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질투

정인은 무엇에 이끌리듯 그림에 빠져 들어갔다. 그림은 액자만으로도 녹녹치 않은 세월을 견뎌왔음을 짐작케 했다. 붉게 이글거리는 석양이 초원을 물들이는 저녁풍경을 황홀한 색채로 표현한 그림. 그 한쪽 구석에 집이 한 채있었다. 콘크리트로 지은 견고한 집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엉성한 구조로 기온이 따스한 동남아 어느 지역의 전통가옥을 그린 것 같았다. 집 아래에는 어느 나라 글인지 알아볼 수 없는 기묘한 모양의 글자가 적혀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라면 이 아름답고 나른한 풍경화를 보고 있으면 그림 속에서도 누군가가 자신을 마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그림에 빠져들고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 정인은 생각했다.

정인은 지금도 자신이 어느새 그림 앞에 서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림 속의 집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그림에서 고개를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마치 그림 속에 뭔가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림은 골동품 수집가인 아빠가 지난주 인사동 화랑에서 사온 것이었다. 정인은 처음 그림을 보았을 때 당연히 외국화가의 작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빠는 그 그림이 조선후기 이윤수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아마 그림 속 풍경이 우리나라가 아니어서 그런 생각이 든 것 같았다.
“너 또 그 그림 보니?”
엄마의 소리에 정인은 겨우 그림에서 시선을 뗐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온 엄마가 신기한 듯 정인을 보며 말했다.
“전에는 아무리 좋은 그림이라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잖아. 그 그림은 마음에 들어? 난 별로던데.”
“아냐, 나도 싫어 이 그림.”
“참나, 싫다면서 왜 툭하면 보고 있어?”
“엄마, 여기 아래 적힌 글씨 혹시 무슨 뜻인지 알아?”
“그거? 아빠한테 들었는데... 뭐라고 했더라? 아, 그래. 므이! ‘므이의 집’이란 글씨라고 했어.”
“므이? 대체 어느 나라 사람 이름이 그래?”
“베트남이라던데? 베트남의 어떤 여자이름이래.”
“베트남? 조선후기의 화가가 대체 베트남 여자의 집을 왜 그렸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마침 풍경이 아름다워서 그렸겠지. 참 너 동욱이하고 싸웠니?”
“아니. 왜?”
“그럼 왜 그래? 오늘 같은 날 만나지도 않고. 니들 요새 좀 이상한데?”
“그런 거 아니라니깐!”
정인은 자기도 모르게 신경질을 내고 돌아섰다. 방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등에 대고 엄마가 소리쳤다.
“아니긴 뭐가 아냐! 보니까 딱 그렇구만!”
정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집안이 울릴 정도로 쾅 소리가 나게 방문을 닫아걸었다. 다시 엄마가 뭐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발작적으로 흔들었다.
확실히 동욱은 변했다. 엄마 말대로 오늘 같은 날 만나기는커녕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 한 통조차 없다는 게 그들의 사이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리 회사일이 바쁘고 몸이 좋지 않다고 해도 이건 납득할 수가 없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정인은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어제도 그는 하루 종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인은 다시 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아무리 지루하게 신호가 가도 동욱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는 망설이다 이번에는 그의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한동욱씨 오늘 결근인데요?”
회사 사람의 말에 정인이 놀라서 되물었다.
“예?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요즘 계속 몸이 안 좋다고 하더니 많이 아픈 모양이더라구요.”
정인은 전화를 끊고 걱정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정말로 몸이 아팠던 거야. 세상에 회사에도 못 나오고 전화도 못 받을 만큼 아프면 대체 얼마나 아픈 거야. 바보같이 그랬으면 나한테 전화라도 하던가. 난 그것도 모르고. 지금쯤 혼자 얼마나 힘들어할까.’
정인은 더 이상 집안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부리나케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는 길에 화려한 초콜릿도 한 상자 사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밸런타인데이가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도 그 정체불명의 날이 연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근사한 이벤트를 선물해준 것만은 분명했다. 희수도 동욱에게 줄 초콜릿을 사기위해 북새통을 이루는 백화점 초콜릿매장을 비집고 들어가 간신히 마음에 드는 선물을 골랐다.
최근 유행하는 드림카카오 초콜릿 세트였다. 카카오 함유량에 따라 제각각 다른 맛이 난다는 초콜릿으로 그중에서도 카카오 99% 초콜릿은 충격적일 정도의 쓴 맛이 난다고 했다. 희수는 달콤하고 평범한 초콜릿보다 카카오 99%가 그들의 추억을 훨씬 특별하게 만들어 주리라 여겼다.
희수는 초콜릿을 들고 동욱의 아파트로 향했다. 본격적으로 사귄지 불과 한 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둘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아마도 몰래하는 사랑이 주는 스릴과 안타까움이 더 그런 감정을 부추긴 건지도 모른다. 희수는 아주 예전부터 동욱을 좋아했다. 그가 정인과 사귀기 이전에도 좋아했고 정인과 사귀는 동안에도 단 한번 그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희수는 설레는 기분을 안고 동욱의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가 주위를 살핀 후 문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오빠! 나야, 희수.”
그제야 안에서 찰칵하고 문이 열리고 핼쑥한 얼굴의 동욱이 고개를 내밀었다.
“미리 핸드폰을 하지.”
“그럼 재미없잖아. 어이구 우리 자기 많이 아팠져?”
동욱이 고개를 빼고 불안하게 주변을 살피자 희수가 물었다.
“왜 그래?”
“아니, 방금 전에 누가 계속 벨을 눌리더라고. 그래서 모른 척하고 가만있었거든.”
“무슨 죄졌냐?”
“야, 여기서 이러다 정인이한테 걸리면... 알지? 어서 들어가자.”
“뭐 어때? 자기가 정인이하고 결혼을 했어? 뭘 했어?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 연애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고 그러는 거지.”
“물론 그렇긴 한데 뒤가 시끄럽잖아.”
“그럼 영원히 이렇게 숨어서 만나자고?”
“물론 말할 거야. 언젠가는. 뭐해? 계속 문 열고 서있을 거야? 나 감기몸살이야, 추워.”
“피이~”
희수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금방 깔깔거리며 집안으로 사라졌다.


++++++++++


그들의 소리를 다 듣고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확인한 정인은 아파트 비상계단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동욱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여자가 다름 아닌 희수라는 사실이 그녀에겐 더욱 충격적이었다. 희수는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고 대학도 같은 학교라 동욱을 만날 때도 늘 함께 어울리곤 했었다.
그런 희수가 어떻게. 동욱과 자신이 결혼 약속한 것도 알고 그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아는 희수가 어떻게!
정인은 몸서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들고 있던 초콜릿 상자를 바닥에 내던지고 하이힐로 미친 듯이 짓밟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저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손이 파르르 떨렸고 눈에선 불꽃이 일었다. 그동안 쌓아왔던 두 사람에 대한 배신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

희수가 초콜릿 조각을 손에 들고 동욱에게 ‘아’하고 말했다.
“이게 뭔데? 초콜릿이야?”
“그렇다니깐. 카카오99%라고 요즘 엄청 유행하는 초콜릿이야.”
“그래? 근데 왜 난 처음 들어보지?”
“지금 알면 됐잖아. 우선 맛부터 봐보라니깐.”
희수가 억지로 초콜릿을 입안에 밀어 넣었고 동욱이 초콜릿을 씹었다. 하지만 잠시 후 동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으악~ 이거 뭐야? 이게 무슨 초콜릿이야.”
동욱이 괴로워하며 초콜릿을 뱉기 위해 일어나려하자 희수가 그를 붙잡았다.
“날 위해서 그 정도도 못 참아?”
“이거랑 너랑 무슨 상관인데?”
“아무튼 내가 자기주려고 사온 거잖아. 밸런타인 초콜릿. 그러니까 자기야, 뱉지 말고 그냥 먹어.”
“야, 너 한번 먹어봐라. 이게 사람이 먹는 음식인가. 아우 미치겠다. 야, 진짜 안 되겠다!”
“잠깐!”
희수가 동욱을 붙잡더니 그의 입에 키스를 했다. 한참 후 그녀가 입을 떼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자기 입속에 있어서 그런지 드림카카오99도 달콤하네. 내가 다 먹었어.”
“그러다 감기 옮으면 어쩌려고 그래?”
“난 자기 거라면 감기도 괜찮아.”
“뭐?”
동욱이 어이없다는 듯 웃자 희수가 다시 그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하려고 할 때였다. 벨이 울렸다. 희수가 먼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봤고 동욱도 찡그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희수가 팔을 풀며 불안하게 물었다.
“누구야? 올 사람 있어?”
동욱이 조용히 하라는 표시로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아까도 누가 벨만 누르다 갔어. 조용히 있으면 그냥 갈 거야.”
하지만 바깥의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누군가는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계속 영원히 그럴 것처럼 벨을 눌러댔다.
“뭐야? 대체 누군데 벨을 저렇게 눌러?”
희수의 말에 동욱도 참지 못하고 욕설을 뱉어냈다.
“어떤 개새끼야? 옆집 애들이 장난하는 건가?”
“그러지 말고 나가봐 좀! 계속 벨 누르니까 불안해서 못 참겠어!”
희수가 짜증을 내고 나서야 동욱은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문에 귀를 대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세요?”
바깥에서는 어떤 대답도 없었다. 그는 이번에는 좀 더 크고 분명하게 소리를 질렀다.
“밖에 누군데 그렇게 벨을 눌러요?”
여전히 밖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제야 동욱도 짜증이 났다.
“어떤 씹할 놈이 장난을 쳐!”
그가 욕설을 뇌까리며 벌컥 문을 여는 순간 누군가가 악을 쓰며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미처 막을 사이도 없었다. 동욱도 놀라서 옆으로 피할 정도였다. 갑자기 뛰어들어 돌진해오는 정인을 보고 기절할 것처럼 경악한 사람은 희수였다. 정인은 희수가 ‘악’소리를 내기도 전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야, 이년아! 니가 사람이야? 니가 친구야?”
정인은 머리채를 잡아 흔들면서 정신없이 희수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희수는 바닥에 웅크린 채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러댔다. 뒤늦게 번쩍 정신이 든 동욱이 황급히 달려와 정인의 손을 제지하며 소리쳤다.
“대체 왜이래? 그만해!”
하지만 정인은 희수의 머리카락을 놓지 않았다.
“이거 놔! 놓으란 말야! 정인아, 제발!”
동욱이 억지로 정인의 손을 풀었다. 이번에는 정인이 발버둥을 치며 동욱에게 악을 써댔다.
“아니라고 말해! 오해라고 말해! 실수였다고 말해 어서! 이 개자식아!”
동욱이 소리를 질렀다.
“말하려고 그랬어! 사실대로 얘기하려고 그랬다고! 희수 좋아한다고!”
정인이 울음을 그치고는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
“너한테 진짜 미안한대, 나 희수 사랑해!”
정인이 넋 나간 사람처럼 동욱을 보다가 억양 없이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 아기는?”


++++++++++


“엄마, 나 이 ‘므이의 집’ 내 방에 걸어놓으면 안 돼?”
정인이 거실에 있던 그림을 떼어내 손에 들고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엄마는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동욱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하기도 했다.
“생전 그림은 보지도 않던 애가 갑자기 왜 그래? 아까 낮에는 싫다고 했잖아.”
“아니, 지금은 좋아졌어. 이 그림 보고 있으니까 왠지 위안이 되고 마음이 편해져. 나 이 그림 내방에 걸어 놓을게. 아빠 오면 엄마가 말 좀 해줘.”
정인은 엄마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림을 방으로 가져와 침대위에 세워놓았다. 이상했다. 동욱의 집을 나선 후 두 사람을 저주하며 미친년처럼 거리를 헤매 다녔다. 그런데 문득 이 그림이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마치 견딜 수 없이 갈증이 느껴질 때 오아시스를 떠올렸을 때처럼 그림을 떠올리자 견딜 수 없이 가슴을 짓누르던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거짓말처럼 해소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림은 그녀에게 뜻밖의 위안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림 속 뭔가가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런 기이한 기분. 그녀는 그림에 대고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죽여 버리고 싶어.”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왜 이 그림에 대고 그런 말을 하는지.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다음 순간에 일어났다. 그녀는 그 말이 자신이 한 말인지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떨며 그림에 대고 말했다.
“희수 년을 정말 죽여 버리고 싶단 말야. 므이야... 제발 도와줘!”
말을 마친 정인은 깜짝 놀랐다. 맙소사, 므이라니. 게다가 그 낯선 이름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정인은 그림 속 므이의 집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정말 그 안에 누가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림의 집안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집안을 천천히 오가기도 하고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는 그런 느낌. 정인은 알 수 없는 오싹한 예감에 얼른 그림을 벽 쪽으로 돌려세웠다.


++++++++++


희수가 동욱의 집을 나선 건 자정이 가까워서였다. 정인에게 폭행당해 머리도 한 움큼 빠졌고 얼굴에도 손톱자국이 남아 쓰라렸지만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동욱이 몸만 괜찮았다면 그의 곁에서 잠들고 싶었다.
희수는 여러 복잡한 심경을 뒤로 하고 동욱의 집을 나섰다. 거리로 나서는 순간 한기가 그녀를 휘감아왔다. 희수는 택시를 타기 위해 큰 도로변까지 걸음을 재촉하며 계속 뒬르 돌아봤다. 아파트를 나선 직후부터 한기와 함께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계속 따라오는 것 같아 겁이 났던 것이다.
희수의 하이힐소리가 적막한 새벽공기를 갈랐다. 소리는 그녀의 심장을 쿵쿵 두드릴 정도로 크게 들렸다. 차갑고 을씨년스러운 새벽공기를 가르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놀랍게도 바람은 따스한 남쪽나라에서 불어온 것 같은 온기를 품고 있었다.
바람이 뺨과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희수는 훅하고 신음을 삼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시에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바람결에 현기증이 날 정도의 비릿하면서도 역겨운 피비린내가 섞여있었기 때문이었다. 희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2월 15일. 아직은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야할 늦겨울인데 피비린내가 실린 더운 바람이라니. 게다가 그 바람엔 사뭇 낯설면서도 이국적인 향취가 배어있었다. 희수는 정신없이 달렸다. 어느새 몸에선 땀이 배어나왔다. 달린 탓도 있겠지만 찰거머리처럼 그녀를 따라붙는 한여름 같은 더운 공기 때문이었다.
두려움 때문에 입에서는 자꾸만 울음이 새나올 것만 같았다. 등 뒤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위협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바람의 기운 만큼이나 낯설고 이국적이었다.
누군가가, 아니 뭔가가 소리를 지르며 멀리서부터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한명이 아닌 여러 명의 위협적인 발소리가 꿈결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희수는 발길을 늦출 수가 없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따라오는 누군가가 계속 ‘므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도망가는 순간에도 희수는 ‘므이’가 무슨 뜻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급작스럽게 피비린내가 확하고 뒤쪽에서 덮쳐왔다. 희수는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그녀의 등 뒤에서 붉은 빛을 띤 회오리바람이 바닥을 쓸며 빠르게 몰려오고 있었다.
“저게... 뭐야?”
회오리바람에서 역한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고 희수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회오리바람이 그녀의 발목을 휘감는 순간 귓전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렴풋이 ‘므이’ 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시큰하면서도 서늘한 바람이 발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희수는 비명을 지르며 중심을 잃었다. 왼쪽 발목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며 몸이 기울었다. 사라진 발목 때문에 희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벽을 짚었다.
회오리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타고 올라왔다. 이번에는 오른손목에서 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희수는 벽을 짚었던 손을 놓고 비틀거리며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회오리바람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가슴을 지나 얼굴까지 올라왔다.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피비린내로 희수는 숨조차 내쉴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소용돌이치는 핏빛회오리는 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로 피를 뿌리는 피의 소용돌이였다. 회오리에 갇힌 희수의 몸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어갔다. 그녀는 너무 무서워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의 머리가 목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머리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기이한 표정으로 굴러가던 머리는 벽에 부딪혀 멎었다. 정인이 할퀸 손톱자국이 선명한 희수의 머리는 그때까지도 공포에 사로잡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