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한 여자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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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갈아입으려고 가운을 완전히 벗자, 목욕 후에 발그레히 물 든 여자의 몸이 적나라하게 거울 속에 서 있다. 여자는 당황하며 들고 있던 민속옷을 두 손으로 펼쳐 앞부분을 가리듯이 거울에 비춰본다. 


연보라색!


어릴 적 엄마가 양장점에서 맞추어 주었던 옷이 떠오른다. 연보라색  굵은 마 질감의 원피스에 하얀 스탠드 칼라가 달렸던 옷. 어느 초가을이었던가 싶다. 할아버지, 엄마, 오빠 그리고 어린 동생들과 월미도 소풍을 갔다가 기념사진을 찍었었는데 분명히 흑백사진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진을 볼 적마다 선명히 떠오르던 '연보라색'이었었다.


사람의 잠재력은 시공간을 뛰어 넘는다더니 바로 이런 현상도 아닐까.


대학졸업연주회 연주복도 연보랏빛 하늘하늘한 샤폰으로 입었었다. 깡마른 모습으로 머리를 치어 올려 목을 다 내놓아 입으며 연주회 참석한 사람들로부터 처연하도록 아름답다는 경탄을 받았던 드레스. 그해 가을 그리스로 다시 돌아간 박영빈의 소식을  기다리며 그리워하던 것이 기다란 목을 타고 흘러 내렸었을까? 어느 날 기차통학 중에 기차 위 난간에 놓고 내려 내내 아쉬워했던 연주복. 그 아쉬움은  가끔 문득 씩 떠오르고 있었는데 이제 이 순간에도 또 .


생각은 계속 달린다. 어느 토요일 저녁, 그때 입었던 연보라색 홈드레스. 잔잔한 꽃문양이 보일 듯 말 듯 연연하게 푸르고 진보라색으로  장식되었던 옷. 친지가  카나다로부터 가져다 주었던 부드러운 감촉이 좋아 아끼던 옷. 그러나 그날 저녁 남편과 의견이 달라  말다툼하던 중, 격앙된 감정을 손 제스츄어로  피력하던 그의 손에 걸려 앞섶이 찢어졌었다. 분명히 작정하고 찢은 것이 아니었으나 그 장면을 어린 딸애가 보았었다.


다음날 주일, 교회에 갔다가 성가대 연습마치고 모두들 점심 먹으며 담소하는 중에 부모 따라왔던 세 살짜리 딸애가  밑도 끝도 없이, 

" 아이 참! 아빠가 엄마 옷 찢었어요"라고 또렷이 말했다.


모두들 기가 찬 모습으로  부부를 쳐다 보았다. 당황한 남편이 어쩔줄 모르는 모습에 여자는 오히려 담담히,

" 얘가 놀랐었나 보네요. 어제 어쩌다가 애 아빠 손에 걸려 옷이 찢어졌었는데요"


그 일은 두고두고 성가대원들이 재미있었다고 말하였다.

" 어쩜 세 살짜리가 깜찍하게도 그런 말을 전한대요? 이제 아빠 엄마가 딸애 앞에서는 꼼작 못 하게 되었네요 ㅎㅎ" 라고.


그랬다. 딸애는 가끔 부부의 상상을 초월하여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여자는 생각을 털듯이 가지고 있던 민속옷을 옆으로 밀어놓고 본인의 옷으로 입는다.


내가 입을 옷이 아니야. 아니 입을 형편이 아니야. 아프다고 쉬면서 이리 옷치장하는 모습을 애에게 보여 줄 수 없어. 그리고 또한 파울의 배려를 무턱대고 받을 수도  없고.


여자가 민속옷을 들고 거실로 나온다.


" 왜 안 입으셨어요?" 비올렛이 놀래며 묻는다.

"부담 스러워서요. 그냥 평상대로 입을게요."

" 엄마! 왜? 그럼 나도 벗어야 돼요?"

" 아니야. 은지와 소연이는 그냥 입어. 엄마는 좀..."

" 아이, 그래도 아줌마가 안 입으시면 저도 쑥스러워요."

" 소연이에게 잘 어울리는데 ? 자, 그럼 내려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