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쓴 꽁트들을  버려두기 아깝고 하여 바람 쏘일 겸 다시 읽어보니 격세지감이 느껴집니다.
그러고  보니 한 8 년쯤 전에 쓴 글인 것 같군요.  참으로 빨리도 변화하는 세상이 글의 소재에서
확연히 보이는군요. 마치 19세기에 쓴 글처럼....너무나 빠르게 변화해가는 세상이 다소 두렵습니다.


                                             비밀번호


생년월일, 학번, 군번, 결혼기념일, 옛날 전화번호 따위 심증이 가는 네 자리 수 번호들을 일일이 입력해 보았지만 모두가 허탕이었다.

“잘못 눌렀습니다.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눌러 주십시오.”

번호를 누를 때마다 전화기 속에서는 똑같은 전자음성이 되풀이 되고 있었다. 벌써 오후 세 시니까 무려 여섯 시간 동안이나 헛수고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여섯 시간이 문제가 아니었다. 심여사는 어떻게든 남편의 무선 호출기의 비밀번호를 알아내야만 했다. 칼을 뺐으면 찔러라도 봐야 할 게 아닌가.

‘자, 이제 어떻게 한다?’

속이 상한 나머지 갈증이 났다. 냉수를 반 컵쯤 들이킨 뒤 소파 깊숙이 몸을 묻었다. 등에 와 닿는 소파의 푹신한 감촉이 긴장해 있던 심여사의 마음을 다소 눅여 주는 듯싶었다. 심여사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이구, 뭐, 이 나이에 족쇄 찰 일 있나? 그런 걸 왜 귀찮게 차고 다녀?”

그 흔해 빠진 무선호출기란 것에 관하여, 석 달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냉소적인 입장을 취하던 심여사의 남편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떤 속내로 속칭 ‘삐삐’라 불리는 그 물건을 착용하고 다니기로 마음을 바꿨는지 심여사가 궁금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업무상 필요하게 되었어. 부서가 바뀌었잖아.”

누가 뭐라지 않았음에도 그는 머쓱한 표정으로 자신이 그 흔해 빠진 정보통신 매체의 새로운 사용자가 되었음을 심여사에게 고백(?)했었다.

“잘됐네. 나도 이제 삐삐 칠 데가 생겼잖아!”

심여사도 은근히 좋아했다. 요즘 세상에 시대 조류에 뒤져서 좋을 것이 뭐란 말인가.

“쓸만 해. 메모리 기능이 있어서 나같이 건망증 있는 사람에겐 필수야.”

사용 개시 후, 일주일이 채 안되었을 때 남편은 이런 말을 하며 만족해 했다. 그러니 너도나도 그것을 차고 다닐밖에.... 하긴, 대학 1년생인 아들놈 말대로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인가 ‘삐삐’ 안 차고 다니면 간첩의 혐의를 받는 세상이 되어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심여사의 남편처럼 오히려 삐삐를 사용하면서 혐의를 받게 되는 경우도 있는 법이었다.

어느날 밤, 삐리릭삐리릭 남편의 허리춤에서 그놈의 신호음이 울렸고, 그러자 아내 몰래 누구와 통화를 하려는지 남편이 심여사에게 담배를 사오라며 슈퍼에 심부름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당장 그날부터 심여사가 남편을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 정도라면 심여사의 아량으로 모른 체 참아 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아침에 잠에서 깬 직후의 일이었다. 남편에게, 전에 없던 버릇이 생긴 것인데 그것은 눈꼽도 떼기 전에 남편이 전화통에 매달려 있는 일이 었다. 누구와 통화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아무 말 없이 다만, 흘러나오는 어느 누군가의 음성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었다.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그러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심여사는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도대체 아침마다 그게 뭐하는 짓이예요?”

보다 못한 심여사가 어제 아침엔 이렇게 퉁을 놓았는데, 그러자 그는 ‘쉿’하는 단 한마디로 그녀의 참견을 막아버렸었다.

심여사는 철저히 소외되는 자신을 느꼈다. 밤새 누가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내오는 것인지, 쉰 나이가 내일 모레인 남편 최준식으로 하여금 그토록 몰두하게 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지, 심여사는 자신이 제외된 호출기 속의 세상에 대하여 질투가 나고 부아가 치밀었다. 20년 가깝도록 서로 믿고 의지하며 금슬 좋게 살아왔던 부부였다. ]

그런데 지금 남편은 심여사를 따돌리고 삐삐 소리를 내는 그 조그만 플라스틱 상자 속에다 심여사와는 상관 없는 어떤 별도의 삶을 꾸리고 있는 중이었다. 궁리 끝에 어제는 이동통신의 고객센터로 비밀번호에 대한 문의를 했다가 ‘가입자 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보기 좋게 거절도 당했었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0부터 9까지의 열 개의 숫자로 조합하여 만들어 질 수 있다는 만 개나 된다는 네 자리의 숫자들을 무작정 일일이 입력해 보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잖은가.

‘자,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한담?’

심여사는 암담한 마음으로 죄 없는 전화기만  노려 보았다. 그러자 심여사의 강한 시선에 전화기가 놀랐는지, 그때 불현듯 때르르릉.... 때르르릉..... 전화벨이 울렸고 수화기를 집어들자 남편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뭘 깜빡 잊어서 그러는데 말야, 내 책상 위에 메모용 달력 있잖아? 거기 보면 ........”

심여사는 남편의 요구대로 달력에 메모된 새로 나온 허리 운동기구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뭔가에 이끌리듯 깨알 같은 글씨로 빼곡이 메모가 되어 있는 달력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그러자 어느 순간 눈에 번쩍 띄는 글자가 보였다.

“7월 11일 삐삐 구입.”

그리고 그 옆, 7월 12일의 날짜에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네 자리의 숫자가 메모되어 있었다. 그냥 메모된 것이 아니라, 잊을까봐 그랬는지, 그 터무니 없는 숫자를 괄호까지 써가며 정중히 메모를 해 놓은 것이었다. 아니, 그냥 괄호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 숫자가 무얼 말하는지 단서까지 적어 놓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1308-우리집 홋수) 이렇게 말이다.

심여사의 가슴에서 ‘쿵’소리가 났다.

‘이것이다.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미련퉁이 같으니라구, 아무리 건망증이 심하다고 해도 자기집 홋수를 잊을까봐 달력에 메모를 해 놓는 바보가 어디 있단 말인가?’

쾌재를 부르며 심여사는 확신에 차서 1,3,0,8 천천히 네 자리의 숫자를 누르자 거짓말같이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한 개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메시지 청취를 원하시면 1 번을.......”

드디어 비밀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날 찰나였다. 심여사는 숨이 막힐 것 같은 흥분을 누르며 남편이 하던 모습 그대로 수화기에 귀를 바짝 붙였다. 그러자 예상을 깨고 여자의 음성이 아닌 남저의 탁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나, 최준식은 오늘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이래봬도 아직은 용기와 지혜를 잃지 않았다. 나를 밀어 내고 득세하려는 나쁜 기운에 절대로 밀려나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나 최준식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점점 더 좋아질 것이다.”

남편이 전화기 속에서 혼자 절규하고 있었다.

베란다 창 너머로 한 점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끝)



                                             *요즘 젊은이들이 '삐삐가 뭔지나 알까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