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내 육아일기는 어디 있어요?"

지하실 정리를 하면서 제 오빠의 육아일기를 발견한 작은 아이가 내게 물어왔다.
그 때는 엄마가 일기를 쓸 만큼 여유있던 상황이 아니었노라고 궁색한 변명을 하여본다.



지난 주에 지하실 공사가 모두 끝이나서
이제는 꺼내어 놓은 물건들을 다시 제 자리에 정리하는 일이 남은 것이다.

박스마다 수북히 들어있는  옛날 물건들이 전쟁터의 포로들 처럼 지친 모습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먼지 수북히 쌓인 우리 부부의 초등학교 앨범부터 아이들 웃음 소리가 툭 하고 튀어나올 것 같은

두 아이의 유치원 앨범이  자줏빛으로 앉아있다.

"엄마. 난 돌 잔치에서 무엇을 잡았어요?"
"사진에서도 보이지 않니?  연필을 잡았지...... 아마......"
"역시 나는 나야"

딸아이의 장난기어린 웃음소리가 사진들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결혼하기 전 데이트를 하던  두 젊은이가 이름모를 꽃송이 아래서 활짝 웃고 있다.

그래 맞아, 약속 장소에서 나는 그 사람를 기다리고 있었고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난 그 이가  야생화 꽃송이를 내게 내밀었었지.
어느 산 계곡아래에는  아직도 풋풋한 풀내음으로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가고 있었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골목길의 환호성도 있었다.

그랬었지, 늘 엄마 젖이 모자랐던 작은 아이는 우유병을 늦게까지 떼지 못하고  산에 가던 그 날도 우유병을 입에 물고 갔었지.

우리 골목 안에서 함께 살던 그 개구장이들......

유난히 의협심이 강해서,  이웃집 친형제들끼리 싸우면 공연히 나서서 의리의 사나이가 되곤했던 아들 아이.....

단발머리에 하얀교복의 증명사진 뒤에는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어느 사진관에서 찍었다는 메모가

적혀있기도하다.

맞아,  그 돌담 옆 한 쪽으로 있던 옛날 문 이름이 홍여문이었었지.



마치 귀순용사의 어색한 웃음같은 새신랑도 있었고  달덩이같은 새색시의 미소도 있다.

너무 긴장한 모습의 결혼 사진을 보며 어느 친구는 내게 말했었지, 북한에서 내려온 귀순용사

같다고......
비뜰빼뜰  고사리 손으로 적어 내려간 일기장 한 뭉치, 방학숙제로  엮어놓은 해양탐사 사진들,그리고 유럽여행을  다녀온 기행문등...

그 곳의 박물관 입장권이며  케이불카 승차권등이 아직도 붙어있는데 이제 대학생이 된 아들아이가

다시 읽어보면서  지금 읽어보아도 재미있다며 익살을 부린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어제 일들처럼  내 마음에는 선명히 남아있는데 이제 나는  나이 오십이라는 고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자신을  바라본다.

사진 들의 색깔이 조금씩 바래가는 것처럼 나의 삶도 서서히 바래어가는 이 느낌을 어쩔 수 없다.

예전에 어느 드라마의 제목이 "아직은 마흔 아홉" 이라는 것이 있었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그 아쉬움이 내 마음에도  아련하게 전해져온다.



옛날의 사진들이 나를 마치 타임머신을 탄 기사처럼  아련한 추억 속으로 데려가더니 "쿵"하는 굉음과 함께 현실의 낭떠러지로 나를 떨어뜨리고는 훌쩍 사라져버렸다.

나는 이제 온 힘을 다하여 이 허무의 낭떠러지에서 기어올라와야만 한다.



아직은 마흔 아홉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