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
꿈
2017-03-09
요즈음 몸이 삐걱거리어
낮과 밤이 바뀌어 자다가
오늘 아침잠에 꿈을 꾸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느 낯선 나라였다
바로 저 창밖에 지인들이 다정히 산책하고
바다 건너 낯익은 섬이 보이는데
허나 왜 그리도 가기 어렵게 느껴지든지...
아쉬움을 가지며 눈을 뜨니 꿈이었다
잠시 생각에 젖다가
곁에 놓인 손전화를 펼치니
바로 그 섬에 사는 후배의 나들길이 보인다
내가 꿈꾸던 시간에 올린 것이다
그래 꿈길로 찾아 가야겠구나
꿈 -
황진이 시,
김안서 역,
김성태 곡,
송광선 노래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꿈길따라 그 님을
만나러 가니
길 떠났네 그 님은
나를 찾으러
밤마다 어긋나는
꿈일양이면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한국가곡을 세계화하자 071 편집 chk2736
후배가 거닐은 그곳의 정경이 아련하게
저기 바다 건너 보이는 섬이 가까운 듯 아득한 듯...
꿈속인 듯 실제인 듯...
(사진출처: 강복희님의 강화도 정경)
작곡가 김성태에 대하여
김성태(金聖泰, 일본식 이름: 金城聖泰 가네시로 히지리타이[*], 1910년 11월 9일 ~ 2012년 4월 21일)는 대한민국의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지휘자, 음악교육가이다. 호는 악석(樂石), 요석(謠石), 낙석(洛石)이다.
경성부의 개신교 가정에서 출생하였고 경신중학교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이때까지는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으며, 연희전문에서 만난 현제명의 영향으로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 고등음악학원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일본에서 작곡을 공부한 음악가였다.[1]
귀국한 뒤 경성보육학교 음악주임을 시작으로 고려교향악단 지휘자를 지내며 홍난파, 현제명 등과 더불어 한국의 서양음악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해방 후에는 현제명이 서울대학교에 음악대학을 설립했을 때 함께 참여하였다. 1955년에는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교 음대에서 작곡 이론을 연구하였고, 연세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음대 학장,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한국 음협 고문, 고려 및 서울교향악단 객원지휘자를 역임하였다.[2]
작품으로는 〈교향적 기상곡〉을 비롯하여 〈현악 4중주〉, 〈현악합을 위한 모음곡〉,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등이 있으며, 교성곡(交聲曲) 〈비바람 속에〉와 연가곡(連歌曲) 〈꽃〉, 〈소월(素月) 가곡집〉, 〈산유화〉, 〈이별의 노래〉 외 수십 곡의 가곡 등이 있다.[2] 〈즐거운 우리집〉, 〈동심초〉, 〈못잊어〉 등의 가곡도 유명하다.
(발췌: 위키백과)
시인 김안서에 대하여
김억(金億, 일본식 이름: 岸曙生, 1896년 11월 30일 ~ ?)은 한국의 시인이다. 호는 안서(岸曙), 본관은 경주, 본명은 김희권(金熙權)이며, 호를 따라 김안서(金岸曙)로도 종종 불린다.
평안북도 곽산 출신이다. 1907년 인근 정주군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수학했고,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게이오의숙 영문과에 입학했다. 1914년 도쿄 유학생들이 발간하는 《학지광》에 시 〈이별〉 등을 발표하여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1916년 모교인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진달래꽃〉의 시인 김소월은 오산학교에서의 제자로, 김억의 지도를 받았다. 1922년 김소월을 처음 문단에 소개한 사람도 스승 김억이다.
낭만주의 성향의 《폐허》와 《창조》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평양의 숭실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밖에도 에스페란토 보급에 앞장서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924년에는 《동아일보》에 학예부 기자로 입사했다.
김억은 당시까지 낯설었던 해외 문학 이론을 처음 소개함과 동시에 개인의 정감을 자유롭게 노래하는 한국 자유시의 지평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된다. 서구의 상징시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하여 1920년대 초반 상징시풍이 문단에 정착하는 계기를 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는 한시의 번역이나 민요 발굴 등 전통적인 정서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