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도 5기 문집에 실린 글입니다


      <이모작을 위하여 >


태풍 우쿵이 북상한다는 진로를 그대로 따라 올라가게 되어 버렸다.
새벽 뉴스로는 오후에 부산에 상륙해서 울산, 포항을 거쳐 동해로 나갔다가 다시 울진에 상륙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우린 6시에 부산을 떠나 포항으로 가고 있었으니까!

예정된 스케쥴이긴 했지만 일행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목적지가 태풍이 직격한다고
하는 바닷가 별장이라니..........참........

집에 오시는 손님을 맞이하듯 비오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하긴 우리가 떠날 때까지는 비가 오지 않았다. 전 같으면 정말로 짜증나고 불안한 일이었는데 이상하게 그렇지가 않아서 내심 “내 내면의 내공이 깊어졌나?” 하며 흡족해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뿌리기 시작한 비가 그런 스스로의 기대를 무참히 깨어 버리고 말았다. 속으로 얼마나 쫄아 있었던지........
게다가 잠깐씩 나타나는 짙은 안개지대- 아마 이런 구간이 길어졌으면 불안한 내 속내가 그대로 표출됬겠지만 다행히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걱정했던 경주에서 감포까지의 길은 오히려 아늑했다.
높은 산이 바람을 막아줘서 평온하고 관리가 잘된 산길은 환상적인 풍경에서 언제나 감탄과 함께 일어나는 벼랑길의 스릴마져 없애줬다.

대신 그때부터 묵직한 두통이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무지 긴장하고 있었던 몸이 풀리는 증세인 모양이다.

취미도 별로 없는 남편에게-흔히들 겪는다는 정년 후유증 없 이 모처럼 갖게 된 여유로움을 즐기게 해주고 싶어  궁리를 하고 있는 터에 아끼는 제자가 포항 구룡포 바닷가에 작은 집을 하나 지었다고 하면서 열쇠를가지고 왔다.
주말에는 자기들이 주로 가지만 주중에는 항상 비어있다고 언제든지 가시라고 하면서.말이다
물론 아직은 우리도 주말 밖에 시간이 없지만 사실 수업시간도 적고 방학이 있으니까!
그사람은 선생님의 정년을 염두에 두고 나름대로 염려를 해준 것이다.


아침 9시 도착하고보니 역시 비바람이 세차서 움직일 수도 없고 하루 종일 뭘하고 지낼 지가 걱정스러웠다.
남편은 가져 온 벽시계를 설치하고 (올 때마다 뭐가 필요한가를 점검해서 가지고 온다)  남의집 별장을 제집처럼 요기조기 손보는 동안  난 준비해 온 재료로 점심 식사준비를 했다. 밥을 하고 된장찌개를 끓이고

TV도 컴퓨터도 없는 곳이라 가져 온 카세트 라디오가 효자노릇을 톡톡히 한다.

성난 파도가 넘실거리는 험악한 바다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FM음악을 들으니 무슨 영화가 따로없다.

갑자기 벽시계의 추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면서 순간 이 집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지난 번에 왔을 때  읽을꺼리가 전혀 없어서 엄청 무료했기에(사실 읽을 시간도 없었지만
없다는 게 왜 그리 불편하게 느껴지던지) 챙겨 온 몇권의 가벼운 책과 며칠분의 신문.
그리고 시계추의 움직이는 소리가  집에 생명을 넣어준 모양이다.

집주인이 지난 주  메일을 보내왔었다.
텃밭 오이나무에 오이가 2개 열렸는데 한개는 자기들 4식구가 먹고 한개는 우리를 위해서 남겨뒀으니까 꼭 잡수시라고!

세찬 비바람을 무릅쓰고 집 뒤 벼랑끝 텃밭에 가보니 (한변의 길이가 1미터쯤 되는 손바닥만 한 세모난 텃밭) 난장판이 되서 오이는커녕 오이나무도 못찾겠고 몇 개 열린 고추도 거의 다 바닥에 떨어져 있길래 주워왔다.
입에 넣으니 얼마나 향긋한지..........

결국 인생도 이런 게 아닐까?
모든 것이 다 있어도 이 생명을 넣어주는 뭔가가 있을 때야 비로서 가슴이 뜨거워지고 감동이 물결치니 말이다.


요즘 우리의 화두는 “인생의 이모작!”

순호가 회장이 되면서 보내오는 소식지의 맛깔스러움에 감격하면서 권해주는대로 들어가 본
인일 홈피가 발단이었다.

글사랑 코너에 올라 온 12기 후배의 “이모작 씨뿌리기”라는 글이 엄청난 호응을 얻으며  그동안 우리나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고 있던 노년에 대한 불안감이나 그동안 오로지 헌신할 뿐이었던 가정에서의 자기상실감을 정면으로 대응해서 제2의 인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견이 중의로 되었다.

엄청난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봄날이라는 수다방이 생겨났고 그 속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동안 꽁꽁 감춰왔던  속내들을 털어 놓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삶에 대한 용기가 생겼다.

나도 그동안 접었던 피아노 이야기를 하게 됬고 한  후배의  “언니! 신청곡 있어요!” 라는 말한마디가 전류처럼 내 가슴을 자극했다.

신들린 듯이 연습을 하고 봄날 모임에 연주를 하면서 우리의 이모작 운동은 뜨거워져갔다.

생각해보면 난 청중을 의식하고 피아노를 연주해 본 적이 없었던 것같다. 시험이나 콩쿨, 심지어 발표회까지도 청중이 아닌 나자신과 선생님의 기준에 열중했을 뿐이었다..

완성된 음악만 음악이라는 편견 때문에 연주란 언제나 부담스럽고 미흡할 뿐이었으니까 음악을 포기하게된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얼떨 결에 중매로 결혼을 하고 객지 생활을 해오면서 나의 비어있던 내면은 갈등과 전쟁으로 채워지게 되었고 10년동안의 피아노 없는 생활을 통해 삶에서 피아노가 없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 나는 돌아와서 그저 시간만 나면 연습을 해댔다.

연습을 방해하는 요소들은 다 나의 적이됬고 갈등의 씨앗이 됬다.
당연히 주위 사람들에게 있어서 피아노는  기쁨은커녕 불편함을 주는 주인공이고 시끄럽기만 한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어느날 비창 소나타의 2악장을 연습하고 있는데 중학생 장남이 들어오면서
“엄마 그런 곡도 연습하네”하면서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런 곡이라니? 이건 클래식 피아노의 교과서같은 곡인데?
장남은 클래식을 편곡해서 경음악으로 만든 걸 듣고 그게 유행가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난 내 피아노가 남을 즐겁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그렇다면 우리 가족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곡들을 연습하지 하고 시중에 나와 있는 세마 클래식이나 영화음악 악보들을 있는대로 구해서 쳐댔다.

가족들의 호응도는 놀랄 만한 것이었고 난 나의 음악관이 서서히 바뀌어 가는 걸 실감하게 됬다.
‘남을 기쁘게 해주는 음악의 힘’

우여곡절 끝에 교회 반주를 시작하면서 그 감동은 더해갔다
교회 목사님 이하 성도님들은 나만 보면 은혜스럽다고 칭찬해주시고 !
찬양연주하고 있으면 앞에서 눈믈을 줄줄 흘리시는 분들을 보면서 그동안 남다르게 특별한 재주를 갖게 해주신 축복에 감사하고 이제부터라도 세상에 갚아 가야겠다는 철든 생각도 들게 됬다.

전문 연주가들처럼 공부하지도 못하고 그냥 가정 생활 속에서 쳐대는 미흡한 연주에 박수쳐주고 게다가 용기까지 얻는 다는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기쁘게 피아노를 연주하리라고 결심하게됬다.


친구들아 나 잘하고 있지?
경선이가 이걸 글로 써보내라는데 왜 하던 말도 마이크 대면 막하듯이 갑자기 탁 말문이 막혀서 혼났어.
그래도 펑크내면 총무 일하는 데 힘들 것 같아 좀 챙피하지만 그냥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