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주년 기념 중편불교소설 당선가작-구슬아 13
노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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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4.08.10  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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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우리 식구가 모두 여든 네 명이네."

"사세(寺勢)가 말도 못하게 쇠잔해졌구나."

"그렇지. 문정왕후 때만 하여도 비구니가 오천 명이 넘었다고 하던데"

"전란으로 불타 없어지기 전이니까."

"지금은 자수원이라고 격하가 되었지만 인조 임금님 전까지는 자수궁이라 해서 궁궐대접을 받았다지 않아. 광해군 때 상궁 김개시 세력의 총집합소 역할을하다가 인조반정으로 철퇴를 맞은 후로 점점 쇠락해지고 있는데 앞으로는 옛날의번성함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아."

자수원(慈壽院)은 임금이 승하하시면 후궁 중에서 아들이 없는 사람이 들어와살던 곳이다. 아무리 자식 없는 후궁이 은퇴하여 마지막 거쳐가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그들도 한때 정치세력과 깊은 인연을 맺고 살았으므로 자수궁은 세상 돌아가는 움직임에서 비켜서지 못했다.

자수궁은 개국 초 세종이 승하한 뒤 문종이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기 위하여 태조의 아들인 무안군 방번의 옛집을 수리하여 자수궁이라고 이름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세종 소생이 18남4녀였다고 하니 그 비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으며 세종의 사후에는 이들 가족과 가솔들의 문제가 심각했을것이다. 그 후 성종이 즉위한 후에도 세조와 예종의 비빈(妃嬪)이 자수궁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연산조에 이르러서는 이곳을 「회녹각(會綠閣)」이라는 이름을 붙여 흥청들의 거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명종조에 들어와서는 문정왕후가 섭정하면서 일반 사가(私家)를 개조하여 사용하던 소규모의 자수궁을 궁궐의 형태로 신축하고 불교 사찰로 변모시킨다. 유림들의 대단한 반대 상소가 잇따랐지만 문정왕후는 독단으로 강행하여 이 안에 불교사찰 식의 종루, 나한전을 짓기까지 하였다. 문정왕후는 이곳을 공식적인 불사를 행하는 장소인 동시에 자신의 세력기반의 중심축으로 삼으로 하였다. 그러나문정왕후가 돌아가고 나서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다가, 광해조에 들어와 인왕산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인경궁, 경덕궁과 함께 자수궁을 새로 지으면서 장소를 달리해 새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 후 인조가 반정한 뒤로자수궁이 폐지되고 자수원이라 이름을 고치게 되며 이때부터 퇴락된 비구니사원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도성 안의 비구니 사찰은 자수원 이외에 인수원(仁壽院)이 하나 더 있었다. 인수원은 조선국초에 세워진 정업원의 후신으로 원래 왕실의 지친이나 내명부의 여인들이 출가하여 거처하던 곳이었다. 태종 8년의 기록을 보면 고려말의 거유(巨儒)였던 익제 이제현의 딸인 공민왕비 혜화공주가 정업원의 주지로서 열반했다하며, 태종 11년에는 정업원 주지 경주 김씨(정종 정안왕후의 언니)에게 별사전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아도 인수원이 왕실과 직결되어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던 것이 세종 30년이 되면 철거되는 운명에 처하는데 이 때 정업원 소속 서울의 노비 수가 4백89명이며 3천2백15명이었다고 한다.

정업원은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에서 희생된 단종비(端宗妃)의 슬픈 삶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단종이 유배된 뒤 단종비는 궁궐에서 나와 정업원의 비구니가 되어 살았는데 세조가 요절한 자신의 아들을 정업원에서 추복하기 위하여 쫓아내므로 다시 동대문 밖 청룡사로 나가 영월 땅을 바라보며 생을 마치게 된다.이 때의 청룡사도 정업원이라고 불렀다. 연산조에는 도성내의정업원이 훼철되었다가 명종 원년에 문정왕후의 요청으로 옛 정업원 자리에 인수궁을 짓고 정업원을 다시 도성 안으로 옮겨 와 지수궁과 함께 또 하나의 니원(尼院), 즉 비구니절이 되는데 동시에 질병이 있는 궁인의 요양소의 역할도 겸하게 된다.

"여기 봉은사에도 어명이 내려왔었나?"

"물론, 나는 그때 남한산성에 있었는데 마침 옛 동무가 임금님의 교지를 받들고 왔더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스러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못할 것 같아."

"걱정하지 말아. 내가 가만히 안 있을 테니. 왜란 때 목숨걸고 싸우고 왜놈에게 다 잡혀 먹힌 나라를 구한 것은 바로 우리 승도(僧徒)였고 폐허가 된 땅을 일으켜 세운 것도 모두 승도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조조에 우리 스승님과우리 문도들이 무엇 때문에 땀흘려 노역을 마다하지 않았는지 그들도 잘 안다 옛날 뿐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