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 김 춘선

                                                                                                    김 희재



   나는 이름이 두개다.

  호적에 있는 이름은 김춘선이고, 내가 아홉 살 때 당대의 유명한 작명가인 김봉수가 지어준 이름이 김

희재다. 이름에 하필이면 돌림자로 ‘춘’자를 쓰는 바람에 우리집 딸들의 이름은 춘선, 춘옥, 춘남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어머니는 친구를 따라 무심히 김봉수씨를 찾아 갔는데 내놓은 이름을 보고 다짜고짜

당신은 딸들을 모두 기생으로 만들 작정이냐는 말에 허겁지겁 돈을 주고 새로 지은 이름이 희재, 희신,

희선이었다.

  그 때부터 집에서는 희재로 불렸지만 학교에서는 여전히 춘선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 스스로 내 이름값에 대해 생각하게 될 즈음부터 나는 춘선이라는 이름

보다는 희재라는 이름을 즐겨 쓰기 시작했다.

  우선 춘선이란 이름은 어감부터 천박하고 촌스러워서 싫었다. 또 봄 춘春에 착할 선善으로는 아무런 의

미도 만들 수가 없지만, 바랄 희希에 실을 재載로는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희

재’를 늘 희망을 싣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풀었다. 그 이름을 쓰면 정말로 희망을 가득 싣고 다니

는 사람이 될 것만 같았다. 게다가 희재가 어감도 부드럽고 특히 춘선이처럼 굳이 내가 여자임을 노골적

으로 드러내지 않는 유니섹스 이미지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단지 ‘여자’이기보다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

하는 내 성향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딸을 많이 낳아 포한이 맺힌 어머니의 아들 맞잡이 노릇을 해야

하는 딸이 바로 나였고, 올망졸망한 동생들과 연로하신 부모님을 부양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책임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나였다. 그래서 나는 그저 예쁜 여자보다는 믿음직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암울하고 비관적이었던 내 유년의 모든 기억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월남 실향민이었던 아버지와 청상과부였던 어머니가 만나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피난민 수용

소에다 살림을 차린 것이 내 유년의 시작이었다. 이북에 처자식과 어머니를 남겨두고 잠시 피신하려고

남에 왔다가 못 돌아간 아버지와 딸 하나를 데리고 개가를 한 어머니의 결혼생활은 늘 파열음이 나는 불

협화음이었다. 어머니는 화병을 다스린다며 마흔 살이 좀 넘어서부터 항상 술에 취해 살았고, 삶의 기반

을 다 북에 두고 온 아버지는 장사수완도 없고 기술도 없어서 우린 언제나 가난했다. 가난과 가정불화가

지속되는 속에서 나는 삶에 대한 어떤 의욕도 가질 수가 없었다. 내게 있어서 집은 따뜻한 보금자리가 아

니라 아무 것도 꿈꿀 수 없는 늪과 같았다. 발버둥을 치면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그 지겨운 늪에서 어

떻게든 탈출하고 싶었다. 부모님과는 전혀 다른 밝고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무의식적

인 바람의 표현으로 나는 매몰차게 춘선이를 버리고 희재를 택했다.

   부모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나는 철저히 희재가 되기를 고집해서 결혼을 할 때도 ‘신부 김

희재’가 했고 모든 사회생활이나 교회에서 김희재로 통했다. 너무도 완벽하게 김희재로 살았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김춘선이란 이름이 있는 줄도 모르고 컸다.

   내가 춘선이란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단지 주민등록증이나 면허증 같은 신분증을 볼 때, 은행에

서 통장을 만들 때, 병원에 입원을 할 때뿐이었다. 그럴 때도 나는 춘선이란 이름에 얼마나 낯설고 부끄

러워했는지 모른다. 사실, 근 30여년을 내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 때가 많았다. 그렇게

나는 춘선이란 이름과 함께 내 유년의 기억을 애써 지워버렸던 것이다. ‘선택적기억상실증’ 환자처럼 내

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암울하고 어두운 유년기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내가 원하던 밝고 희망차고 매사

에 긍정적인 삶을 향해 절대로 뒤를 돌아보는 일없이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려온 것이다. 얼마나 지독하

게 예전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구축하려 애를 썼는지 춘선이는 현재의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올해가 여고 졸업 30주년을 맞아 홈커밍을 하는 해라며 정말 오랜만에 동창들과 연락이 닿았다. 고등학

교 공식 홈페이지에서 나를 춘선이라고 부르며 옛 이야기들을 퍼내어 주는 친구들을 만나면서부터 나는

잊고 있던 유년기의 나를 다시 찾게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만치 전에 그리도 싫어했던 춘선이라

는 이름으로 불러주는 사람들이 고맙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옛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사람의 감정이나 기억은 절대로 용해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침전

되어 바닥에 깔리는 성질이어서 어떤 계기가 주어지면 마치 흙탕물 뒤집히듯이 뒤섞여 나타남을 경험했

다. 또 내가 지워버리고 싶다고 해서 있던 일이 없어지지 않음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버리고 싶

어 했던 그 유년기가 사실은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가장 진한 거름이었음도 알았으니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고야 너무도 길었던 사춘기적 방황을 마침 하는 모양이다.  

  친구들이 나를 춘선이라고 부르는 순간, 깡그리 지워버렸던 옛 기억과 함께 내 안에 쪼그리고 움츠려

있던 유년의 내가 이 때다 하고 활개를 치며 튀어나왔다. 정말 신기하게도 친구들이 내 이름을 불러 주

니 내가 잃어버렸던 진짜배기를 다시 찾은 느낌이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줄 때 나는 그에게로 다가

가 꽃이 될 수 있음을, 그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음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희재’도 좋고 ‘춘선’이도 좋다.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내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음이 바로 내가 누릴 수 있는 복 중의 가장 큰 복임을 옛 친구들을

통해 여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