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저주받은 그림

경찰에서는 약 2주간의 조사 끝에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관계를 그대로 수긍하고 수사를 종결지었다. 그리고 당시 사건을 담당해 이한을 조사했던 김재환 형사가 무슨 일인지 직접 집까지 찾아왔다.
마침 집에 아무도 없어 이한은 형사를 거실로 불러들여 얘기를 나눴다. 형사는 처음 경찰서 조사실에서 봤던 날카롭던 모습과는 딴판으로 달라져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간단히 수사종결에 대한 결과를 전하고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저도 그때 하지 못한 얘기가 있습니다.”
“하지 못한 얘기라니요?”
“제가 지난번에 그랬죠? 그 그림 예전에 본 적이 있다고.”
그렇게 입을 연 형사는 그림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세 건의 살인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 희생자의 왼쪽발목과 오른손목 그리고 머리가 사라지고 사방으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사람이 한 짓이라고 보기 어려웠어요.”
“그들의 죽음이 그림과 무슨 상관이죠?”
“살인사건이기 때문에 주변인물에 대한 조사를 했는데 피살자와 원한관계에 있던 용의자가 그 그림, 즉 ‘므이의 집’을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본 세 건의 살인사건 중 두 건에서 그와 같은 사실관계를 확인했습니다. 첫 번째 희생자는 자기 오피스텔에서 피살당했는데 그녀는 유부남을 사랑했더군요. 저희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부인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 거실에 ‘므이의 집’이 걸려 있었어요. 그리고 다시 몇 년 후 같은 그림을 비슷한 사건의 또 다른 희생자와 연적관계에 있던 여자의 집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희생자는 김희수라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친구인 이정인의 애인을 몰래 만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애인을 빼앗긴 이정인을 조사하러 갔더니 놀랍게도 그녀의 방에도 그 그림이 걸려있더군요.”
이한은 한기를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럼 그 사건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림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들이 한 짓인가요?”
“아니요, 혹시 몰라 그들을 추궁했더니 나중에는 단지 마음속으로만 저주해달라고 그림에 대고 빌었다는 겁니다. 당시 전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림에 대고 빌었다구요?”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당사자들은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저희 집하고는 상황이 좀 다른 것 같은데요. 저희 증조부나 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물론 앞서 말한 끔찍한 신체훼손과는 양상이 다르죠. 하지만 앞서 말한 두 사건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이라니요?”
“살인의 동기가 모두 질투에서 비롯됐다는 겁니다.”
이한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의부증 때문에 남편을 살해한 경우, 연적관계에 있는 여자를 저주한 경우 모두 그 동기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끼어들어 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그림에는 질투로 살인을 부르는 저주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우습죠? 명색이 형사라는 작자가 저주니 뭐니 하니까. 하지만 그 살인의 현장을 봤다면 이해하실 겁니다.”
이한은 알 수 없는 열기에 휩싸여 차가우리만치 차분한 형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형사가 은근하게 말했다.
“그림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요, 아직은...”
“불태워버리십시오!”
이한이 깜짝 놀라 돌아보자 이글거리는 형사의 눈이 그를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저주가 정말 맞다면 부인이 이한씨를 죽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든가.”
현경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에 이한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재환이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일테면 그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전화 주십시오.”

++++++++++

이한은 경찰조사가 끝나고 처음으로 아버지 집을 찾았다. 집안에는 선명한 핏자국을 비롯해 끔찍한 살인의 흔적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 현장의 한가운데 아버지가 평생 찾아다녔다는 그림 ‘므이의 집’이 걸려있었다. 석양에 물든 초원과 므이의 집.
정말 이 그림에 저주가 담겨있는 것일까.
이한은 마치 그 안에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혹에 휩싸여 뚫어지게 그림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려봐도 그림은 그림일 뿐이었다. 명색이 추리작가라는 작자가 형사의 말에 겁을 먹고 조상의 소중한 그림을 불태운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정말 저주가 있다면 오히려 밝혀야하지 않을까.
묘한 건 그림을 보면 볼수록 점점 그 안으로 빨려드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었다. 초원의 훈훈한 바람이 귓불을 스치는 것 같고 석양은 그림 밖까지 뻗어 나와 그의 얼굴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이한은 그림 속의 집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은 느낌까지 받았다. 그를 상념에서 깨운 건 핸드폰소리였다. 현경이었다.
“왜 아직도 안와? 저녁 먹을 시간인데.”
“저녁? 지금이 몇 신데 벌써 저녁을 먹어?”
그러면서 시계를 보던 이한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간이 저녁 7시가 다 되었던 것이다. 그는 뭔가에 홀린 기분으로 그림을 돌아보았다.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는 자그마치 6시간이 넘도록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셈이었던 것이다.

++++++++++

이한은 아버지 집에 있던 그림을 그의 집으로 가져왔다. 붉게 이글거리는 석양. 황홀한 색채로 초원을 물들이는 저녁풍경. 그리고 그림의 한쪽 구석에 소리 없이 자리하고 있는 한 채의 집. 이제 ‘므이의 집’은 그의 집 거실에 걸려있었고 이한은 언제든 그림을 볼 수 있었다.
므이.
대체 누구의 이름일까.
증조부는 왜 베트남까지 가서 므이도 아닌 므이의 집을 그린 것일까.
무수한 의혹들이 비로소 가슴 한가운데서 뭉게뭉게 피어올라 심장을 뜨겁게 두드렸다. 그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이한은 눈을 감았고 이내 생각은 100여 년 전으로 빠르게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며칠 후

오늘도 2층 서재에 들어간 이한은 밤이 늦도록 방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시아버지 집에 있던 물건들이 집에 들어온 후부터 이한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처음엔 집안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에 대한 충격 때문이려니 했는데 딱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마주앉아 있을 때조차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생각이 다른 곳에 가있는 것 같았다. 현경은 그런 시간과 검정을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현경은 이한과 자신 사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높고 두꺼운 벽이 가로놓여있다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벽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녀는 짐작도하기 힘들었다.
이한에게 신경을 쓴 탓인지 갈수록 신경은 예민해지고 불안해졌다. 이유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드는 우울증도 그녀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밤이 되면 불안과 외로움은 더욱 커졌다. 적막한 집안 분위기에 짓눌린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고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 한 시선이 하루 종일 느껴지기도 했다.
심지어 어제는 그 시선이 너무나 생생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보기까지 했다. 묘한 건 그럴 때 뒤를 돌아보면 영락없이 거실에 걸려있는 그림이 시야에 들어온다는 사실이었다. 이한의 말로는 증조부의 그림이라고 하는데 이상하게 현경은 보면 볼수록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현경은 혼자 텅 빈 거실 소파에 앉아 그 기분 나쁜 그림을 마주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고 기분은 오늘따라 더욱 끔찍하게 가라앉았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견딜 수 있을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현경은 장식장에서 양주를 꺼내 얼음을 넣은 잔에 반쯤 따랐다. 평소에도 거의 술을 즐기지 않는 편이라 그런 자신의 행위조차도 낯설었다. 맙소사. 내가 이런 시간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니.
술이 뜨거운 열기를 뿜으며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초조함, 누군가의 시선, 막연한 불안과 우울함. 그녀는 정면에 걸려있는 그림을 향해 술잔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다. 현경은 이한에게 저 그림을 당장 떼라고 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2층으로 올라갔다. 이한의 서재와 수정의 방은 2층에 나란히 마주보고 있었다. 그녀는 먼저 수정의 방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수정은 여태 자지 않고 인터넷 메신저로 친구와 대화중이었다. 얼핏 보니 소희와 채팅중인 듯했다.
“소희니?”
“응.”
수정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이한과 함께 수정도 예전과 달라진 느낌이었다. 예전 같으면 현경에게 속마음도 털어놓고 대화도 많이 나누었을 텐데 요 며칠 통 입을 열지 않았다. 현경이 방으로 들어와 뒤에 서자 수정이 황급히 모니터를 가리며 짜증을 냈다.
“뭐하는 거야? 비밀 얘기하는 거란 말야!”
“수정아!”
“나가! 어서!”
수정이 다시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 단지 소리를 지르는 정도가 아니었다. 수정은 있는 대로 눈을 치켜뜨고 무섭게 현경을 노려보았다. 현경은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수정의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현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방을 나왔다. 방을 나온 이후에도 놀란 심장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아무리 사춘기라지만 대체 무엇이 수정을 저렇게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만들었을까.
예전 같으면 이한에게 먼저 상의를 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나눌 사람조차 없었다. 현경은 망설이다 이한의 방문 앞에 섰다. 오늘은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방문을 노크하려던 현경은 멈칫했다. 방안에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혹시 컴퓨터로 영화를 보는 건가했지만 다음 순간 여자의 소리에 대답하는 이한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쯤 세상모르고 잘 테니까 걱정하지 마!”
현경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방문을 노크하려던 손끝도 그대로 허공에 멈춰 파르르 떨려왔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거둬들이고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문에 갖다 붙였다. 다시 여자가 뭐라고 말을 하는데 이상하게 여자의 소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컴퓨터에서 나오는 소리는 아니었다. 여자의 말에 다시 이한이 대답했다.
“진심이야, 내가 사랑하는 건 오직 너 하나야. 결혼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야!”
이한의 말에 여자가 자지러지게 웃자 이한이 열에 들뜬 소리로 말했다.
“널 안고 싶어!”
현경은 심장이 떨려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대체 저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남편에게 여자가 있었던 말인가! 그럼 그동안 이집에서 느꼈던 이상한 예감들은 저 여자 때문이었단 말인가.
집안에 자신들 말고 또 다른 누가 있는 것 같은 느낌. 자신을 멀리하는 남편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 서재에서 느껴지던 낯선 여자의 향취. 가끔은 정말로 위층에서 여자의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말도 안 된다고 자신을 질책하곤 했었는데!
하지만 어떻게. 자신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 집안에서 어떻게 남편이 여자를 끌어들여 저런 더러운 행각을 벌일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바로 건너편에는 수정이 있지 않은가.
방안에선 연신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여자의 웃음소리와 이한의 음탕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현경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제대로 서있기조차 힘이 들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간신히 내밀어 방문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그런데 손잡이가 돌아가지 않았다. 방문이 안에서 잠겨있었던 것이다.
현경이 발작적으로 방문을 두드렸다. 순간 방안에서 들려오던 그 불쾌하고 더러운 소리들이 한순간에 뚝 멎었다. 그 갑작스런 변화가 현경을 더욱 초조하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현경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문 열어! 어서!”
하지만 방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수정아빠, 문 열란 말야. 밖에서 다 들었어. 어서 문 열라니깐!”
현경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방문을 쾅쾅 두들겨댔다. 하지만 안에서는 그 어떤 반응도 넘어오지 않았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구쳐 올라왔다. 그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치를 떨었다. 현경은 방문에 대고 자신도 알아듣지 못하는 온갖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그래도 방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긴 어떻게 문을 열고 그 뻔뻔한 얼굴을 내밀 수가 있을 것인가. 현경은 다급하게 1층 안방으로 달려 내려가 서재 열쇠를 뒤졌다. 그녀가 막 열쇠를 찾았을 때 누군가 빠르게 거실을 가로지르는 기척이 열린 방문으로 느껴졌다.
현경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막 여자의 옷자락이 방문 입구에서 사라지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현경은 벌떡 일어나 거실로 뛰쳐나갔다. 여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현관문은 닫혀 있었고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여자가 문을 열고 사라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그림이 보였다. 그림 속에는 집이 한 채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림을 보면 자꾸 그림 속 집에 누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기묘한 상상이 들기 시작했다. 현경은 머리를 흔들고 부리나케 2층 서재로 달려 올라갔다. 문에 열쇠를 끼우고 돌리는데 뜻밖에도 문이... 열려 있었다. 그녀는 문을 열어젖혔다.

++++++++++

이한은 핸드폰에다 최대한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조금 전에 방안에 그것이 있었습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김재환 형사가 말했다.
“지금은요?”
“지금은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바로 제 옆에서 뚫어지게 날 노려보고 있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형체가 또렷해지고 있어요. 처음에는 그냥 바람이 부는 것처럼 주변에 있는 공기가 움직이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그 느낌이 점점 분명해지더니 이젠 실제로 눈앞에 형체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얼굴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김 형사님은 못 봤습니까?”
“예, 여기 카메라 화면으로는 이한씨 외에 아무것도 안 보였어요. 참, 조금 전에 부인이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현경이 2층으로 올라왔다는 소리에 이한은 약간 긴장하며 물었다.
“이 시간에 집사람이요?”
“예. 거실에서 한참 그림을 들여다보다가 올라갔어요.”
“그래요? 알았습니다. 계속 지켜봐주세요. 그리고 약속은 내일 점심시간에 그때 거기서...”
이한은 재환과 약속을 정하고 핸드폰을 끊었다. 그림을 거실에 걸어놓은 후 현경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지나치게 예민해졌고 자기주장이 강해진 것이다.
이한은 그림을 집안에 가져오는 대신 재환에게 도움을 청했다. 혹시라도 현경과 수정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불안했던 것이다. 재환은 돕겠다고 흔쾌히 나서주었고 곧 집안 곳곳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했다. 또 그것과 별도로 베트남에서 ‘므이’라는 이름을 단서로 그림에 대한 정보를 조사 하겠다 고도 했다.
이한은 재환과의 전화를 끊고는 눈을 감았다. 집안이 유난히 적막하게 느껴졌다. 온갖 걱정과 불안이 그의 뇌리를 감돌았다. 이제 저주는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지나면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그에게 말이라도 걸어올 것만 같았다.
아직도 방안에는 이국의 낯선 향취가 코끝에서 맴돌았다. 아까 그 여자가 므이 일까. 방안의 공기는 아직도 서늘했다.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며 현경이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이한은 방으로 뛰어든 현경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머리는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현경이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다짜고짜 소리쳤다.
“그 년 어디 갔어?”
지금껏 이한은 이런 현경의 거친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대체 당신 무슨 소리하는 거야?”
“몰라서 물어? 이 방에 있던 그 년 어디 갔냐고? 조금 전에 밖으로 도망친 게 그년이지? 그렇지?”
“이 방에 있긴 누가 있었다고 그래?”
“방금 전까지 그 년하고 둘이 이방에서 낄낄거렸잖아. 문까지 잠가놓고. 내가 밖에서 문 열어달라고 그 난리를 쳤는데도 잡아뗄 거야? 아악!”
현경이 갑자기 이한의 옷에 매달리며 울부짖었다.
“현경아, 대체!”
이한이 놀라 그녀를 붙잡았고 뒤에서 놀란 수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왜 그래?”
악을 쓰던 현경이 수정을 보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매달렸다.
“수정아, 네가 좀 말해봐. 너 좀 전에 엄마가 밖에서 난리치는 소리 들었지? 혹시 넌 아빠 방에서 여자 목소리 듣지 못했니?”
“난리를 치다니 무슨 소리야? 밖은 조용했는데.”
“뭐? 뭐라구?”
현경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비명을 지르고 아빠 방문을 두드리고 했는데 그 소리를 못 들었단 말야?”
“아냐, 엄마. 난 아무 소리도 못 들었어.”
“말도 안돼! 이건 진짜 말도 안돼!”
현경이 악을 쓰며 비틀거리자 이한이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하지만 현경은 이한의 손길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그 더러운 손 치워!”
현경이 수정까지도 거칠게 밀어젖히고는 비틀거리며 1층으로 내려갔다. 이한은 그런 현경의 뒷모습을 보며 비로소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돌아가시기 직전 아버지가 한 얘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요즘 네 엄마가 이상하다. 아주 해괴한 소리를 하는구나. 나보고 자꾸 여자와 같이 있다는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