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이야기를 아세요?


                                                                                                         김 희재



   생각이 팔자인지 아니면 팔자가 그래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이 오십이 다 된 지금까지도 나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늘 어딘가로 떠나는 꿈을 꾼다.

생각해 보면 어느 한 순간도 나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 싶어 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분명한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면서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했다. 마치 집시처럼...

  그래서 군인의 아내가 되었을까?
언제든지 떠날 수 있게 보따리를 풀지 않고 살아야 하는 군인의 고달픈 현실이

아무데도 정착하지 않으려는 내 정서와 맞아서 불평 없이 살았는지도 모른다.
남편과 나는 누가 소개를 한 것도 아니고 맞선을 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팅에서 만난 파트너도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숙명적으로 군인의 아내가 되어야 했기에 그가 나를 찾아내었다고나 할까?

아니다.

잘 생각해 보니 내가 군인의 아내가 될 수 있게 중매쟁이 노릇을 한 사람이 따로 있었다.
오늘은 그 사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아주 오래 된 잠시 스쳐 지나간 풋사랑 이야기를..... 

   내가 대학교 1학년 겨울의 일이니까 벌써 30년 전 일이다.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날이었는데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관생도들의 귀향파티를 하는데 짝이 없는 생도 두 명이 급히 파트너를 구한다고 했다.
한 사람은 보통 생도이고 한 사람은 며칠 후에 유학을 떠나는 생도인데

둘 중에서 누구를 선택하든지 그건 내 맘이라고 했다.

  귀향파티라고 해야 맥주 집을 통째로 전세를 내서 파트너와 함께 춤도 추고 간단히 맥주나 마시며 노는 자리였다.

미팅을 하거나 남자를 사귀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내가 거기 갈 마음을 먹은 것도

며칠 후면 떠날 생도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굳이 관계를 지속하지 않아도 되는 단 하루만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무런 부담 없이 친구를 따라 나서게 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의 파트너가 되어 낯선 사람들 속에 끼어서 놀기에는 내가 너무 숫기가 없었다.
게다가 알고 보니 그 파티는 곧 떠나 갈 생도를 위한 송별의 자리여서 졸지에 나는 주인공의 파트너가 된 것이었다.
이리저리 인사를 하러 다니느라 바쁜 파트너와는 달리 나는 그저 한 구석에 앉아서

언제 빠져나가야 덜미를 잡히지 않을 수 있을지 탐색만 하고 있었다.

괜히 왔다는 후회가 슬슬 밀려왔다.

   그런 내가 딱해 보였는지 파트너가 내게 나가자고 했다.
다들 흥이 올라 있어서 우리가 나가는 걸 빤히 보면서도 아무도 잡는 사람이 없었다.
어둡고 답답하던 실내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니 쨍한 겨울바람이 더없이 상쾌했다.


"집이 어디세요?"
"송림동이예요"
"제가 다시 들어가 봐야 하거든요. 친구들이 기다려서요.
동인천역까지만 모셔다 드릴게요."

   잠시 걸어가며 전송을 하고 나면 영영 만날 일이 없는 그에게 무슨 맘이 들었는지 나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해 주었다.

밤 열두시가 지나면 모든 것이 다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신데렐라와 왕자의 시한부 사랑이야기를

그는 전혀 모르는 것처럼 열심히 들었다.

  그렇게 시작을 한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갔다.
마치 장난감 병정들처럼 앞만 보고 걸어가면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내가 그에게 “신데렐라 이야기를 아세요?” 라고 던졌던 엉뚱한 첫 물음뿐이다.

  아무튼 당일치기 파트너를 동인천 역까지 데려다 주며 신사도를 실천하려고 했던 그는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파티장으로 곧장 돌아가지 못했다.

쨍하게 추운 날씨에 볼이 꽁꽁 얼고 쉴 새 없이 입김을 하얗게 뿜어내면서 나와 함께 답동에서 송림동까지 걸었던 것이다.

"그 쪽이 며칠 후에 떠나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나는 절대로 파트너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오늘 신데렐라 흉내를 내고 싶어서 거기 갔는지 몰라요.
덕분에 즐거웠고요, 안녕히 가세요."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서 내가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제가 며칠 동안 집에 머무를 거예요.
떠나기 전에 다시 한번 만나고 싶은데 연락을 드려도 될까요?"

"아니요, 신데렐라가 탄 마차가 호박으로 변해버리고 나면 초라하죠.
그냥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간직하는 게 좋아요.
오늘 정말 감사해요. 안녕히 가세요."

그러고는 휙 돌아서서 골목으로 막 뛰어 들어갔다. 
그는 나를 잡지 않았다. 
나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내가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본 기억이 없었다.
그저 멀찍이 떨어져서 걷는 옆얼굴만 보았을 뿐 마주 바라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같이 손을 잡고 걷기는커녕 헤어질 때 악수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이름조차 불러보지 못했다. 그저 그쪽이라고만 지칭했을 뿐.....

그런데, 그렇게 헤어진 그가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지기는커녕 오히려 내 마음속에다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친구 편에 전해 듣고 슬퍼하기도 하고,

내 주소조차 모르는 그에게서 편지가 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관한 모든 것이 아름답게 포장이 되어

나중에는 길에서 우연히 스치는 생도만 보아도 반가운 마음이 되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열아홉 살 난 여자애의 감성은 그렇게 허상을 짓고 허물며 여물어 갔다.
그 겨울이 가고 다음 겨울이 오기 전에 나는 그를 자연스레 잊어버렸지만

생도에 대한 좋은 인상은 내 마음 속 아주 깊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후일에, 그런 내게 다른 생도가 이번엔 정말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다가왔다.

애초부터 생도에 대한 호감을 밑자락에 깔고 있던 나는 제복을 입은 사관생도와 정말로 열렬히 사랑을 했다.
6년 넘게 밀고 당기며 주변의 친구들이 다 부러워 할 만큼 진한 연애를 한 끝에 군인의 아내가 되었으니
그 때 만났던 그 파트너는 내게 중매를 서도 톡톡히 잘 선 셈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그 때 신데렐라 이야기를 해 주는 바람에

그와 걸으며 짧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그 추억 덕분에 후일 별다른 거부감 없이 내게 다가 온 사관생도를 내 마음에 소중한 사람으로 받아 들였고,

사랑 하나면 모든 것을 다 감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서

초년고생이 너무도 뻔한 군인의 아내가 되는 것을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 잠시 스쳐간 그 만남도

내게 가장 어울리는 인생의 틀을 잡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 중의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그 파트너 덕분에 나는 내 생애 가장 탁월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늘 어딘가로 향해 떠나기를 갈망하는 집시 같은 속성을 지닌 내가 가기에 가장 적합한 길을

나와 가장 어울리는 최고의 사람과 함께 걸어왔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