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파국

수정은 잡념을 떨쳐내려고 애를 썼지만 마음속에선 계속 나쁜 감정들이 생겨났다. 스스로도 통제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섭고 끔찍한 것들이었다. 어젯밤 소희와 채팅으로 나눈 이야기들이 끔찍한 악몽처럼 의식을 사로잡았다. 소희에게 상혁과 사귄다는 고백을 들은 후 수정은 밤새 한잠도 자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이 떠올라 미칠 것만 같았다. 비록 고백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얼마나 상혁을 좋아하는지 소희는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잠을 자지 못하고 밤새도록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한 탓에 눈에는 핏발이 섰고 신경은 칼날처럼 예민해져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엄마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수정을 봐도 본 체만 체하고 마치 유령처럼 계속 집안을 돌아다녔다. 집안에 알 수 없는 기운이 흐르고 있다는 걸 수정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탓인지 불안과 초조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질투의 감정이 폭풍처럼 그녀를 휘감아왔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그림이 있었다. 어떻게 왔는지 모르지만 수정은 거실에 걸려있는 ‘므이의 집’ 앞에 서있었다. 그림은 생명력을 지닌 것처럼 수정을 끌어당겼다.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그림 속 초원의 시원한 바람과 공기, 그리고 이국적인 향취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수정은 눈을 감고 그 기이한 감각에 몸을 맡겼다. 바로 그때 그림 속 므이의 집에서 끔찍한 비명과 외침이 들려왔고 수정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림은 그대로였지만 비명소리는 정말로 눈앞에서 들린 것처럼 생생했고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잠시 후 그림 속 ‘므이의 집’에서 여자가 걸어 나왔다. 수정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숨을 멈췄다. 여자는 긴 생머리를 가슴 양편으로 늘어뜨렸고 가끔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는 베트남 전통의상을 입고 있었다.
수정은 여자가 바로 그림 속 집의 주인인 ‘므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림 속 므이가 맨발로 초원을 가로질러 수정의 앞으로 다가왔다. 므이가 수정을 향해 활짝 웃었다. 마치 ‘내게 할 말이 있잖아, 괜찮아. 어서 해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수정이 꿈결처럼 중얼거렸다.
“맞아,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죽여줘. 소희에게 저주를 내려줘. 부탁해, 므이야!”
수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을 열어젖히며 이한과 김 형사가 거실로 뛰어들었다. 이한이 그림 앞에 서있는 수정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어서 그 그림에서 떨어져!”
그제야 수정도 퍼뜩 정신이 들었고 알 수 없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이한이 달려와 수정의 양어깨를 잡고 다그쳤다.
“그림에 대고 뭐라고 빌었니?”
“그... 그냥 난...”
수정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으로 울먹였다.
“괜찮으니까 어서 말해. 아직 안 늦었을지도 몰라. 너 혹시 그림에 대고 다른 사람을 저주해달라고 빌었니?”
두려움에 사로잡힌 수정이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
“소희...”
말을 마치자마자 수정은 울음을 터뜨렸다.
“너 여기 꼼짝 말고 있어.”
이한은 수정을 거실에 남겨놓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소희 집은 그의 집 바로 옆 블록에 있었다. 김 형사도 이한을 따라나섰다. 소희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집안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현관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그들이 안으로 들이닥치자 소희엄마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매달렸다.
“소희가... 소희가...”
“소희는 어디 있습니까?”
“저기...”
김 형사가 먼저 달려가 방문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소희엄마가 소리쳤다.
“문이 안 열려요. 열쇠로 열어도 안 열린다구요! 아이고, 소희야!”
그 순간 방안에서 ‘엄마~’하고 울부짖는 소희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소희엄마가 방문에 매달려 악을 써댔다.
“소희야, 문 열어! 어서 문 좀 열란 말야!”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고 안에서는 더욱 다급하면서도 소름끼치는 비명이 새나왔다.
“엄마, 나 좀 살려줘. 무서워 엄마! 아악~”
“비켜요!”
김 형사가 이한과 소희엄마를 밀치고 몸으로 문에 부딪혔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희엄마는 바닥을 뒹굴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김 형사가 이한에게 소리쳤다.
“이걸로 해봅시다!”
둘은 양쪽에서 소파를 들고 힘껏 문에 부딪혔다. 우직하고 문짝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한 번 더!”
다시 둘이 뒤로 물러났다가 달려들려고 할 때였다. 딸깍하는 소리와 함께 소희의 방문이 저절로 열렸다. 조금 전까지 소름끼치게 심장을 파고들던 소희의 비명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이한과 김 형사는 소파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방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채 방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김 형사가 욕설을 뱉어냈다.
“씹할!”
방으로 달려드는 소희엄마를 김 형사가 황급히 붙잡았다. 소희엄마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김 형사가 그런 그녀를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소리쳤다.
“보지 말아요, 안보는 게 나아요!”
이한은 반쯤 벌어진 문틈으로 방안을 봤다. 방안은 흡사 핏빛 스프레이를 사방에 뿌려놓은 것 같았다. 아직 온기가 남아있을 것 같은 핏방울은 벽지를 타고 계속 흘러내렸다. 김 형사는 발버둥치는 소희엄마를 달래며 경찰서에 지원요청을 하고 있었다.
이한은 감당하기 힘든 공포에 사로잡혀 그 집을 나왔다. 문틈으로 보인 소희의 시체는 아마도 그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아이의 죽음이 모두 자신 때문이란 걸 그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희의 사체에는 왼발목과 오른손목, 그리고 머리가 없었다. 이한이 격한 감정에 사로잡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수정은 다시 그림 앞에 서있었다. 그녀의 몸이 진자처럼 조금씩 좌우로 흔들렸다.
“수정아... 뭐하는 거야?”
이한이 소리쳤지만 수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모든 게 저 망할 그림 때문이야!”
이한이 주방으로 달려가 칼을 집어 들고 그림 앞으로 돌아왔다. 그가 그림을 노려보다가 칼을 고쳐 잡고 막 들어 올릴 때였다. 옆에 있던 수정이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수정아...”
이한이 놀라 돌아보자 수정의 입에서 낯선 음성이 흘러나왔다. 소리는 이한이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의 말이었다. 소리가 점점 빠르고 격렬해져진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놀랍게도 거실에 있는 물건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탁자가 떠올랐고 소파가 떠올랐으며 텔레비전도 떠올랐다.
“수정아, 그러지마!”
이한이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수정의 뒤에서 현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날 속이고 배신했어!”
현경이 바로 앞으로 다가와 흰자위가 드러나도록 눈을 치떴다. 이한은 그녀의 몸을 감고 있는 검은 기운을 볼 수 있었다. 현경이 칼을 든 이한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엄청난 힘이었다.
“현경아, 하지 마. 제발.”
이한이 애원했지만 현경은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던 그 밤에 들었던 아버지 음성이 떠올랐다. 현경이 괴기스러운 소리를 내며 칼을 든 이한의 팔을 들어올렸다. 이한이 두 손으로 칼을 잡았지만 현경의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 칼끝은 점점 그의 목을 겨냥하고 들어왔다. 칼끝이 목에 닿았다는 생각이 들 때 등뒤에서 김 형사가 소리쳤다.
“여기에 정말 므이가 있다면 그만하시오! 방금 달랏교육대학 김영채 교수가 그림을 가지고 베트남으로 급히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베트남에 므이의 초상화를 봉인해 보관하고 있던 법사가 그림을 가져오면 당신의 원한을 풀어주겠다고 했답니다!”
순간 이상한 소리로 중얼거리던 수정이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더니 그 자리에 쓰러졌고 거의 동시에 허공에 떠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현경 역시 밑으로 꺼지는 것처럼 폭삭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한이 아직도 공포에 사로잡힌 눈으로 김 형사를 돌아보자 그가 말했다.
“저주를 풀려면 그림을 베트남으로 가져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