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프롤로그

1896년 베트남 북부 도시 달랏(Dal Lat)

베트남 북부에서 뻗어 내려온 장대한 쯔엉선 산맥 위로 청명하고도 푸른 가을하늘이 걸렸다. 그 아래 해발 1475미터의 중부고원 끝자락에 베트남의 작은 도시 달랏이 있다. 1883년 아르망 조약으로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만든 프랑스는 이곳 달랏에 휴양지를 건설했다. 프랑스군 지휘 하에 달랏에는 아름다운 프랑스풍의 건물이 하루에도 여러 채씩 지어졌다. 아름다운 계곡과 숲 말고도 달랏의 매력은 베트남 다른 지역의 고운 다습한 기후와 달리 1년 내내 쾌적한 날씨가 지속된다는 점이다.
달랏의 실질적 책임자인 프랑스군 올리비에 중령은 프랑스풍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저택 베란다에서 초조하게 므이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는 오늘밤 배편으로 베트남을 떠나 프랑스로 귀국할 예정이었고 므이를 비롯한 베트남인 몇 명을 데려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다른 베트남인들은 모두 모였는데 므이는 저녁때가 다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오전에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보낸 조선인 화원조차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는 참다못해 부관을 불러 므이의 집에 다녀오게 했다. 올리비에는 신비한 수줍음을 간직한 베트남 소녀 므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아내인 리비아도 하지 못한 그의 아이를 임신해주었다. 아직은 리비아에게 그녀의 존재를 숨기고 있지만 이번에 프랑스로 돌아간다면 정식으로 므이를 소개하고 그 존재를 인정받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므이가, 그의 아이를 가진 므이가 배가 떠날 시간이 되도록 소식이 없는 것이다.
부관이 출발한지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부관과 조선에서 데려온 화원이 멀리서 나란히 말을 타고 돌아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므이가 그들과 함께 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올리비에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올리비에는 저택 마당까지 달려 내려가 그들을 맞았다. 숨을 몰아쉬며 말에서 뛰어내린 부관과 조선인 화원은 약속이나 한 듯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올리비에는 불길한 예감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물었다.
“어떻게 됐나?”
올리비에의 다그침에 부관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당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올리비에가 이번엔 조선인 화원을 돌아보았다. 지난해 조선에 갔을 때 왕실이 서양문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려오라고 그에게 딸려 보낸 화원이었다.
“왜 그러나? 므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화원이 리비아가 없는지 주위를 살피자 올리비에가 초조한 듯 소리쳤다.
“걱정 말게, 리비아는 없으니까. 자, 무슨 일인지 어서 말해봐.”
화원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므이가 살해당했습니다.”
순간 올리비에의 입에서 단발마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화원을 뚫어지게 노려보다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말이야?”
화원은 몸을 떨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눈에서 광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올리비에가 화원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잖아!”
“저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초상화를 다 그리고 므이가 떠날 준비를 할 동안 근처 숲에 산책을 다녀왔는데... 그 집에서 불량배로 보이는 베트남 남자 서너 명이 황급히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상해서 얼른 들어가 봤더니...”
올리비에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어떤 놈들인지 얼굴은 봤어?”
“아니오. 멀어서 잘...”
올리비에가 미친 듯이 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소리쳤다.
“당장 므이 집으로 가봐야겠어.”
부관이 말했다.
“얼마 있으면 배가 떠나 자칫하면 늦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대로 떠날 수는 없어. 므이는 내 아이를 가지고 있었어! 내 아이를 가지고 있었던 여자란 말이야!”
올리비에는 부관이 말릴 사이도 없이 말에 올라타고 순식간에 내달았다. 부관도 뒤늦게 올리비에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지자 조선인 화원은 그제야 떨리는 손으로 등에 지고 있던 그림들을 꺼내 그 중 한 장을 펼쳤다. 급하게 그려 아직 채 물감도 마르지 않은 거친 그림이지만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자 새삼 얼마 전의 그 참혹한 광경이 떠올라 화원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므이 집에서 본 여자는 그야말로 질투의 화신이자 악의 화신이었다. 그 여자의 원한을 사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비록 므이가 가엾고 불쌍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걸 잊어야만했다. 조선인 화원은 그 순간 모든 비밀을 혼자만의 가슴에 담고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다.
올리비에가 말을 타고 어둠속을 30여분쯤 달리자 야자수로 지붕을 덮은 베트남 전통가옥이 한 채 시야에 들어왔다. 마을에서도 외따로 떨어져있는 므이의 집이었다. 집 앞에 횃불을 든 일단의 베트남인들이 모여 있었다.
올리비에가 집 앞에 도착해 말에서 내리자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묘한 건 그들의 눈길에 영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담겨있다는 점이었다. 올리비에는 이글거리는 무수한 횃불을 헤집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집에 들어선 순간 역한 피비린내와 악취가 덮치듯 달려들었고 악취보다 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 곧이어 시야에 들어왔다. 사체는 팔을 벌리고 바닥에 쭉 뻗어있었다. 하지만 사체 어디에도 므이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체는 왼쪽발목과 오른손목 그리고 머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만약 머리 없는 가슴에 걸려있는 그가 준 목걸이와 집만 아니라면 므이가 아니라고, 절대로 그녀가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강한 충동이 느껴졌다. 사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흥건하게 바닥에 고여 있었다. 그런데 그 피로 누군가 바닥에 글씨를 써놓았다. 글은 베트남어를 잘 모르는 올리비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간결하고도 강렬했다.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
대체 누가 왜 저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까. 하지만 올리비에는 눈앞의 죽음이 너무나 참혹하고 섬뜩해 어떠한 의혹이나 슬픔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는 바깥에 있는 베트남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던 이유도 알 것 같았고 집안에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은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또한 이 기묘하고 소름끼치는 현장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어 자꾸만 뒷걸음질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그의 시야에 그림이 들어왔다. 그림은 벽의 한쪽에 비스듬히 세워져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그림 안에서 올리비에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아름다운 므이가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 조선인 화원이 그린 므이의 초상화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원이 급하게 오느라 그림을 잊은 것이다.
올리비에는 그림 속 므이와 머리 없는 끔찍한 사체를 번갈아보고는 결심했다. 그림이라도 가져가 아름다운 므이의 모습을 영원히 기억해야겠다고. 그가 발작적으로 그림에 손을 뻗을 때였다. 등 뒤에서 칼날 같은 음성이 날아왔다.
“손대지 마시오!”
올리비에가 흠칫 놀라며 돌아보자 승려 복을 입은 법사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난 올리비에 중령이다. 이 그림은...”
“그 그림은 아무도 가져가선 안 되오.”
“뭐라고?”
“므이는 그냥 살해된 게 아니오. 저주를 당한 거요. 얼굴과 손발을 잃어버려 자신의 영혼을 찾지 못하고 영원히 이승을 떠돌아야하는 끔찍한 저주를 말이오.”
“난 저주 같은 건 몰라. 그런 건 너희들 베트남인들에게나 통하겠지. 내가 가져가려는 건 이 그림이지 므이가 아냐. 난 오늘밤 프랑스로 돌아갈 테지만 후임자에게 반드시 살인범들을 잡도록 할 것이다.”
“그 그림도 저주를 받았소.”
“무슨 소리야? 그림이 무슨?”
“얼굴과 손발을 찾아 영원히 이승을 떠돌아야하는 저주받은 원혼에게 그 그림이 어떤 의미를 가지겠소? 므이를 살해한 자들도 옆에 초상화가 있다는 걸 몰랐던 거요. 비록 그림이지만 그 그림은 얼굴과 손발을 잃고 이승을 떠돌 므이의 원혼에게 중요한 것이오. 이제 므이의 원혼은 그 그림에 깃들어 복수를 꿈꿀 것이오! 당신이라고 안전할 것 같소?”
올리비에는 법사를 노려보다가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누워있는 사체도 시야에 들어왔다. 알 수 없는 꺼림칙한 예감이 그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그림 속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므이의 미소가 좀 전과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든 것도 그의 마음에 걸렸다. 법사가 말했다.
“그 그림을 므이의 원혼과 함께 봉인해야만 또 다른 끔찍한 비극을 막을 수 있소.”
올리비에는 신음을 흘리며 그림에서 돌아섰다. 그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므이의 집을 걸어 나왔다. 등 뒤에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속삭이는 므이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리는 것 같았지만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올리비에는 곧장 말에 올라 전속력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어둠속에서 한참을 질주해 저택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는 비로소 다시는 므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 아팠고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멀리 저택 마당에서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의 아내 리비아가 사람들의 맨 앞에서 그를 향해 힘차게 횃불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올리비에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어딘가에서 바람결에 실린 므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영원히 저주할 것이다!’

현재

재환은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훅하고 달려드는 역한 피비린내를 맡았다. 눈앞에는 현대적인 차가운 느낌의 오피스텔 건물 복도가 길게 이어져있었고 복도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꺼림칙함 혹은 불쾌한 공기가 가득 들어차있었다. 재환은 그 답답한 공기를 헤치며 사건현장으로 다가갔다.
307호.
먼저 온 수사관들이 그 안에서 소리 없이 각자의 작업에 열중해 있었다. 방에 들어서며 재환이 받은 느낌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은 색채의 강렬함이었다. 방안 풍경은 흡사 어느 행위예술가의 퍼포먼스를 연상시켰다.
스프레이로 정성껏 뿌려도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은 기이한 핏빛의 향연. 방안 구석구석에는 핏방울이 화려하게 수놓아져있었고 그 기묘한 무대의 한가운데 머리 없는 여자가 역시 기묘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었다. 란제리차림의 여자는 머리뿐만 아니라 왼쪽발목과 오른손목이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열심히 후레시를 터뜨리며 사건현장을 촬영하던 감식반 김영철이 고개를 흔들며 다가왔다.
“별의별 잔인한 사건을 다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시라도 빨리 이 방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사방이 피예요. 보세요, 사람이 한 짓 같지가 않아요.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사람이라면 이렇게 할 수가 없죠.”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방문이 안에서 잠겨있었다고 했지?”
“예,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전혀 없어요.”
걸음을 걸을 때마다 피로 물든 바닥의 카펫이 질척거렸다. 김영철이 문에 달려있는 부서진 걸쇠를 보여주며 말했다.
“보세요, 안에서 걸쇠까지 잠겨있어서 저희도 문을 강제로 뜯고 들어온 겁니다. 자살이 아닌 다음에야 외부에서 어떻게 사람이 안으로 들어와 이 짓을 해놓을 수가 있겠어요?”
“사람 짓이 아닐 수도 있지.”
“예?”
“전에도 한번 본 적이 있어. 사체의 왼쪽발목과 오른손목, 그리고 머리가 사라졌고 사방에 피가 뿌려져 있었지.”
김영철의 입이 놀라움으로 벌어지는 것을 뒤로 하고 재환은 오피스텔을 나왔다. 그가 걸을 때마다 바닥에는 핏빛 발자국이 유령처럼 그를 따라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