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영주권이 나왔다.
아니 영주권 진행이 다 되었으니 여권을 보내라는 공문이 왔다.

그런데 참 느낌이 허탈하다.
공문이라는 것이 워낙 딱딱한 문체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있었지만...

첫문장을 그대로 해석하자면 "진행되고 있는 영주권이 다 되었다,그러니 여권을 60일 이내로 보내라."
였다.

아니 그동안 수고했다라던가, 협조해주어서 고맙다라고 하면 공문의 품격이 떨어지나...

공문을 읽어내려가며 나는 그동안 이 영주권을 준비하기 위하여 보낸 시간들이 하나 하나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2001년 눈 내리는 2월 중순 ,
캘거리 공항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우리의" 역사적 사명"은  어머니 영주권 만들기였다.

대한민국처럼 부모님이 부양가족으로 포함되지않는 이 캐나다에서는 자식인 우리들이 이 나라에 얼마의 세금을 내느냐에 따라  스폰서의 자격이 결정되는 것이다.

오던 첫 해에는 영어학교 다니느라 한 해를 보내고...
다음 해인 2002년 부터 풀타임으로 일을 하면서 스폰서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정부에서 원하는 일정액의 소득을 맞추는 것이었다.
남편과 내가 모두 지금처럼 풀타임으로 일을 하면 그들이 원하는 일정액수에  도달이 되는 계산이 나왔다.
그 한해를 열심히 일하고 2003년 봄, 우리는 스폰서 서류 만들기에 들어갔다.

변호사를 통하면 빠르긴 하지만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하였다.
이제부터 발로 뛰는거다.
다행히 내가 다운타운에서 일을 하니 정부건물이 가까웠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모르는 것들은 물어보기도 하고  또 먼저 신청했다는 사람들에게 알아보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줄이 너무 길어서 기다리다가 점심시간 다 놓치고 "쪼르륵" 거리는 배를 잡고 다시 돌아가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스폰서 서류를 보낸 지 10여개월...
너희는 스폰서로서의 자격이 인정되니 이제부터 이민서류를 만들 수 있다는 허가서가 나왔다.

다시 시작이다.
스폰서 서류는 이민 서류에 비하면 정말 간단한 것이었다.

이민서류에는  정말 요구하는 것이 많았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부모님 장례날짜까지 적도록 되어 있던 것이다.

서류를 보내고 1년이 넘도록 아무런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단지 이민 사무소에서  이민 서류를 접수하였고 순서에 따라 처리 할 것이니 기다리라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흔히 공산주의 사회를 "철의 장막"  "죽의 장막"이라 부르는 것처럼 그 때의 나의 느낌이 마치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는 듯 하였다.

기다림에 지쳐 가고 있던 2004년 봄이던가...
드디어 건강검진이 나왔다.

그러나 첫번째 검진에서 이상이 발견 된 어머니는 다시 재검을 해야만 하였고, 지난 봄에는 1년이 지났으니 다시 검진을 해야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어머니의 짜증이 점점 심해만 가는 중에 신원조회를 요구하는 서류가 도착하였다.

언젠가 들은  말이 기억났다.
"어머니, 신원조회 서류를 요구하는 것을 보니 이제 서류가 한국 대사관으로 보내졌나보네요."
"그리고 여기 공문에도 마무리 중이라고 하네요."

뭔가 조금씩 희망적인 느낌이 들었다.
신문에 발표되는 기사에도 그 동안 적체된 초청이민자의 수를 줄이기 위해 정부에서도 올해 안으로 많은 노력을 한다 하고...

유난히 이 곳 캘거리의 겨울이 길어서 노인들에게는 정말 지루한 계절인데...

"이 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 어머니 영주권 나오게 해주세요" 하며 드린 기도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우리 주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 날, 그 날은 9월 20일, 나는 잊지 못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