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
마종기 시작 에세이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비채 /발행서적을 만나며.......
이 책은 내 스스로 장만한 것이 아니라
먼 나라로부터 선물로 보내준, 비행기를 타고 날라온 책이다.
즉, 나의 선택이 아니고 나를 아끼는 이의 선택이다.
보냈다는 전갈을 받고 내내 궁금하였다.
올해 들어 시와 친하게 지낸다는 내 심경을 헤아려 시집을 보내겠다고 할 때부터
혹시 내 기호에 맞지 않으면 어쩌지?.. 라고 걱정까지 되었다면 그 이가 웃을려나 ㅎㅎ...
얼마 후 이 곳에 도착해서도 내 손에 들리기까지 얼마간 우체국에 머물렀다.
나의 오랜 부재중에 우체국에서 혹시 나를 기다렸을까?
이런 생각은 포장지를 풀고 나서 표지 그림을 보며 느낀 나의 설레이는 감상이었다.
(마종기 시작 에세이 표지 그림: 프리랜서일러리스트 클로이 갤러리에서 옮겨옴 )
당장 열어 읽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책을 들고 다뉴브강가로 나가 시원한 그늘에 앉아
첫페이지를 열었다.
오래 다져온 사랑과 그리움으로 바칩니다... 라는 문귀와 더불어
자필인쇄로 보이는 마종기 이름 석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1939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아동문학가 마해송이며,어머니는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최초의 서양무용가로 활동한 박외선이다 .... 라는
그의 출생에대한 비채문고에서 책표지와 책사이에 별도 종이로 둘러씌어논 곳의 글을 읽었다.
마해송님은 내 소싯적 들어본 아동 문학가 그분? ...
그렇다면 문학의 핏줄이 흐르는 전문시인이겠네.. 라는 나의 순간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계속 이어지는 경력글에는
연세대학교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이수 중이던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방사선과 수련의 과정을 마치고 미국 방사선과 전문의가 되었다 ... 이어졌다.
아니! 전문의이자 시인!...
여기서 나는 스스로 얼마나 문학에 대한 문외한 임에 아연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미국에 거주하며 의사생활을 하면서 가슴의 것을 시로 엮어 나간것은
이미 20세 대학 시절 현대문학에 ?해부교실’등단했었둣이 뿌리가 단단했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수상경력은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을 망라한다.
이러한 그의 시와 시작에세이를 읽어가며 나는 내내 그의 '당신''이라는 대상을 찾았다.
또한 나의 ?당신’도 내 내면에서 찾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나 그'당신'은 있는 것이리라..
책을 펼치고나서 열흘 넘게 읽으며 완독을 하였다.
평소에 읽어가던 속도에 비하면 아주 느린 속도로 읽은 것이다.
마종기님이 스스로의 시작 50평생을 뒤돌아보며 간추린 시작에세이를
나도 내 인생을 더듬듯이 천천히 걸어보았다.
어제의 상처를 다독이고, 오늘의 사랑을 축복하며 내일의 희망을 선사하는 50가지 이야기!;
과연 표지에 적힌글이 과장이 아닌 그대로이다.
글로 만난 내용을 음미하며
명징한 음악이 들리는 듯한 새벽이다.
이 귀한 책을 보내온 이에게 다시금 고마움을 전하며
연이어 마종기님의 건필을 기원한다.
2013년 8월 15일 04시에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김옥인 적음
쇼팽 :피아노 빗방울 전주곡
꽃의 이유
마종기
꽃이 피는 이유를
전에는 몰랐다.
꽃이 필 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몰랐다.
꽃이 지는 이유도
전에는 몰랐다.
꽃이 질 적마다 나무 주위에는
잠에서 깨어나는
물 젖은 바람 소리.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누가 물어보면 어쩔까.
금재후배 오랫만이에요.
'꽃의 이유' 시를 다뉴브 강가에서 읽으면서 한손으로 사진을 찍은 거에요^^
금재후배는 벌써부터 이책을 가지고 있었군요.
저는 이제서야 만나면서 피어나는 꽃처럼 떨고 있어요.
언제인가는 지는 꽃처럼 또다시 떨겠지요...
예, 후배의 기억이 맞아요
작가가 쓴글을 옮겨볼께요.
이 시는 내가 쓴 시들 중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다. 널리 아낌을 받은 이유야 각양각색이겠지만 거의 20여년 전에 내가 받은 한 통의 편지를 여기에 참고삼아 소개해본다. 편지를 주신 분은 예순 살 정도이셨던 것 같다. 깨끗하고 잘 쓴 글씨의 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었다.
그분은 1년전 사랑하고 존경하던 남편을 폐암으로 잃었다. 남편의 긴 투병 중 점점 쇠약해가던 말기의 어느 하루, 옆에서 간호하던 자기에게 남편이 종이 한 장을 내밀며 언제 한번 시간이 날 때 읽어보라고 했다.그 때는 정신도 없고, 환자와 함께 자신도 피곤하고 침울해져 있던 때라,그러마고 말만하고 잊고 지냈다. 그 얼마 후 남편이 죽고 장례를 치르고 남편의 유품과 병실에 남아 있던 물건을 태우고 정리하던 중에,갑자기 남편이 죽기 전에 자기에게 전해준 그 종이가 나왔다. 그 종이에는 남편이 직접 쓴 시 한 편이 적혀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시가 바로 선생이 쓴 시였다는 내용이었다. "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이 시를 읽고 또 읽다가 너무 고마워서 이렇게 내 주소를 알아내고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는 것이다.
당신의 시가 죽은 내 남편을 내 옆에 다시 데려다주었습니다. 나는 그가 그리울 때면 늘 이 시를 읽습니다.그러면 어디에 있다가도 내 남편은 내 옆에 다시 와줍니다. 그리고 나직하게 이 시를 내게 읽어줍니다.이 시가 나를 아직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줍니다....
시라는 게
우리안의 감성을 북돋워주고 생각을
고취시켜 주는
예술의 쟝르라고 생각해요.
많은 말보다 짧은 단어의 사용이 정갈할
경우도 많구요.
제친구 숙희(알버트 엄마.얼마전 책을 내고 이곳에서 시인으로 문인협회에 등록이 되었지요)는요.
미국에 온 이유중 하나는 마종기 시인을 한번 만나보기 위해서 였다네요.
그친구는 1980년즈음에도 그의 열렬한
애독자였더군요.
말이 난 김에 그에게 자신의 책을 한권
선물해 드리셌다던데 ㅡㅡ
30년이 지난 여태도 마종기 시인을
개인적으로 뵙지는 못했지만ㅡ
그런 친구도 있어요
금재후배님의 가녀리며 여성스러운
미소가 생각나네요.
참 멋진 시인이죠?
남자로써 의사인 직업을 갖고도 그런
감성을 유지하는 분은 어떤분인가
저도 궁금해져요.
경수후배,
예전에는 시보다 소설이나 에세이에 흥미를 더 가졌어요.
그런데 지난 봄 70대 노부부가 서로 시로 주거니 받거니 곳곳에서 여흥을 즐기는 모습에 반해버렸지요 ㅎㅎ
그 후부터는 시에 애착이 가는 거에요 .
시를 어느만큼 소화해야 그분들 처럼 척척 암송이 될까요?
시의 운률과 의미를 터득하고 즐겨 낭독하다보면 자신의 것이 되겠지요...
이 분들과의 추억은 참으로 아름다워요.
한기업의 총수임에 불구하고 얼마나 겸손하던지요.
시를 읊고 유머스러운 모습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지더라고요.
삶은 참으로 흥미로와요.
마종기님의 시와 만나면서 더욱 더 생의 깊이를 느껴봅니다.
숙희씨가 시인이군요..
기회가 되면 숙희씨 시도 소개해 주세요^^
우리들의 배경
ㅡ피아니스트 폴리니 연주회
마종기
흰 배경으로
두 마리 흰 새가 날아 올랐다.
새는 보이지 않고
날개 소리만 들렸다.
너는 아니라고 고개를 젓지만
나도 보이지 않게 한 길로만
살고 싶었다.
이 깊고 어려운 시절에는
말하지 않아도
귀는 듣고
서로 붙잡지 않아도
손은 젖는다.
아무도 없는 배경으로 또
흰 새 두마리 날아오른다.
어두운 곳에 깨어 있는
작은 사랑의 물방울이 튄다.
Pollini: Nocturnes (Chopin)
시작 에세이
1970년대 중반쯤의 어느날,
빌려 읽은 뉴욕타임스 신문에 이탈리아의 젊은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 (1942- )의
도미 연주회를 알리는 기사가 났다.
폴리니는 세계적인 콩쿠르를 다 휩쓸고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중에
갑자기 몇 해 동안 연주회도 하지 않고 팬들을 몹시 궁금하게 만들던 터였다.
기사에 의하면 이번이 두 번째 도미 연주인데 1960년대에 처음 왔을 때와 같이
뉴욕에만 오고 연주도 카네기홀에서 이틀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 기사를 읽고 나는 꼭 한번 그의 연주회에 참석하고 싶어,
앞뒤 가리지 않고 좋지 않은 자리기는 하지만 표를 한 장 사고
뉴욕행 왕복비행기 표도 사고 카네기홀근처의 싸구려 호텔도 예약을 했다.
그래서 어느 가을 밤,
나는 황홀하게 들뜬 마음으로 뉴욕 카네기홀을 찾았고
윤곽이 뚜렷한 음색을 지닌 그 빛나는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폴리니는 그 후 15년쯤 지난 후에야 미국에 한 번 더 와서 며칠 연주를 했다는데,
지금 생각해보아도 그때 내가 연주회 표를 살 수 있던 것 부터가 큰 행운이었다.
앙코르 곡까지 두 시간이나 계속되었던 그날의 연주회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비둘기 정도 크기의 두 마리 흰 새를 계속 보았는데,
그 새들은 연주회 내내 카네기홀의 연주회장을 소리 없이 날면서
구성도 신통찮은 듀엣의 춤을 추며 가끔은 흰색의 벽에 빠져서 잠시 보이지 않기도 했다.
새들은 아무 희망이 없는 듯 때때로 무너지듯 날았지만
나는 속으로 언젠가 저 두 마리의 새가 화려한 날갯짓으로
우아한 구도를 그리며 오래오래 평생을 날게 되리라고 믿고 싶었다.
사랑이라 부르기에는 너무 초라하게 장식도 조명도 없는 춤.
사랑이라는 자부심도 없이 그늘로 피하기만 하고
남들에게 멀리 비켜 서기만 하면서 세상의 눈치만 살펴 피곤에 지쳐가는 지저귐.
용기 있고 뚝심이 있어야 할 젊은 나이에 빛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스스로 포기해버린 새.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한 쌍의 흰 새는 연주회가 끝나갈 즈음에 어디로 숨어버렸다.
나는 그 새를 찾을 수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연주회의 감동 때문이었는지,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그날 밤 혼자 연주회장을 빠져나오며 오랫동안 한밤의 맨해튼 거리를 걸었다.
................후략............
마종기 선생님께
저는 위의 글을 읽으면서 선생님의 음악에 대한 열정에 감동했습니다.
한 음악회를 보려고 일부러 비행기를 타고 ,호텔을 예약하고 찾으셨다는 그것 때문입니다.
음악을 전공한 저는 아직도 그래본 적이 없습니다.
얼마나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연주회를 보셨을까요?
그 마음이 새 두마리로 되어
연주회 내내 그곳을 날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폴리니 실제연주를 못 보았습니다.
한국에서 살때 그가 연주한 테이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은후 폴리니 연주를 여러번 들어 보았습니다.
청년기 연주는 박력있고 기교가 뛰어나더군요,
반면 중장년기에 연주한 것에는 심오한 느낌이 가슴을 두드립니다.
그분이 이제 70이 넘으셨지만 아직도 연주를 하고 계시니
조속한 시일내에 꼭 연주회를 찾아 보려고 결심을 했습니다.
이제 실제로 그분의 연주를 들을 생각을 하니 벌써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지난 2월에 독일 드레스덴 젬퍼오퍼에서
베르디의 라트라비아타를 보았습니다.
선생님처럼 음악회를 보러 일부러 간 것은 아니구요
여행간 김에 보려고 미리 표를 제가 사는 비인에서 예매를 했었지요.
연주회중 간혹 가슴이 멈추는 듯 했었습니다.
눈물이 핑돌기도 했구요.
선생님께서라면 시로 연결이 되었었을텐데요..
선생님의 시와 시작 에세이를 읽은 후 제가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술은 평상의 혼돈속에 이루기 어렵다고 항상 되뇌이던 것이 저의 부질없는 변명에 불과함을 깨달았습니다.
예술이 즉 저의 삶에 녹아 있어야 한다는 것도 다시한번 새기면서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인희후배 잘 지냈어요?
저는 어제 또 다뉴브강에 나가 수영하다 책보다 저녁까지 먹고서는 늦게 집에 돌아왔어요.
거기서 인희 후배댓글을 아이폰으로 읽고 미소를 지었답니다.
왜냐면요,,, 나종기님이 폴리니 연주를 본 한참뒤 또한번 위의 음악올린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미켈란젤리의 연주를 보러 뉴욕행 비행기를 탔었대요.
그래서 인희후배가 책을 구한뒤 이글을 읽고서는 이 연주가의 곡도 들어보려고 하겠구나... 싶더라구요.ㅎㅎ
마종기 시인님이 어느 곡을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일단 밝은 음악으로 선곡해 보았어요.
1. Allegro moderato
2. Adagio cantabile (9:48)
3. Rond?: Presto (18:58)
(Cadenze: Nino Rota)
Z?richer Kammerorchester
우리들의 배경 /시작 에세이 후반부분
이렇게 하루의 연주를 듣기 위해 뉴욕행 비행기를 탄 부산한 행위는 1980년 말인가에 한 번 더 있었는데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미켈란젤리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1920- 1995)의 첫 번째 도미 연주회였다.
한 때 폴리니의 선생으로 알려진 이 괴팍한 피아니스트 역시 뉴욕에서만 이틀을 연주하고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서 나는 같은 짓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미켈란젤리는 연주회 때마다 자기의 피아노를 운반해 다닐 만큼 까다로우며
연주회를 갑자기 취소하기를 잘한다는 소문이 있어 그가 무대에 뚜벅뚜벅 걸어 나올 때까지
내내 가슴을 졸였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의 연주회에서는 폴리니의 연주회에서 보았던 두마리의 흰 새를 한번도 보지 못하였다.
아마도 내가 많이 늙어서 밝은 눈을 가지지 못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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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에세이를 읽고 나서...
마종기님이 혹시나 미켈란젤리의 연주회가 취소 될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다 실제 연주를 보았던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나는 수많은 세월이 지나 나의거실에서 그의 연주녹음을 들으며 편안히 그를 만난다.
문명의 이기에 감사한다.
내가 뉴욕을 처음으로 방문했던 것은 2009년 성탄절즈음이다.
여행전 미리 예약을 안하고 갔다가 현지에서 표를 전격적으로 구하고 감상했던 감격의 기억이라니..
카네기홀에서 보았던 관현악연주와
매트로 폴리탄오페라 하우스에 보았던 '호프만의 뱃노래'를 잊을 수없다.
공연후,한밤중에 겨울의 쌀쌀한 바람도 아랑곳 없이 얼마나 거닐었던지...
나시인님이 폴리니 연주회후 감상에 젖어 맨하튼을 한없이 거닐었다던
그때 1970년 중반과 내가 거닐었던 2009년 사이에는 30여년의 간격이 있으나
감명받은 연주회를 본뒤의 심취한 감성으로 맨하튼을 걷는 것은 똑같지 않았을까?
참으로 이 시작 에세이는 흥미롭고 감명깊다.
옥인선배님
보내드린 책을 백분 즐기신 것 같아서
제 마음이 더 좋아요.
그렇잖아요.
좋으면 좋은 표현을 할 줄 아는 것도
그사람의 능력이라고 생각되어지거든요
그책은 복도 많네요.
다뉴브에서 사랑이 많은이의 손에 놓여졌으니ㅡ
저도 크림트의 표지가 있는 씨디를 종일 듣겠습니다.
당신! 멋져요..
독후감 계속
책제목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로부터
첫 인상이 강하였다.
당신과 함께... 가 아닌,
부른다는 의미는 아주 안보이는 곳에 있는 당신을 찾는다는 것이거나,
혹은 보이는 지척에 있는 그가 나를 못볼때도 찾는다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여하튼 찾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부르는 것이 아닌
부르며 살았다라는 것은 그리움과 간절함의 가득함을 전해온다.
책을 읽어나가며 작가의 당신을 조국과 대비하며 읽으니 모든 것이 이해가 쉬워졌다.
그러나 나의 감성은 시인이 상징하는 조국과는 별개로 나의 당신을 찾았다.
이런 묘미는 나만이 아니라 그의 시를 대하는 대부분의 독자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내가 부르며 살아온 당신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마종기 시작 에세이-당신을 부르며 살았다-시는 내게 사랑이었고 희망이었고 하느님이었고 무조건적인 이해심이자 베풂이었다.
가톨릭 다이제스트에서 처음으로 시인을 알고난 후 늘 곁에 머무르는 한권의 시집
꽃이 필적마다 꽃나무 전체가 작게 떠는 것도 모르고 살아온 날들이 아쉬워지는 여름날 아침 --꽃의 이유-를 다시 한번 펼쳐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