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 한옥 가든


속리산 25번국도, 보은 조금 못 미쳐 왼쪽 논두렁 뒤에 허름하지만
고 가옥으로는 그런대로 품위를 갖춘 한옥 음식점이 있다.
칠십 노인이 주인인 이 집은 주변에서 식당으로 인지도가 있다.

9년 전 남편의 사업 실패로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을 때,
갑자기 서울이라는 공룡 같은 도시에 환멸을 느낀 나는
속세를 버리는 심정으로 그해 여름 속리산 ‘한옥가든’의 주인이 되었다.
남편이 이 지방 사람이라서 우연히 지나다 토속음식을 먹으러 들어 간 것이
이 집을 알게 된 계기였다.

할머니는 나이가 들어 다리가 아파서 도저히 식당을 할 수가 없으니
좋은 사람 소개해 달라고 신신 당부를 했다.
칠십 노인답지 않게 할머니는 꽤 젊어 보였다.
남편과 우스개 소리로, 별장 삼아 와서 지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하였다.
말이 씨가 되었는지 나는 그 집에 오게 되었다.
그 집은 넓은 대청과 방이 5개 그리고 재래식 부엌이 그런대로 현대적 시설을 갖춘,
한번쯤은 들어가 보고 싶은 그런 집이었다.
50대도 주차할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여섯 그루의 보기 좋은 감나무가 있었다.
옛날 사대부집 담장처럼, 제법 긴 울타리와 솟을대문은
한옥가든 간판의 운치를 조금은 받쳐주었다.

10년째 하고 있다는 주방아줌마 한 분만 믿고 겁도 없이
토속음식점 생활을 시작했다.
큰 가마솥에 엄나무를 푹푹 삶은 물에 인삼 당귀 대추 밤을 넣고
한 시간쯤 삶은 토종닭과 오리 맛도 일품이었지만,
마당에 파놓은 지하수로 담근 동동주는
그 일대에서는 맛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얼큰한 버섯찌개와 오징어파전은 또한 그 감칠맛이 좋았다.
먹을 줄만 알았지 밥도 제대로 안 해 먹던 나는
손님들과의 하루하루 일과를 무사히 치러나갔다.
다행히 주방아주머니 음식 솜씨가 베테랑급이라,
음식 맛이 좋다는 소문이 돌아 기존 손님 그리고 서울에서 새 주인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온 손님들로 장사는 그런대로 되었다.
생각보다 시골생활은 나에게 많은 정신적 안정을 주었다.
낮의 피곤함은 저녁의 숙면을 주었다.

시골 손님들의 수준 높은 품위는 어중간한 도시사람들 보다
훨씬 격이 있었다. 시내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였는데도
꽤 지명도가 있는 분들이 자주 오는 손님들이었다.
도시의 찌든 월급쟁이들 보다, 시골 유지들은 훨씬 더 대접받는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넉넉한 인상과 자신 넘치는 매너는 보기에도 좋았다.

풍성하던 감나무의 잎이 지고 난 가을, 아침에 눈을 뜬 나는
감나무 밑에 떨어진 발갛게 익은 감을 줍기에 바빴다.
탐스럽게 익다 못해 쩍 벌어진 감은 입에 넣기가 무섭게 사르르 녹는다.
서너 개 먹고 나면 거뜬한 아침 식사다.
그 바람에 여자로서 황폐해 가던 내 몸과 마음은
얼마나 풍요로움을 찾았는지 모른다.

그해 겨울 대청마루에 앉아 켜켜이 흩날리며 하염없이 내리던 눈을
바라보며 그 정경에 얼마나 놀라워하였던지.
며칠이 가도 녹지 않았던  그 백설 같은 눈밭.
저녁에 잠을 청할라 치면 삭풍이 몰아치듯 매서운 칼날 같은 바람소리는
문풍지 틈으로 들어오는 찬바람과 더불어 겨울다운 겨울을 느낄 수 있었다.

봄이 되자 이름도 알 수 없는 각양각색의 들꽃과 대문 앞에 다소곳이 서서
하얀 자태를 뽐내던 목련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하였다.

계절마다 내 앞에 펼쳐진 그림 같은 풍경들은 영원히 그 곳에 머무르고 싶은
욕망을 주었다.
풋풋한 그 곳의 인심과 자연은 도시의 삭막한 아집과 교만으로 묶여 있던
나의 영혼을 샅샅이 파헤치고 부셔버렸다.

어쩌면 정말로 충청도 아줌마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기본 음식이나 할 줄 알았던 나는 어느새 유능한 요리사가 되었다.
손님이 없을 때의 무료함이 주방아줌마의 일을 거들다 보니
저절로 음식 하는 방법이 눈에 익혀졌다.
이젠 시골 된장찌개는 별 재료 없이도 잘 만들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요리 유학을 온 듯도 싶었다.

간혹, 친구나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 내려와 며칠씩 묶고 갔다.
그들은 오히려 그곳 생활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겨울엔 좀 추웠지만 여름에는 에어컨도 필요 없었다.
시원한 대청마루에 앉아 텃밭에서 따온 풋소추와 상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맛은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독한 고추는 어찌나 맵던지 입안에 모닥불을 피운 것 같았다.
죽도록 울어대는 매미소리는 그 여름 끝나도록 들어야 했다.
밤이면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들과 모기향에도 죽지 않는 모기들 때문에
문짝마다 모기장을 쳤지만, 그래도 시골의 여름밤은 정겨웠다.

한 친구는 자기도 내려와서 살고 싶다고 하였다.
어떻게 시골생활이 그렇게 잘 적용이 되는지 나 자신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집주인 할머니가 왜 그렇게 젊어 보이는지 이해가 되었다.
그곳의 음식은 정갈한 공기와 더불어 완전 무공해였다.
주방아줌마의 손맛은 감히 누구도 흉내 낼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내려 올 때의 그 우울함이나 가슴앓이는 바쁜 생활과 피곤함으로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

가끔 내려오는 아이들과 남편은 그곳 생활에 물들어 가는 나를 신기해하였다.
주말이면 관광객과 가족 나들이 나온 사람들로 식당은 평일보다 더 붐볐다.
손이 딸리면 너나 할 것 없이 일을 도왔다.
힘든 것은 둘째 치고 손님만 많으면 저절로 힘이 났다.

남의 식성을 맞춘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간혹 까다로운 별난 사람도 있었지만 그런대로 손님 수준은 무난하였다.
쉬지도 못하고 심부름만 하다가 아이들이 갈 때면 나는 미안함에
마음아파 하였지만 오히려 아이들은 나를 위로했다.
말없이 우리가족은 어려운 시간을 잘 보냈다.

식구가 흩어져 있다 보니 생활비는 배가 들었다.
음식 장사라는 것이 생각보다는 정말 남는 것이 없었다.
매상이 아무리 많이 올라도 그 다음날 재료비로 거의 다 들어갔다.
인건비 월세 관리비 제하고 나면 내 인건비도 빠듯하였다.
음식 장사 몇 년 하니 남은 건 그릇과 병 뿐이란 말이 이해되었다.
식당해서 돈 벌었다는 건 옛날 말이었다.
온 식구가 모두 모여 다른 사람 안 쓰고 장사를 한다면 괜찮을까?
어쨋거나 남 좋은 일만 시키지 주인은 허울만 좋았다.

할머니에게 월세가 너무 과해 조금 깎자고 하니 그런 소리 하덜 말란다.
시골 인심만큼 주인 인심은 후하지 않았다.
당신도 장사를 해봐서 그곳 실상을 잘 알련만 남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계약 당시시골의 시세를 잘 모르면서
알아보지도 않고 덜컥 계약한 것이 내 실수였다.

그래도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정신적 안정과 건강을 얻은 것만으로
서운한 마음을 접기로 하였다.
식구가 합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아쉽지만 시골생활을 정리하기로 했을 때,
아쉬워하던 그곳 손님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끔 주마등처럼 스치는 그곳은
언제든지 다시 가보고 싶은 나만의 추억이 있는 안식처가 되어 있다.
어쩌면 가장 불행했던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돌아 온
이 현실은 하느님이 나에게 준 특별한 선물이 아닐까?

속리산 ‘한옥 가든’, 이제 그곳은 영원한 나의 고향이 되었다.



글.........안 경자 ('한국문인'에 실린 글)



* Anne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9-10 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