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1996년에 쓴 것으로 당시 어느 공모전에 출품해서 대상을 받았던 작품이야.
김 희재는 내 필명이자 사회생활에서 통용되는 또 다른 이름이고.
  
 
            죽변 기행

                                            김    희  재

  차가 포항을 지나자 오른편 차창 너머에 바다가 예전처럼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창문을 조금 열자 비릿하고 찝질한 갯바람이 확 끼쳐 들어왔다. 냄새만으로도 나는 이미 고향에 돌아 온 나그네 심정이 되어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목구멍이 뻐근하도록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오르더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오랜만에 그리운 이를 만난 듯한 감격은 이렇게 바닷내를 타고 밀려들었다.
끝도 모를 수평선 저 너머까지 주욱 따라 가며 널려있는 잔 구름들 사이로 크고 작은 배들이 풍경화처럼 점점이 박혀있는 것도 내게는 모두가 옛 앨범을 들추어내는 듯한 정다움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정작 바다는 언제나처럼 변함도 없이 그 리듬과 동작으로 제 몸을 뒤집어 허옇게 거품을 뒤집어쓰며 시치미를 떼고 누워 있다.
우리는 죽변을 찾아가는 길이다.
딱히 찾아 갈만한 집도 없고, 꼭 만날 사람도 없었지만 우리의 젊음과 추억을 찾아서 무작정 떠난 길이었다.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아이들의 고향, 그 애들의 생가를 찾아가는 길이었다.

15년 전, 내가 처음 죽변에 도착을 하던 날은 이른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결혼을 한지 채 1년도 안된 새댁이 남편을 찾아 허위허위 달려오는 길이었다. 결혼 후 남편은 광주 보병학교를 거쳐 영양에서 내륙 중대장을 하고 있었는데 같은 연대에 속해 있던 해안중대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그 중대의 후임 중대장으로 가게 되었다. 가방 한 개만 달랑 들고 떠난 남편을 찾아 임신 7개월의 몸으로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타고 죽변에 왔을 때 그는 나를 맞아 반길 겨를도 없었다.
갑작스레 부임을 한 남편으로서는 사고로 온통 쑥밭이 되어 술렁이는 중대원들의 마음을 수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남편은 홀몸도 아닌 내가 이사를 하고 짐 정리를 혼자서 힘겹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밤낮으로 부대 일에만 매달렸다.
누가 가르친 것도 아닌데 나는 그런 남편을 야속해 하거나 서운해하지 않았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바쁘고 힘든 남편이 나 때문에 신경 쓰지 않게 해야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그저 말없이 그의 곁을 지키며 해안 중대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해안 중대는 교대로 예비대에서 휴식과 정비를 하고 다시 해안으로 배치가 되는 법인데 사고를 낸 우리 중대는 다른 부대보다 몇 개월을 더 예비대에 머무르며 정비를 하였다.
예비대에 있는 동안 남편은 같은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내게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어쩌다 잠깐씩 집에 들어 와서도 신경은 온통 부대 쪽에다 곤두세우고 있었으므로 곁에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중대장 관사는 부대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도 부대와는 또 하나의 담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밖에서 보면 그곳에 집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지어져 있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고 오직 바다와 백사장과 키 작은 해송만 빼곡이 둘러 서 있을 뿐인 외딴집. 종일토록 말 한마디 건네 줄 사람 하나 없는 그 집은 저 푸른 초원 위에 세워진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게다가 마을과는 멀리 떨어져 있고 시내버스도 그리로는 다니질 않아서 시장을 가려면 족히 5리나 되는 길을 남산만한 배를 안고 걸어가든지 숲 사이로 난 오솔길을 뚫고 국도로 올라가서 무작정 지나가는 아무 차라도 세워서 태워 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대위 봉급에 매 번 읍내로 전화를 해서 택시를 불러 타고 다닐 수도 없고 남편의 중대장 오토바이 뒤에 마누라가 매달려 타고 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남편은 거의 매일 저녁마다 중대원들을 번갈아 가며 중대장 관사에서 식사를 하자고 초대하는 바람에 나는 배를 쑥 내밀고 뒤뚱거리며 열심히 시장을 보러 다녔다. 시장에서 오는 길엔 운이 좋으면 그 쪽 방향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타기도 하고 완행 버스를 만나기도 했다.
이렇게 어렵사리 장을 보아다가 매일 장정들 저녁을 해대느라 부엌에서 헤어나지 못하면서도 난 한번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이심전심으로 남편의 의중을 헤아려 짐작을 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남편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몇 달 동안 거의 모든 중대원들을 중대장 관사로 불러다 개별적으로 식사를 하며 대화를 하고 나자 뒤숭숭하던 중대 분위기가 많이 정돈이 되고 사고의 악몽에 시달리던 중대원들 모두가 다시금 씩씩하고 믿음직한 패기를 되찾았다.

이렇게 부대가 제자리를 찾고 안정되어 가는 사이에 나는 첫 아이를 낳았다.
전남 광주에서 잉태되어 경북 영양을 거쳐 울진 죽변 예비대 관사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아이가 태어난 지 겨우 두 달이나 지났을 무렵 남편의 부대는 해안으로 이동을 하게 되어 울진에서 한참을 남으로 내려와 덕신이란 마을로 이사를 하였다.
덕신은 가난하고 조그만 마을이었다.
중대장 관사는커녕 우리가 세를 들만한 집도 없는 전형적인 어촌이라 큰살림은 마을 회관 한 귀퉁이에다 쌓아놓고 마치 캠핑을 온 사람처럼 전기 밥솥과 전기 후라이팬, 옷가지들만 챙겨 가지고 부엌도 따로 없이 방만 한 칸을 얻어서 살림을 하였다.
넓은 해안에다 병력을 죽 깔아 놓고 밤새도록 순찰을 돌아야 하는 남편은 낮에 병사들을 재워놓고 잠깐 집에 들러 속옷만 갈아입고 그저 얼굴만 보고 나갈 뿐 밥도 잠도 다 부대에서 해결을 했다. 전투복에 얼룩무늬 헬맷을 쓰고 산적두목처럼 시커멓게 그을린 아빠가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서면 아이는 제 아빠인줄도 모르고 무섭다고 낯 갈이를 하며 뒷걸음질을 했다.
그렇게 서로 슬쩍 얼굴만 보고 지나가도 남편은 내가 그 자리에 항상 그대로 머물러 있으므로 든든해했고 나는 그가 있으므로 행복했다.
덕신에서는 울진 읍내로 버스를 타고 장도 보러 다니고 아이 예방접종도 하러 다녔다.
털털버스로 30분 이상이나 구불구불 달려가고 하루종일 버스를 기다리느라 녹초가 되어도 읍내에 다녀오면 모처럼 도회지에 갔다 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덕분에 한 번도 이런 시골에서 살아보지 못한 나는 가끔 이렇게 나들이하는 것을 전원생활의 낭만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나의 낭만주의는 계절이 바뀌면서 금새 난관에 부딪쳤다.
연탄 아궁이조차 없이 나무를 때서 살아야 하는 시골집에서 미리 준비해 놓은 땔나무도 없이 겨울을 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았다. 집집마다 자기들이 겨울을 날만큼의 나무만 준비를 해 둔 까닭에 돈을 주고 살 수도 없는 형편이라 부득이 생나무를 해다가 때야만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무를 때는 일이 어려운 판에 생나무를 때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온 집안을 다 곰 굴로 만들다시피 연기만 나고 불은 잘 붙지 않는 생나무를 태우느라 싱갱이를 하다보면 눈이 매워서도 눈물이 나지만 쌓였던 외로움과 서글픔에 가슴속이 더 매키하니 아팠다. 간신히 초저녁에 불을 지펴서 군불을 넣어도 새벽 두 세시만 되면 방은 여지없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남편도 없이 동그마니 아이를 끼고 누워서 그래도 네 시까지는 견딜만하지만 더 이상은 등이 시리게 추워서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 밤중에 팔뚝만한 쥐가 우글거리는 어두운 부엌에 혼자 나가서 다시 불을 지필 엄두도 나지 않고, 자다가 추워서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아이를 그대로 두고 볼 수도 없고 해서 아이를 솜포대기 둘러서 업고 얇은 담요를 푹 뒤집어씌우고는 햇살이 확 퍼질 때까지 온 방안을 서성거렸다.
그렇게 새우는 밤은 유난히 춥고도 지루했다.
그런 밤이면 언제나 추위도 아랑곳없이 밤새 오토바이를 타고 순찰을 돌고 있을 남편과 초소에서 바다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서 있을 그의 부하들을 생각했다. 살을 에이는 바람 속에서 오로지 나라를 지킨다는 일념으로 밤을 새우고 있을 그들에게 비하면 이 정도는 추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금빛 고운 여명이 문 창호지를 뚫고 들어 와 온 방을 가득 채울 때까지 아이를 업고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며 서성이다 보면, 비록 발은 시려도 마음은 그렇게 시리지 않고 오히려 나도 남편과 함께 순찰을 돈 것 같아 가슴속까지 뿌듯하고 훈훈해졌다.
그럭저럭 차츰 불을 지피는 요령도 생기고 추위를 나는 것이 그리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만 하게 되어갈 무렵 우리는 무사히 해안 근무를 마치고 다시 예비대로 돌아왔다.

한 번 해안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15평 남짓한 예비중대 관사가 내게는 꿈의 궁전보다 더 호화로운 별장으로 느껴졌다. 무엇보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문화의 혜택을 다 누리는 듯했다. 게다가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 호젓하게 혼자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식탁과 나무 아궁이 대신 연탄을 때는 새마을 보일러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감사했다. 사람이 느끼는 행복이란 절대적인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이 곳에 와서 절실히 느꼈다. 지난번에 살 때는 유배지라고 생각했던 해송 숲 속에 있는 조그마한 외딴집이 이번에는 어디에도 견줄 수가 없는 꿈의 궁전이 되었으니 말이다. 남편도 처음 이곳에 들어 왔을 때와는 비교가 안되게 매사에 여유를 갖고 부대를 정비해 나갔고, 지난 1년 사이에 한 식구처럼 된 많은 중대 하사관 가족들과 죽변 교회 교우들 덕분에 나도 지난번과는 다르게 적적하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예정보다 빨리 해안으로 투입이 되는 바람에 예비대에 머무르는 기간은 지난번의 절반도 되지 않게 짧았다.
아쉬움 속에 이삿짐을 다시 묶으며 예비대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데 내 평생에 처음 보는 회오리바람이 바다를 가르고 몰려와 온 산하를 덮치기 시작했다.
초저녁 어스름 무렵부터 불기 시작한 바람은 비는 한 방울도 오지 않으면서 해송 숲 건너에 있는 백사장의 모래 알갱이들을 다 헤집어 온 사방으로 흩어 버렸다. 바다가 우는 소린지 전신주가 우는소린지 분간을 할 수도 없는 혼돈스런 소음을 뚫고, 굳게 걸어 잠근 창문을 부서져라 흔들며 눈을 뜰 수가 없을 정도로 모래가 날아 들어왔다.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기 시작하자 남편은 내일 이동할 병력들을 확인해 보고 올 테니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있으라는 말만 내게 남기고 부대로 들어가 버렸다.
전깃불도 어느새 나가버려 눈을 뜨고 있으나 감고 있으나 마찬가지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세상의 모든 귀신들이 다 일어나 아우성을 치는 것 같은 그 밤에 나는 오도가도 못한 채 자는 아이를 끌어안고 방 한가운데에서 짐승처럼 엎드려 있었다. 쉴새없이 덜커덩거리는 유리창 소리와 고막 깊숙이 파고드는 쇳가루 섞인 휘파람 같은 전신주 우는소리는 마치 나를 고문하듯 말초신경의 맨 끝가닥 까지 휘감고 늘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천지를 뒤흔들던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더니 먼동이 저 만치서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어둠이 물러가고 나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내 품에서 고이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새근새근 자고 있는 아이의 볼에 내 얼굴을 가만히 대 보았다.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따뜻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지자 정말로 살아 있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내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 내렸다. 그 지독한 고문 같은 어둠의 공포를 이기고 아이와 함께 무사한 것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밖으로 나와보니 중대 본부와 관사를 가르고 서 있던 담장이 간데 없이 허물어져 평상시엔 보이지 않던 부대가 눈앞에 훤히 보이고, 그 옆에 서 있던 전신주들은 여름날의 엿가락처럼 아무렇게나 휘어져 전깃줄과 전화선이 제멋대로 엉키어 땅바닥에 구르고 있었다. 도로변에 세워 놓았던 트럭이 훌떡 뒤집혀서 네 바퀴가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가 하면 거리의 가로수들이 뿌리째 뽑혀진 것도 부지기수로 많았다. 그런데도 다행히 우리 부대와 집은 담장이 무너진 것 외에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날이 밝은 후에야 집으로 달려 온 남편은 우리 모자가 밤새 무사했음을 보고 아무런 말없이 나를 부둥켜안았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가족보다 부대의 안위가 우선이라 밤새 중대장실에 머물며 우리를 돌보지 못한 남편의 마음이 그대로 내게 다 전해오고 있었다.
그 밤에 나는 군인의 아내란 한 남자를 그저 남편으로만 소유하려 들지 말고 평생 그가 지키고 사랑해야 하는 조국에 먼저 바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보통 사람들이 바라는 자잘한 일상의 행복보다 한 차원 높은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위대한 사명감과 긍지를 가슴에 품고, 어떤 극한 상황에서든지 너끈히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아낙이 되어야만 진정한 군인의 아내가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언제 그렇게 바람이 불었느냐는 듯이 고요한 예비대를 뒤로하고 우리는 죽변에서 북쪽에 위치한 지형이 험하면서도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고포 해안으로 이동하였다.
거기에도 중대장 관사는 없었다. 그래도 먼저 살던 덕신보다는 새마을 운동이 일찍 들어 왔는지 집을 개량한 집이 더러 있어서 이번엔 연탄을 때는 양옥집에 세를 들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부엌이었다. 주인 할머니가 까다로운 성미라 덕신에서처럼 한 부엌을 같이 못쓰고 이사하던 날로 화장실이 마주 보이는 집 뒷켠에다 비닐로 포장을 치고 간이 부엌을 만들어야 했다.
늦봄에 이사를 했는데 그 해 따라 유독 비가 많이 내렸다. 부엌에서 대강 상을 보아 가지고 추녀 밑을 따라서 집을 한바퀴 삥 돌아 오다보면 밥상인지 물상인지 구별을 하기가 어려웠다. 그릇마다 전부 뚜껑을 씌워 가지고 새색시 걸음으로 조심을 하고 왔어도 밥을 먹으려면 그릇을 다 들어내고 흥건히 고인 물을 다 딸아 낸 다음에 행주로 닦고서야 그 위에서 밥을 먹을 수가 있었다. 게다가 집 마당에 있는 수도는 주인 할머니가 늘 꼭지를 뽑아 두는 바람에 언제나 그림의 떡이었다. 물 값이 많이 나온다고 절대로 집에서 빨래를 못하게 하는 할머니 때문에 나는 매일같이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그 지붕에다 빨래 함지를 싣고 개울에 나가서 해다가 널어야 했다. 덕분에 나는 누가 보아도 외지 사람이라고 느끼지 않을 만치 완벽한 동해안 촌부의 아낙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던 차에 아이의 첫돌이라고 친정 어머니가 다니러 오셨다. 어머니 생각에는 세상에서 제일 잘나고 귀한 딸이라 시집도 잘 가서 남보다 편하게 잘 살거라 기대했다가 막상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시고는 많이 서운해 하셨다. 이렇게 살 바에는 당장 보따리를 싸가지고 집에 가자고 야단을 하시던 친정 어머니. 군대생활을 이해 못하시는 그 분과 싱갱이를 하는 것이 내게는 제일 힘이 들었다.
“이제 보니 내가 윤 서방한테 속아도 단단히 속았구나.
  너만 자기한테 주면 평생 고생시키지 않고 행복하게 해 준다더니 고작 이게 행복이      란 말이냐? 왼 종일 남편 얼굴도 구경 못하고 이런 촌구석에 처박혀 사는 게......”  
“중대장 때는 워낙 바쁘기 때문에 나 뿐 아니라 누구나 다 이렇게 살아요.”
“그렇다면 니가 굳이 여기서 같이 있을 필요도 없구나.”
“그래도 중대장을 혼자 하는 것보다는 같이 하는 게 훨씬 좋대요. 그래야 군대 생활이     어떤 건지 제대로 배우기도 하고.......”
“이게 어디 군대 생활을 배우는 거냐? 괜히 쓸데없이 고생만 죽살나게 하는 거지.
  이렇게 너 혼자서 남의집살이나 할 바엔 당장 보따리 싸 가지고 집으로 올라가자.”
“지금 날더러 이혼을 하란 말이세요?”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너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 배운 건 써먹지도 못하고 이런     데서 마냥 썩어 지내는 게 억울하지도 않냐?”
“엄마, 난 지금 억울하게 그냥 썩어 지내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힘든 과정을 같이 겪어야 내가 진짜로 윤 서방의 조강지처가 된다고 생각해요.
  조강지처는 고생도 같이 하고 영화도 같이 누리는 것이라고 엄마가 그랬잖아요.”
“그것도 어느 정도 기본이 된 다음에 말이지, 너처럼 그렇게 무턱대고 남편을 위한답시    고 모든 걸 희생하고 살면 이담에 누가 알아주기나 할 줄 아니?”
“누가 뭐 알아 달라고 사나요? 그 사람이랑 있는 게 좋으니까 곁에 있는 거지....
  그런데 엄마, 나만 보면 그렇게 남편한테 잘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더니 오늘은 왜 그    러세요? 내가 뭐 서운하게 해드린 거 있어요? 자꾸만 역정을 내시고......”
“너보다 공부도 못하던 아이들은 좋은 집에서 보란 듯이 편안하게 잘 사는데 너만 이런    촌구석에서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사는 걸 보니 에미 속에서 불이 나서 그런다. 왜?”
“엄마,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면서요? 지금은 이래도 우린 갈수록 더 잘 살 건데 왜     지레 겁먹고 야단이세요?”
“쯧쯧쯧..... 이것아 니 꼴을 한 번 들여다봐라. 그런 소리가 나오는지.....”
“내 꼴이 뭐가 어때서요? 난 지금 너무나 행복하고 아무 불만이 없다는데 왜 그러세요?
  괜히 그런 소릴 해서 내 속을 뒤집어 놓으시려거든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마세요.”
나는 결국 어머니에게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어머니가 그러시는 것도 다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친정 어머니가 정말로 야속하고 미웠다. 오히려 남편을 따라 꿋꿋이 사는 나를 대견하다고 칭찬을 해주시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딸자식은 다 소용이 없다더니 어느새 내 마음속에서는 어머니보다 남편이 더 소중한 사람으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셨든지 어머니는 나를 외면하고 돌아앉아서 한동안 눈물만 훔치시고는 가실 때까지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않으셨다.
다음 날, 어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곧장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을 뒤에 있는 바닷가로 나갔다. 어머니 앞에서는 전혀 내색도 않고 가슴 밑바닥에 숨겨 놓았던 눈물 보따리를 풀어서 바다에 던지며 나는 다시금 마음에 깊이 다짐을 하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다. 그가 가는 군인의 길이 지금은 그저 초라하고 궁색해 보여도 아무나 갈 수 없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가득 찬 영광스런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오직 군인의 아내라는 이름에 충실하며 내 남편이 누구 앞에서나 당당하고 떳떳한, 존경받는 군인이 되도록 뒷바라지하리라. 내가 거름이 되어 그가 꽃을 피울 수 있다면 내 인생 전부를 다 그에게 주리라. 아무리 닥치는 현실이 어렵고 힘이 들어도 절대로 울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모든 사람들 앞에 부끄럼이 없는 이름으로 기억이 되도록 순수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리라.’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다 유모차를 세워놓고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의 아득한 경계선을 바라보며 나는 평생에 잊혀지지 않는 결심을 마음에 새겼고, 그 결심은 우리가 어떤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라도 과감히 헤치고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차는 어느새 죽변항을 지나 예비대로 들어가는 작은 오솔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정말이지 너무도 멀리 돌아서 출발점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남편도 우리의 신혼시절을 고스란히 바쳤던 현장에 돌아오니 감회가 아주 새로운 모양이다.
“여기가 너희들이 태어난 집이란다. 저기 보이는 부대 뒤로 가면 아주 멋있는 집이 있    는데 너희 둘 다 그 집에서 태어났지.”
“그럼 여기가 우리 고향이예요?”
“고향? 글쎄......”
순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작은아이는 고포에서 생겨서 거의 만삭까지 있다가 마침 여기에 들어 왔을 때 낳기만 하고는 바로 중대장 임기를 마치고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 바보야, 여기는 그저 출생지야. 고향이란 태어나서 자란 곳이야.”
큰애가 어느 틈에 동생을 윽박지르며 아는 체 하고 나섰다.
“그럼, 우리 고향은 울진, 인천, 서울, 캘리포니아 몬트레이, 플로리다 탈라하시, 대전 중    에 어디가 진짜야?  우린 고향이 너무 많네.”
작은아이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결코 길지 않은 세월 동안에 우리는 기억해 내기도 숨가쁠 만치 너무도 많이 먼 곳에서 먼 곳으로 돌아 다녔다.
중대장을 마치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미 해군대학원으로 위탁교육을 받으러 떠났고, 석사 학위를 마치고 귀국해서 육본에 있다가 다시 박사 학위를 하러 미국으로 날아갔다.
되도록 쉽게 학위를 받을 수 있는 전공을 찾지 않고 굳이 어렵기로 유명한 핵물리학 이론을 택하여 거의 목숨을 걸어놓고 전투를 하다시피 공부를 하는 고지식한 남편을 옆에서 바라보는 것은 전방에서 근무를 하는 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돌아갈 날을 처음부터 정해놓고 시작한 유학생활.
자비로 공부하는 학생들은 언제까지 꼭 끝내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아무 때고 공부를 마치면 되는데 비해 국비로 위탁교육을 받으러 온 남편은 정해진 시간 안에 공부를 마치지 못하면 중간에 포기를 하고 그대로 돌아가야 할 형편이었다. 남편은 학위를 마치는 것이 마치 전쟁터에서 적을 물리치는 것이라도 되는 양 지도교수도 질릴 만치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파묻혀 지내는 바람에 이번에도 집안 일은 몽땅 내 차지였다.  
전방에서 근무를 할 때나,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나 남편은 언제나 자기 일에 열심을 다하고 나는 그의 곁에서 뒷바라지하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살았다. 천생연분인지 나는 남편만 곁에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나 늘 당당했고 그는 나만 옆에 있으면 아무리 힘든 여건에서도 주어진 일을 꼭 해낼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덕분에 남편은 미국 학생도 평균 8년이 걸려야 끝내는 핵물리학 박사학위를 4년 반만에 거뜬히 마치고 귀국하여 지금은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한 자리에서 자기의 기량을 발휘하며 근무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생가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더 이상 예비중대 관사로 쓰이지 않고 단지 총각 장교들의 짐만 넣어두는 곳으로 변해버린 텅 빈집에서 우리는 앨범 속에 있는 낡은 사진에서와 같은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옛날 사진에는 없는 나보다 더 키가 큰 아이들을 옆에 세우고 사진을 찍으며 나는 이곳이야말로 언제까지나 존재할 마음의 고향임을 실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전방 골짜기든 미국이든 이 세상 끝 어느 곳이라도 남편이 있는 곳이 곧 내 고향이 되었고 내가 함께 있는 곳이 바로 그의 고향이 되었다. 푸른 제복을 입고 군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가 자라난 곳만이 그의 고향이 아니고 어디든지 부르심을 받고 가는 거기가 곧 목숨을 바쳐 사랑할 고향이 된 것이다.
지난 15년 동안 둘이서 한마음이 되어 성실하게 살아온 덕분에 가난하고 고달픈 순간에도 우리는 늘 기뻐하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았다. 그리고 분주하고 힘들었던 삶의 고비들을 무사히 넘기고 이렇게 중년의 길목에서 지나온 길을 반추해 보며 앞으로의 삶에다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여행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앞으로 15년쯤 더 지난 후에 우리 아이들의 아이를 데리고 다시 이곳을 찾아오게 된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바램이 있다면 그 때도 여전히 내 남편이 이 나라의 군인임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기고 우리가 겪은 모든 삶의 질곡들을 오히려 훈장인양 우리 아이들에게 기꺼이 전해 줄 수 있는 충직한 군인과 그 아내이고 싶다.
어느덧 죽변 백사장 너머로 노을이 붉게 타들어 가고 있다.
아무 말 없이 먼 하늘을 바라보던 남편은 내 손을 슬며시 끌어다가 꼭 쥐어 주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11.전영희 ( 2005-01-29 10:38:59 )  

김춘선후배님
등단작가이군요

글 잘 읽었습니다
한편의 긴 드라마를 보는 듯했어요
군인의 아내가 가는 길을 잘 표현해준 김춘선후배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려요



임옥규 ( 2005-01-29 17:46:27 )  

춘선아 잘 읽었다. 할 말이 없대이.........



12.김연옥 ( 2005-01-29 22:07:39 )  

오늘 친구들을 많이 만났지~~
너를 보지 못해 아쉬워들 하곤 했는데.....
전에도 힘들지만 행복해 하며 살던 네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지금도 또한 열심히 살고 있는것도
그때의 저력이 아닌가 싶다.
춘선이 화이팅~~~!!!!!!!



12.김춘선 ( 2005-01-29 22:16:02 )  

너무도 오랫동안 고향을 잊고 살았어요.
그냥 앞만 보고 달리느라 숨가빴죠.
수구초심도 아니면서 이제야 인일의 원형교사가 그립네요.
내게 이런 아름답고 훌륭한 울타리가 있다는 사실이 든든하고 자랑스러워요.
아~~
고향 가고 싶어라!



12.김연옥 ( 2005-01-29 22:22:19 )  

춘선아!
오늘의 사업은 우째 잘 되었는감?



12.김춘선 ( 2005-01-30 17:51:57 )  

사업?
생각보다 주문 양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잘되었어.
다 늬들 격려 덕분이다.



정영희 ( 2005-01-31 14:36:59 )  

와우~~~
내동창...내친구 춘선이....
역쉬........
머찌다...짝.짝.짝.
나지금 두눈에 눈물 고인거 있지.
너의 숭고한(?)인생행로에
감동의 물결이 저~가슴 깊숙한곳에서 부텀
마구마구 밀려와 개지구 말야.... 우~~
진짜루 만나면 할말 무쟈게 많을거 같다 .그치???
머찐친구...암 머찌구 말구...
글구...윤서방님 잘 뫼셔라...
그~윤서방들은 처복이 엄청 있는갑다.ㅎㅎㅎ
--------또다른윤서방... 딱가리정영희가 둔내에서 씀 ---------



12.전경숙 ( 2005-02-02 15:43:56 )  

춘선아, 네 글 잘 읽었어. 참 좋구나! 한 군인의 아내로서의 너의 자세가 아주 멋지다.
처음에 네 이름을 보고 얼른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서 앨범을 뒤적였어.
다행스럽게 김춘선 이란 이름은 너 하나밖에 없더구나.^^
키가 훌쩍 크고 모든 면에서 어른스러웠던 것 같아. 맞니?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많은 어려움도 겪었겠지만, 남들이 가질 수 없는 값진 경험들도
많이 했겠다. 홈커밍 때는 올거지? 만나면 정말 반갑겠다.
죽변기행 잊지않고 나에게도 적용할께. 고마워!



김춘선 ( 2005-02-03 11:44:38 )  

경속아
네가 그렇게 은혜가 충만한 사모님이 되실 줄은
그땐 정말 몰랐는데...
하나님은 너무도 오묘한 솜씨로 우리를 다듬어 쓰시는거 같다.
네가 사모님이 되었다는 소식은
부평교회 사모님이 된 미영이에게서 들었단다.
나는 지금 권사로 교회에서 쓰임을 받고 있단다.
내가 이렇게 군인의 아내가 되리라곤 아무도 상상을 하지 않았을테니
인생은 살아 볼만한 재미있는 거란 생각이 들어. 그치?
물론 홈커밍 때 꼭 가야지.
이렇게 내 삶의 궤적을 부끄럼 없이 나눌 수 있는 여유로운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도 하다.



12.전경숙 ( 2005-02-03 15:02:43 )  

미영이를 뜻밖의 장소에서 만나서 너무 반가웠었지. 미영이가 사모님이 된 것은 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내가 사모님이 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놀라고 있어.^^ (물론, 나도...)
네 말처럼 은혜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단다. 나중에 간증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권사님이셔? 부디 하나님과 목사님 사모님 마음에 드는 진짜
권사님으로 인정 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you know what i mean?)




11.안광희 ( 2005-02-03 16:32:39 )  

몇날 며칠을 벼르고 제목만 읽다가 오늘 작정하고 읽었어요.
이 글은 현역에 복무하시는 군인들과 그 가족들에게 필히 읽혀야 할 것 같아요.
교과서 처럼.
혹시 이 내용이나 무대가 김춘선 후배와 관련있지는 않나요? ㅎㅎ 너무 리얼해서..

친정 조카중 제일 맏이인 녀석이 이 글을 보면 좋아하겠어요.
지금은 28살 이 되었어요.
R.O.T.C 장교로 죽변과 그 부근에서 군 복무를 마쳤는데
늘 들려오는 소리는, 복무 자체가 즐겁고, 해산물 많아서 잘 먹고,...
언니가 들으면 좋아할 얘가만 하더라구요.
물론 힘든 일도 있었겠지만요.
워낙 낙천적인 성격과 사람을 좋아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시대와 세대가 달라져서 지금은 군대 생활도 많이 좋아졌나봐요.
컴퓨터며 TV며 모두 구비해 놓고(집에서 공수) 아주 아주 즐거운 군 생활을 마쳤답니다.
가끔 그 아이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그 시절을 너무 그리워 하고
그 시절에 만난 모든 사병들을 그리워 해서
또 가고 싶은 곳으로 꼽고 있더라구요.
또 하나,
울진, 죽변은 우리 올케 고향이기도 하죠.
김춘선 후배,
좋은 글 잘 읽었어요.  



김춘선 ( 2005-02-03 17:42:31 )  

안광희 선배님
인터넷 새상을 산다는게 참으로 좋아요. 그쵸?
제가 선배님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동뭉 사이트 요러 곳에서 선배님의 음성을 듣곤 했는데
이렇게 말씀을 남겨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저는요,
요즘 인일 사이트 덕분에 30년 세월을 무시로 넘나들며 산답니다.
얼마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정신적 포만감과 안정감인지...
서로 이름조차 모르고 살아왔던 모든 사람들이
동문이란 이름으로 이렇게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하다니까요.
앞으로도 더 좋은 글, 좋은 생각들을 나누고 공유하도록 부지런을 떨께요.
선배님, 싸랑해요~~~



11.안광희 ( 2005-02-03 18:29:53 )  

인삿말이라도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나 듣기 좋아요.
내 고향은 아니지만 큰올케의 고향이고,
아직도 그 형제들이 지키고 있고,
(가끔 문어등 해산물을 보내주십니다)
그래서 '죽변'이란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어요.

이렇게 선 후배가 같은 자리에서 얘기를 나누고 서로의 생활과 생각을
마음껏 피력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예전에는 꿈도 못 꾼 일이지요?
이 곳에서 자주 얼굴 봤으면 좋겠어요.
후배도 부지런 많이 떨어 좋은 글과 생각 같이 공유하게 해줘요.
반가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