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
4부 :
전편 한 여자 (22)
-77.-
여자가 그녀를 뒤로 부터 안았던 파울의 손을 풀어낸 다음, 뒤돌아 서서 똑 바로 그를 향한다.
" 파울! 이러면 더 이상 당신하고 아무 것도 같이 못해요."
" ...."
여자의 단호한 모습에 파울은 이미 짐작하였다는 듯이 묵묵하다.
" 은지와 소연이가 승마 마치면 저 이제 비엔나로 돌아가겠어요."
" 제이드! 안 되어요. 이제 의사가 오면 좀 더 약도 받고 오늘 하루 더 쉬어요. 그래야 건강하게 여행 다닐 수 있어요."
" 내가 그리도 걱정이 되어요? 나는 당신이 걱정되어요. 왜 이래요? 당신이 지금 십대 소년이에요?"
"......너무 그러지 말아요. 정말 내가 바로 그러니까요. 나는 아직 어느 누구에게도 당신에게 한 것처럼 안 해 보았어요. 당신이 처음이에요."
" ........"
아!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하나..
" 제이드. 내가 내 감정을 잘 조절할게요.제발 그냥 가지 말아요. 당신이 이대로 가버리면 내가 아무 것도 못 할 것이에요. 나에게 자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요."
" 어! 제이드씨와 파울씨가 같이 여기 계셨군요.안녕들 하세요?" 왕진 의사가 다가오며 유쾌하게 인사한다.
" 아, 예. 좋아졌어요. 어서 들어오세요."
" 듣기 좋은 소식이네요. 자, 그럼 제가 준비해 온 상비약 받으시고 영양제 한 번 더 맞으시도록 하지요. 로렌스 교수님도 같이 계시겠어요?"
" 아, 아닙니다. 저는 제방에 가서 있겠습니다."
" 예, 그러면 나중에 제가 연락 드릴게요."
파울이 자기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며 의사와 여자는 방문을 닫는다.
의사가 먼저 여자의 혈압을 재더니,
" 아. 어제보다 좋아졌습니다. 그래도 방심하시면 안 되니까 무리한 일은 삼가하세요."
의사가 가져온 여러 가지 약 봉투에 사용 용도를 적으며 설명을 친절히 한다.
"자, 그럼 링게르 주사를 놓고 저는 돌아가겠으니 어제처럼 로렌스교수께서 뽑도록 부탁하겠습니다"
" 아니에요. 제가 뽑을게요. 로렌스교수에게 신세지고 싶지 않아요."
" 전에 해보셨어요. 주사 빼는 것을?"
" 아니요. 그래도 해 보려고요"
" 흠... 그럼 제가 기다리다 뺄게요. 환자에게 스스로 빼게 할 수는 없어요."
" 선생님 그럼 오늘은 안 맞을게요. 저 이제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 흠...."
의사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 좋습니다. 그럼 오늘 식사를 든든히 하시고 절대 무리 안 하도록 하세요."
" 예, 감사합니다. 내일 비엔나로 돌아가고 모레부터 여행 떠나려고 합니다.
이번에 선생님배려에 감사드려요. 제가 어떻게 보수를 드려야 하는지요..."
" 허!허!허! 그런 걱정 마세요. 어서 건강히 여행 다녀오셔서 연주를 잘 해주시면 됩니다. 연주회에 제가 꼭 갈 거예요.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 예.. 그러시다면 기획자에게 부탁드려 초대장 보내드리도록 하겠어요."
" 예,예.. 제이드씨가 건강해지는 게 제 보람입니다. 자, 그럼 저는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호탕한 성격의 의사가 돌아간다.
여자는 한동안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다.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에 젖는 것이다. 옆방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다. 잠 들었나? 어젯밤 잠을 못 잤으니....
얼마가 지났던가 은지와 소연이가 돌아온다.
" 엄마! 나 오늘 신나게 말 탔어. 너무 재미 있어. 여기 오래 있으면 좋겠는데.."
" 아주머니. 은지가 승마에 소질이 있는 것 같아요.저는 무서워서 살살 타는데 은지는 마구 달리더라구요"
" 그래? 그래도 내일은 돌아갈 거야. 그러니까 오늘 푹 쉬자. 알았지? "
" 엄마, 교수님은 어디 계서? 돌아가셨어? 차가 안 보이던데.."
" 글쎄.. 엄마도 모르는데.."
아니. 언제 나갔지?
" 엄마, 나 소연이 언니 방에 가서 놀게. 엄마는 더 쉬세요 "
" 그럴래? 그럼 좀 있다 점심식사 때 보자"
애들이 나간 다음 여자는 불안하다. 파울이 아무 소리 없이 갔다니..스스로 감정의 기복에 여자는 주체하기가 힘들다.
라디오를 튼다. 클래식 방송을 어제 파울이 조절해 놓았던 채널에서 멘델스존의 선률을 보내 준다.
멘델스존... 삼십팔세에 생을 거둔 사람.. 지금 내 나이보다 좀 더 살았던 사람...나는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왜 이리도 안정이 안 되는 것인가.
'똑! 똑! " 방문 노크 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방문쪽으로 간다.
" 누구세요?"
" 파울입니다"
여자가 문을 연다.
가슴에 한아름 봉지를 든 파울이 웃고 서 있다.
" 애들하고 당신 먹을 간식을 준비해 왔어요. 자, 내가 안으로 옮길께요."
뚜벅 뚜벅 그가 탁자로 가서 놓는다.
" 파울! 이렇게 먹다가는 내가 뚱뚱해지겠어요. 그리고 내일 갈 건데 ... 다 못 먹으면 어떻해요?"
" 제이드!.. 오늘만 생각해요. 자꾸 간다 간다 하지 말고요."
아.. 정말 이 사람 어떻하지?
-78.-
여자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다가 말을 시작한다.
" 파울! 여기 어디 피아노 연습할 만한곳 없을까요? "
파울의 눈빛이 순간 반짝 빛난다.
" 여기 호텔 회의실에 피아노가 있어요. 내가 사장에게 부탁해 볼께요."
" 파울,하지만 호텔투숙객들에게 방해가 되잖을까요?"
" 아니에요.. 오히려 라이브음악 들어서 좋아 할 거에요 하하하!!"
" 그럴까요? .. 그럼 부탁좀 해줘요. 오늘은 피아노를 꼭 치고 싶어요."
"좋아요.. 여기가 여의치 않으면 어제 갔었던 그 수도원에 한가하게 연습할 만한 곳이 있어요.
하여튼 내가 알아 보고 올께요."
하더니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파울의 적극적 반응에
그래! 이렇게 우리는 음악 파트너야. 그 이상, 이하도 아니야. 생각하며 마음을 안정시킨다.
몇분이 지나자 파울이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복도 전체를 울린다.
탸햐! 키만 크지 정말 소년 같은 데가 많네 ㅎ
" 제이드 생각이 맞아요. 여기는 투숙객들때문에 한시간 이상 연습은 곤란하다고 해요.
그래서 수도원에 연락 했더니 ,, 축 환영 이라고 언제라도 오라고 하는데요 하하하!!"
" 그럼 제가 연습하는 동안 파울은 뭐해요?"
" 그런 걱정은 말아요.. 수도원 정원을 산책하던가 ..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가 할 일은 얼마든지..
자! 그럼 당장 떠날까요?"
" 아니요, 애들하고 점심 간단히 하고요."
" 참 ! 그렇지요.. 역시 엄마라는 위치는 생각의 범주가 다르네요. 당신은 은지와 불가분의 관계인데, 내가 가끔 그 것을 잊어요"
" 세상의 엄마들이 다 비슷 할 거에요. 저의 모녀만이 유별난 것이 아니고요"
" 아니에요. 제 주위에도 자식 가진 여자들이 있는데, 느낌이 제이드와 다르거든요."
" 그래요? 글쎄.. 저 애들에게 가 보고 올께요. "
" 같이 가요."
둘이서 소연이 방을 찾아가니
무엇이 그리도 재미 있는지 사람이 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몰두하고 있다.
" 은지야! 뭐 하는 거야?"
" 아, 엄마 그리고 프로페소아! 안녕! 소연언니가 오목두는 것 가르쳐 주었는데 대빵 재미있어"
여자가 가까히 다가가서 보니 노트에 바둑무늬로 줄을 그어서
동그라미와 가위표로 표시하며 노는 것이다.
" 아주머니, 제가 한국에 있을 때 놀던 것인데, 요 꼬마에게 가르쳐 주니 신통하게 잘 하네요. ㅎㅎ"
" 그러니? 은지가 게임을 좋아해. 한국에서 외할아버지와 장기도 두었었거든 ... 그렇지 ? 은지야?"
" 응.. 아.. 할아버지 보고 싶다!"
그래, 은지야 엄마도 할아버지가 제일 보고 싶어. 아... 아버지.
" 얘들아 배 안고프니? 내가 피아노 연습하려고 어디 좀 다녀와야 하는데, 지금 같이 뭐 좀 먹을까?"
" 엄마, 다녀오세요. 아직 배가 안 고파요.나는 좀 이따가 라면 먹고 싶어요"
" 아줌마,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 ."
" 그래? 그럼 은지와 잘 놀고 있어."
여자가 두 애들과 대화하는 동안 파울은 두팔을 끼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보다가
여자의 말이 끝나자 마자,
" 식당에 점심 준비하라고 할까요? 아니면 우리 다 같이 나가 수도원 식당에서 식사할 까요?"
" 아니에요. 애들은 그냥 좀 있다 한국 라면을 먹겠데요. 그럼 이제 우리 나가지요"
" 그럼 당신은요?"
" 저는 아직 배가 안고파요..천천히요."
" 그래, 그러면 나갑시다."
" 참, 악보가 어디에 있지요? 그제 쓰러지고 나서 악보를 챙기지 못했었는데요.. 미안해요"
" 내 차안에 있어요. 걱정 말아요."
" 예, 그러면 먼저 내려가서 계세요. 제가 옷 좀 갈아 입고 곧 내려갈께요."
" 그렇게 해요. 어이 ! 공주님들! 엄마 방에 간식거리 가져다 놓았으니 맘데로 먹어요. 알았죠?"
" 어머 교수님 고마워요."소연이가 공손히 인사한다.
여자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옅은 갈색의 편하게 넓고 긴 윗도리와 세트인 넓은 바지로 갈아 입고
아주 낣작한 하얀 운동화로 갈아 신는다.
화장은 생략하고 머리도 단정하게 뒤로 모두어 매고
허리에 차는 백 하나만 간단하게 들고 아래로 내려간다.
서울에서 아침에 수영가며 조깅하던 차림으로 단장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 사람 사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지 뭐. ㅎㅎㅎ
차 곁에 서 있던 파울이 다가가는 여자를 쳐다보며 웃음이 가득하다.
" 왜 그래요? 조깅하러 가는 듯해요? ㅎㅎ"
" 당신은 변화 무쌍하여 종잡을 수가 없어서요.. 근데, 다 잘 어울리네요. 허 참!"
차문을 열어주며 연신 벙글 거린다.
" 파울! 그러니까 당신 조심해요. 내가 태권도로 찰 수도 있으니까요 ㅎㅎ"
" 아니? 당신이 태권도 유단자에요? "
" 아니에요. 농담이에요. 단, 저는 한국여자이니까 기초는 잠재적으로 있다는 의미로 .."
차안에 안자마자 여자가 잽싸게 안전벨트를 맨다.
" 당신이 이제 나에게 벨트를 메어주는 기회도 안 주는 군요..."
" 그게 아니라 이제 내가 적응을 잘 하는 거에요."
파울이 시동을 걸자마자 클래식 라디오 방송을 킨다.
아나운서가 말하는 해설이 독일어라 못 알아 듣지만
편안한 음성이 곧 음악처럼 들린다.
서행하는 자동차를 스치는 가로수들이 청녹색으로 싱그럽다.
또한 창밖으로 하늘을 쳐다 보니 맑기가 그지 없다.
엄마! 고마워요.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시고...
여자는 엄마가 하늘에서 내려다 본다는 것을 확신한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문화예술에 기본적인 배울 기회를 주신 엄마.
엄마는 어린 시절에 못해본 것을 딸애를 통하여 대신 경험하는 기쁨을 가졌었다.
갑짜기 엄마 생각이 나면서 여자가 입을 꼭다물자,
파울이 여자의 눈치를 살핀다.
" 파울, 왜 내가 이상해요?"
" 좀..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 엄마 생각을요."
" 어젠, 아버지.. 오늘은 엄마? 이제 보니 제이드가 아직 철이 안 들었나 보네요. 하하하!"
" 정말 그렇네요. 이렇게 고국을 떠나 오니 엄마와 아버지 생각이 제일 많이 나요.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
" 당신 참으로 신기한 여자에요. 남편 생각은?"
"........."
아니요. 별로...
정말 내가 이상한 여자이구나.
어느새 차가 수도원 주차장으로 들어선다.
참조:
소설을 연재하면서 중단을 거듭하여
과거와 현재가 오가는 가운데 연결이 잘 안 되는 분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한여자 (23)은
한 여자 (16) 라 트라비아타 (클릭) 의 마지막 부분과 연결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