서 제가 연락드릴 때까지 좀 누워 쉬세요. 네?"
" 알았다. 제이드 좀 있다 보자구.." 그가 마지못한 듯이 자리를 뜬다.
" 제이드, 이리 앉아 " 여자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상냥하게 말한다.
"......."
" 제이드 많이 놀랐지? 파파가 저리도 연약해 질 줄이야. 그래도 음악에 대한 열정은 예전보다 더 해. 그래서 식구들이 많이 걱정하는 중이야. 한 연주회를 마치면 기진해 지거든.. 젊은 사람들도 그러는데 병중이니 더욱이나."
" 그러시겠지... 맘이 너무 아파. 전에 모습이 생생하니 더 떠오르면서"
" 그렇겠지. 우리가 잘츠부르그에서 지내던 그 시절이 파파의 황금시절이었지. 얼마나 의욕이 왕성하였던지.. 몇 년 후 병나고부터 우리 가족이 요트를 타고 조용히 휴가를 보낼 때 마다 파파가 그 시절을 떠오르시며 제이드얘기를 항상 하셨지. 한국에서 잘 지내겠지... 그러시며"
" 미안해, 오르넬라! 내가 진즉에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데.. 파울을 생각하면 그 시절의 모두와 결연해야만 했던 내 처지를 이해해줘. "
" 그래도 제이드의 인생을 그렇게 과거에 묶어 두어야만 했을까?"
" 오르넬라 ... 과거만이 아니야. 지금도 파울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려."
" 그래. 누구나 자기만의 인생이 있고 그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가 없겠지...자, 우리가 이제 다시 만났으니 앞으로 천천히 더 얘기하자고 .. 너무 기뻐! 그리고 제이드가 전보다 훨씬 당당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놓이네. "
"그래? 그럼 나도 올라가서 저녁식사갈 준비를 하고 내려올게"
오르넬라와 헤어져 방으로 들어온 여자는 기진맥진하다. 지난 날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그녀를 허둥이게 하는 것이다. 돌아 갈 수 없는 그때를 이리 가깝게 느끼게 될 줄이야.
" 똑! 똑!" 노크소리가 들린다.
" 누구세요?" 여자가 물으며 방문 쪽으로 간다.
" 나. 잠간 볼까?'
어머! 로렌스 옹이 ?
여자가 문을 연다. 로렌스 옹이 쓰러지듯이 비칠거리며 들어 온다.
" 로렌스 옹 ! 어디 편찮으셔요? " 그를 부축해 의자에 앉힌다.
여자가 하는 것에 모두 맡기고 한참을 눈을 감고 있더니 말을 시작한다.
" 제이드. 내가 오후 내내 곰곰이 생각했네.이제부터 나에게서 자네를 자유롭게 해주겠네."
"........"
" 알아. 너무 세월이 오래 지났다는 것.. 그래도 이제라도 더 늦기 전에."
"......."
" 나는 자네를 아무에게도 내 놓고 싶지 않았어. 처음에는 파울을 은폐시키려고 자네를 무대에서 떠나게 했었지. 그런데 자네를 내 곁에 두고 볼 수록 그 어느에게도 나누고 싶지 않게 되더라고. 나의 이기심이었지.."
" 그만 하세요. 그런다고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다만 얼마 전부터 저 스스로가 미술관 일을 그만 두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그것이 로렌스옹으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과는 별개이지요. 그리고 특히 파울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은 더욱."
"....... 흠, 자네는 참으로 개성이 강한 사람이야. 어찌 그 부드럽던 제이드가 이리 되었노.."
" 로렌스옹! 저는 예전이나 똑 같아요. 다만 전에는 속으로만 생각하던 것을 이제는 다 표현하는 것이랄까요."
" 흠 .. 알았네. 저녁 식사때, 클라우스의 질책을 듣기 전에 내가 미리 자네와 얘기하고 싶었던 거야. 역시 나는 아직도 계획이 빠른 사람이라고 제이드가 생각할 것을 짐작하니 부끄럽구먼...흠..."
자조적으로 말하는 로렌스옹을 보며 여자는 할 말을 잃는다.
띠르르르.. 띠르르르 전화가 울린다.
수화기를 든다.
....나. 미하엘!
....아!. 미안해요 전화를 준다고 하고는 시간을 놓쳤어요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래 재미좋아? 옛사람들 만나니?
....놀라워 정신이 다 나갔어요.
....더 놀라게 해주려고 ... 아래 로비로 내려 오지. 하!하!하!
....뭐라구요? 그럼 여기에 온 거에요?
( 계속)
Rosamunde in B Flat Major, D.797, Entracte I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