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바람소리 / 김훈

 

 

가을에는 바람의 소리가 구석구석 들린다귀가 밝아지기 때문이 아니라 바람이 맑아지기 때문이다바람이 숲을 흔들때소리를 내고 있는 쪽이 바람인지 숲인지 분별하기 어렵다이런 분별은 대체로 무가치하다그것을 굳이 분별하지 않은채로 , 사람들은 바람이 숲을 흔드는 소리를 바람소리라고 한다바람소리는 바람의 소리가 아니라바람이 세상을 스치는 소리다.

맑은 가을날소리를 낼 수 없는 이 세상의 사물들이 바람에 스치어 소리를 낸다그 난해한 소리를 해독하려는 허영심이 나에게는 있다습기가 빠진 바람은 가볍게 바스락거리고 그 마른 바람이 몰려가면서 세상을 스치는 소리는 투명하다테풍이 몰고 오는 여름의 바람은 강과 산맥을 휩쓸고 가지만 , 그 압도적인 바람은 세상의 깊이를 드러내지 못한다.

가을에는 오리나무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와 자작나무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가 다르다오리나무 숲의 바람은 거친 저음으로 폭포처럼 흘러가고 자작나무나 은사시나무 숲의 바람은 잘 정돈된 고음으로 흘러간다나뭇잎의 크기와 흐느적거림그리고 나뭇가지들이 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강도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의 바람에 끄달리는 숲은 고통받는 성자와 같다그러나 가을의 바람에 스치는 숲은 바람과 더불어 편안하게 풍화되어 가며 운명의 속내를 드러낸다메마른 가을의 억새숲을 스치는 바람의 소리는 하얗게 바래서 자진하는 억새의 풍화를 완성한다누렇게 시든 옥수수밭을 스치는 가을 바람소리는 파도의 소리를 닮아 있다.풍화란 , 세상이 바람쪽으로 이끌려가면서 닳고 또 무너지고 사위어가는 모습이다이때의 바람은 시간의 본질이다가을 억새밭에서 그 풍화는 바람의 소리 위에 실려 있다가을에물기 빠진 나뭇잎들에는 백골과도 같은 잎맥이 드러난다잎맥은 삶의 통로이며 구조이다그 통로가 늙은이의 정맥처럼 돌출해서 바람에 스치운다.

억새잎의 마른 잎맥을 스치고 가는 가을 바람소리는 대금의 소리다대금을 불 때바람은 인간의 몸에서 나오고소리는 그 떨판에서 나온다 , 바람을 저장한 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바람을 저장한 몸은 또 다른 바람에 의해 순하게 풍화되어 갈 준비를 마친 몸이다.

가을에눈은 산맥을 넘어가고 귀는 수평선을 건너간다먼 바다를 건너와서 연안 쪽으로 다가오는 바다의 바람은 원양의 미세한 출렁임을 실어온다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들이 가을에는 더욱 확실하고 두렷해진다그래서 바람이 불어서 먼 것들이 가까이 실려오는 가을날가장 불쌍한 것은 손이다.

겨울의 바람은 날카롭고 우뚝하다그 바람은 세한도의 화폭 속을 불어가는 바람이다겨울의 바람은 마른 나무가지들의 숲을 베고도시의 빌딩 사이의 좁은 골목을 휘돌고 전깃줄을 울린다겨울의 바람은 사람을 낮게 움츠리게 하지만 , 가을의 바람은 사람의 마음을 이 세상과 마주 서게 한다가을의 바람은 세상을 스쳐서 소리를 끌어낼 뿐 아니라사람의 몸을 스쳐서 몸 속에 감추어진 소리를 끌어낸다그 소리 또한 바람이다몸 속의 바람으로 관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의 호흡은 그래서 가을날 더욱 선명히 느껴진다.

바람 부는 가을날 , 모든 잎맥이 바람에 스쳐서 떨릴 때나는 내 몸 속의 바람을 가을의 바람에 포개며 스스로 풍화를 예비한다악기가 없더라고 내 몸이 이미 악기다가을에는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