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11회 강명희의 등단작품으로 2003년 한라일보에 게재된 작품입니다.
http://inil.org 11회 홈페이지 시절에 올라왔던 글인데 데이터에서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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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희','0','벼랑끝에 선 남자','2003-02-17 23:14:27',조회355,

                          벼랑 끝에 선 남자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웬 뚱뚱한 중년여자였다. 머리가 부스스해서 막 낮잠을 자다가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가 여자의 친척쯤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녀가 놀라며 나를 문 밖으로 내몰고 거칠게 문을 닫았다. 성급히 문 잠그는 소리가 났다. 안에서 흥분한 여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놀랍게도 이사온 지 일주일이나 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내 집이라며 다시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안에서 간헐적으로 무슨 소리인가 들려왔다. 잠시 후 층계 아래에서 경비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경비는 나를 보고 뜻밖이라는 듯이 그 자리에 섰다. 그는 팔짱을 끼고 다니는 여자와 나를 드물게 금실이 좋은 부부라며 부러워하곤 했었다.
오랜 경비 생활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판단하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웬만큼은 알고 있지만 자초지종을 더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분노와 창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야릇하게 내리 꽂히는 경비의 시선을 뒤로하고 나는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경비가 백밀러 속에서 반쯤 뜬눈으로 웃음을 마구 흘리고  있었다.
무작정 차를 몰았다. 눈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 속이 하얗게 빈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기계적으로 악세레이터만을 밟았다.
얼마 후 나는 외곽 순환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차는 날개를 달고 나는 것처럼 달렸다. 모든 차들이 뒤로 엉금엉금 기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아니 더욱 더 악세레이터를 밟았다.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울화가 온 몸으로 불근불근 솟아올라 더 이상 운전하기 힘들었다.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는 운전대에 머리를 박고 숨을 몰아 쉬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여자의 집이었다. 한 달을 예정한 여행이었지만 보름만에 돌아온 이유는 막연히 이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여행을 떠난 지 열흘만에 여자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화도 핸드폰도 연결되지 않았다. 나는 여자 주변 사람들의 연락처를 알지 못한다. 이혼한 전남편이 살고 있는 곳과 동생의 아파트를 알고 있을 뿐이다.  
여자는 내게 여행을 떠날 것을 권했다. 내키지 않은 내게 여자는 집요하게 권유했다. 이번 여행은 여자가 계획적으로 보낸 것임이 새삼 느껴졌다. 여자는 내 가슴속에서 조금씩 사위는 부성애를 들먹이며 아이들에게 다녀올 것을 종용했다. 엄마 없는 아이들을 유학 보내 놓고 들여다보지 않는 것은 무심하다고 나무랐다.
여자의 말을 들으며 나는 내 아이들이 무서워서 피하는 나를 보았다. 아비가 자식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번 여행은 그러한 두려움을 없애자고 떠난 것이었다.
아내가 죽고 나서부터 아이들은 방학 때조차 한국에 나오지 않았다. 매달 꼬박꼬박 통장으로 돈을 입금시키면 내가 아이들에게 해 줄 것은 더 이상 없었다. 아이들은 받았다는 말도 어떻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전화를 걸면 묻는 말에만 짤막하게 대답했다.
캐나다에 건너갔을 때도 아이들은 나를 보고 기뻐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과 토론토의 한 복판에 있는 음식점을 찾았다. 아이들은 어떤 음식점을 고를까 하는 아주 사소한 것을 가지고 싸웠다. 작은아이가 형이 지겹다며 방을 따로 얻어 달라고 말했다. 금방 큰 아이도 동의했다. 나는 형제가 먼 나라에서 서로 의지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아비로서 당연한 충고를 했다. 그랬더니 그런 아버지는 왜 엄마를 배반했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아직까지 위암으로 죽어간 엄마의 죽음을 아버지 탓으로만 여겼다.
아이들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내를 죽인 것은 아이들 생각대로 나 자신일지 모른다. 그 여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내는 아직도 살아 있을까.  
내가 늪과 같은 여자와의 사랑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아내는 소화불량을 호소했다. 나는 병원에 가 보라는 말을 했을 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때 병원에 갔더라면 위암은 초기에 발견되었을 것이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냈을 것이다. 그러면 지금쯤 아내는 유학간 아이들을 챙기고, 나는 여자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아내에게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것과 동시에 아내는 그 여자와 나와의 관계를 알았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타면 여자에게서 나던 향기를 아내는 내게서 맡았다. 아내는 개만큼 냄새에 민감했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던 아내는 언제인가부터 일정한 리듬을 내게서 발견했다. 화요일이면 늘 늦는다든지, 그럴 때면 그 향기가 난다든지, 그런 날은 집에 돌아와 골아 떨어진다든지, 언젠가 부터 잠자리를 전혀 하지 않는다든지...그런 일정한 리듬이 생겨지고 있는 것을 아내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내는 내가 그 여자와 한 차를 타고 지나는 것을 목격했다. 그날 아내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아내는 자신의 위암 판정보다 그 여자와 나와의 관계를 더 억울해 했다.  
고속도로를 순찰하던 경찰차가 깜빡이를 키며 내 차 앞에 와 멎었다. 경관 한 사람이 나와서 도와 줄 일이 있냐고 정중하게 물었다. 나는 울고 있었지만 경관에게는 졸려서 잠을 잤다고 말했다. 경관은 퉁퉁 부은 내 눈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듯이 괜찮으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떡거리고 시동을 걸었다.
경찰 차가 가는 것을 보며 나는 달리는 차들 틈을 비집고 질주했다. 앞차가 속도를 늦추면 나도 늦추었다. 깜빡이를 켜지 않고 끼어 들어도 욕하지 않았다.
아내는 결국 내가 죽인 것이다. 그것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였다.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는 아내는 통증으로 죽어가면서도 그 여자와 나에 대한 미움을 삭이지 않았다. 병실에서 아내의 악담을 귀가 아프도록 들으면서 나는 그 여자를 생각했다. 그 여자의 몸을 생각하고 그 여자에게서 나는 향기와 그 여자의 자유를 생각했다.
병실을 나가면 여자에게 달려갔다. 여자는 달려드는 나를 품에 안고 토닥거렸다. 여자의 품에 있으면 행복해 미치겠다는 생각 뿐 다른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아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도, 그 아내가 퍼붓는 악담도 잊을 수가 있었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는 소리도 잊을 수가 있었다.
여자는 내 몸 속에 있는 오감들을 모조리 들떠 일어나게 했다. 바다 속의 수초들처럼 흐물거리는 오감들은 제각기 맡은 쾌락들을 향해 질주하였다. 어느 감각 하나 처지거나 뒤지지 않았다. 그 오감이 회오리바람처럼 한꺼번에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그것들이 마음껏 자신의 끼를 발산하고 나면 도덕이라든가 가족이라든가 가치관이라든가 하는 따위들이 머리 속에서 빠져 나와 귀찮은 휴지조각들처럼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  
만일 그때 누군가가 여자의 모습을 보면 그녀가 마치 살신성인하는 보살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런 여자가 쳐 놓은 쾌락의 미로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내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것은 아이들을 카나다로 유학 보내는 일이었다. 아이들에게 그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살게 하지 않겠노라고 했다. 아내는 자신의 자리를 그 여자가 차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못 견뎌 하며 죽었다.
아내가 죽자 합법적으로 아내 앞으로 된 재산이 모두 내게 들어왔다. 보험회사에서는 아내 명으로 들어놓은 거액의 암보험금을 위로의 말과 함께 전달했다. 나는 아내가 그렇게 많은 돈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내가 그리웠다. 아내가 그리울 수록 나는 여자를 탐닉했다.
어쩌면 나는 행복한 사나일지 모른다. 아내는 평생을 쓰고도 남을 만큼의 돈을 남기고 죽었다. 내 곁에는 함께 있기만 해도 너무나 행복해 죽고 싶은 그런 여자가 있다. 게다가 유학간 아이들은 현지에서 잘 적응해서 살고 있다. 아마도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처럼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일을 실행했다고 해도 이처럼 완벽할 수  있을까.
내 인생이 삐끄덕거리기 시작한 것은 여자에게 청혼을 했을 때부터였다.
“ 당신에게 원한 건 아무 것도 없어. 당신 호적에 오르고 싶다고 한 적도 없고 당신한테 돈을 달란 적도 없어. 난 언제나 당신이 주고 싶은 그만큼만 받았어. 더 달란 말도 하지 않았고 더도 필요 없어. 만일에 내가 호적에 올라야 한다면 그건 당신이 아냐. 내 전 남편.....내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내 전 남편이야. 당신이 원하면 난 당신께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어. 그렇지만 결혼만은 안 해. 내가 왜 그 지긋지긋한 결혼을 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챙기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그물에 칭칭 감겨 살아야 해. 욕해도 좋아. 헤어져도 좋아. 허지만 결혼만은 안 해. ”
나는 여자에게 살기 알맞은 집을 얻어 주었다. 그리고 은색 중형차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철철이 옷을 사 주었다. 여자가 좋아하는 회를 사 주기 위해 밤 새 고속도로를 달려 동해안을 찾기도 했다. 여자는 싫다는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았다. 언제나 내 의사에 순순히 쫓았다.
건설회사에 감원 바람이 일자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주식 시장이 열리는 시간이면 증권회사로 출근을 해서 장이 끝나면 여자를 만나는 것이 나의 하루 일과가 되어버렸다. 내게 남은 것은 아내가 남겨준 돈과 그리고 그 여자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자가 도망을 치다니.....  계획적으로 도망친 여자를 찾기란 쉽지 않을 테지만  어떻게든 여자를 찾아야 한다. 나는 수원으로 나가는 인터체인지를 빠져 나왔다.
내가 제일 먼저 간 곳은 여자의 전 남편과 아들이 살고 있는 수원 외곽에 있는  아파트였다. 서너 번 여자를 이곳에 데려다 준 적이 있었다.
칠이 여기저기 벗겨져 있는 이 십 년도 더 되었을 복도식 아파트였다. 가운데 경비 부스가 있고 150세대가 경비실 앞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한때는 중산층 젊은 새댁들이 살았을 법한 이곳 아파트 단지에 지금은 도시 하층민이 살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청소가 안 된 복도와 누군가가 야채를 심기 위해 마구 파헤쳐 놓은 화단과, 복도에 내다가 쌓아 놓은 버려도 좋을 만큼 해 묶은 그런 물건들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꾸뻑거리며 졸던 경비는 내가 사간 음료수 박스를 보더니 정신이 드는지 벌떡 일어났다. 나는 경비 주머니에 만원 권 지폐 몇 장을 쑤셔 넣었다. 경비는 자신의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날그날 들락거리는 외부차량을 모조리 기입해 놓았다. 여자가 다녀간 것은 닷새 전이었다. 더 이상 여자가 그곳에 들른 적은 없다고 경비는 말했다.
여자는 나와 만나면서도 가끔 이 아파트에 들러 이혼한 전남편을 만나 잠을 자고 왔다. 여자의 전남편은 이혼한 지 오 년이 되었는데도 재혼을 하지 않았다. 아들하고 둘이 그냥 살았다. 여자는 지금도 전남편이 자신과의 재결합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자는 아무에게도 속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경비의 묵인 하에 그곳에서 여자를 기다리기로 했다. 차에 들어가 앉아 있다가 다시 나오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끼니때가 되면 경비와 함께 밥을 시켜다 먹었다. 밤이 되니 견딜 수 없이 추웠다. 언젠가 여자가 크리스마스 때 어디선가 얻어온 사과초가 생각났다. 나는 조수석 앞의 작은 트렁크를 뒤져 그것을 꺼냈다. 아직 한 번도 불을 붙여본 적이 없는 초의 심지는 마치 성처녀 같은 느낌을 주었다. 불을 붙였다. 빨간 불이 타올랐다. 사과 향이 났다.  
나는 그 작은 불꽃이 차안을 덥혀 주리라곤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불기운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초를 켠 것이다. 놀랍게도 차안은 사과 초의 불기로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를 사랑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내 가슴은 여자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해 아내의 표현대로라면 미쳐가고 있었다.
여자를 처음 만난 것은 불행하게도 내 집에서였다. 그날 아내는 현관문을 따 주고는 베시시 웃으며 손님이 와 있다고 말했다. 손님은 부엌 식탁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나는 그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부엌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내 손님이 가는 현관문 소리가 났다. 아내가 방으로 들어와 옷을 받으며 수다스럽게 말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남편의 퇴근시간에 누군가를 집에 들여 커피를 마셨다는 것이 미안한 듯 했다.
“ 윗집에 사는 여자예요. 왜 먼저 번 집은 피아노 렛슨 하는 집이라 얼마나 시끄럽고 신경이 쓰였어요. 여러 번 싸우기도 했잖아요. 새로 이사온 윗층은 너무 조용해서 누가 사나 늘 궁금했거든요.
아까 저녁 찬거리 사 가지고 오다가 엘레베이터에서 그 여자를 만났어요. 오층을 누르니까 육층을 누르는 거예요. 그래서 인사를 했어요. 그때 막 오층 문이 열렸어요. 그냥 나오기 뭐해 커피 한 잔 하고 올라가라고 했더니 순순히 따라 나오더라고요. ”
여자들은 시장 다녀오는 길에 잠시 만나 커피를 마신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서로에 대한 정보를 그렇게 많이 교환할 수 있을까. 나는 밥을 먹으면서 아내의 멈추지 않는 이야기를 들으며 내내 신기해했다.
아내는 같은 나이인데도 열 살 정도 젊어 보이는 그 여자의 젊음과, 그 나이까지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혼자 사는 그 여자의 자유와, 몸에 걸친 것들 모두 가짜가 아닌 진품이라는 그 여자의 경제력에 대해 경이로움을 섞어 말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교직 생활 이십 년을 마치고 명예퇴직 해 아내의 표현대로 말하면 집에서 놀고 있다. 이십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혼자 힘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을 살고 그리고 막중한 맏며느리 역할로 힘겹게 살아왔다. 나보다 세 살이나 어리지만 함께 나가면 누나 같다는 소리를 빈번히 듣는다. 아내는 스스로 엄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구속받기를 좋아한다. 동료 선생들과 여행을 갔다가도 남들은 모처럼 집을 떠나 자유로움을 즐기는 그 밤을 아내는 혼자 애쓰고 돌아오기 일쑤다. 아무리 맏며느리라지만 피치 못해 시골에 못 내려가는 경우도 있으련만 아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내려가고야 만다. 그런 아내의 모습은 가끔 별 것이 아닌 곳에 목숨을 거는 사람처럼 보인다. 아내는 그런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만족한다.
게다가 아내는 알뜰하다. 옷과 화장품 사는데 알뜰하고 또 부모 형제들에게도 알뜰하다. 나는 아내가 그 돈을 어디다가 쓸 것인지 알지 못한다. 어머니가 대형 냉장고로 바꾸고 싶어할 때 아내는 동생들과 똑같이 나누어 대형 냉장고 값을 지불했다. 막내가 형은 맞벌이고 게다가 수입도 좋으니 좀 더 많이 부담할 것을 요구했으나 아내는 묵살했다. 나는 직장에서 전화로 동생들 구좌번호를 알아내 아내가 이미 받은 냉장고 값을 송금해 주었다. 아내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았는지 한 달 내내 말하지 않아 곤욕을 치렀던 적이 있다. 누구나 똑같이 땀흘리고 애써서 번 돈이라는 것은 아내가 늘 말하는 레파토리다.
아내는 재테크에도 능하다. 명예퇴직금은 일시불로 받아 강남에 아파트 한 채를 사 놓고 월세를 받아 퇴직 전 아내의 월급만큼 매월 통장에 들어온다.  그리고 내 월급은 따로 적금을 들었다가 목돈을 만들어 이천 원짜리 코스탁 주식에 투자했는데 몇 십 배의 이익을 남기고 빠져 나왔다.
많은 돈이 아내 앞으로 들어왔는데도 아내는 여전히 콩나물을 무치고, 백화점 상설시장에 누워있는 철 지난 옷을 사며, 지하철 정액권을 사 가지고 다닌다.
그런 아내의 눈에 여자는 어느 새 한심하면서도 놀랍고 경멸하면서도 닮고 싶고 질투가 나면서도 어여쁜 존재로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여자를 가까이 두었다가 나쁜 길로 빠질 수 있다는 충고의 말을 잊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우려해서인지 그 다음부터 아내는 여자의 이야기를 내 앞에서 꺼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조금씩 변해 가는 아내의 모습에서 그 여자와 교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내에게 조금 흥분된 듯한 모습과 한 톤 높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내의 하루하루가 이전과는 달리 활력이 있어 보였다. 예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아내의 모습이었다.
아내가 함께 퇴직한 여선생들과 여행을 떠난다고 한 것도 알고 보면 그 여자의 영향이었다. 며칠동안 이렇게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더니 몇 날 며칠을 전화통에 매달려 함께 떠날 일행을 모았다. 일행이 결정되자 아내는 친구의 차를 타고 훌쩍 전국일주 여행을 떠났다. 떠나면서 해외 여행의 전초전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아내가 떠난 날 밤, 초저녁잠이 많은 아이들은 먼저 잠들었다. 나는 모처럼 나만의 시간을 즐겼다. 위스키에 얼음을 넣고 창 밖을 바라보고 서서 술을 마셨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는 목마와 숙녀를 읊어주던 젊은 날의 어떤 여자애도 생각했다. 메말랐던 시심을 꽤나 오랜만에 반추해 내려고 애를 썼다.
고등학교 때 나는 원래 시를, 소설을 쓰고 싶었다. 금지된 정지용의 향수를 노트에 베껴놓고 외웠다. 메밀꽃 필 무렵을 따라 베껴 보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러한 나를 용납하지 않았다. 문과를 이과로 바꾸게 하고 그 당시 제일 전망이 있다는 건축학과를 보냈다. 나는 공대를 다니며 별 생각이 없는 친구들 틈에서 책 한 권 읽지 않고 지냈다. 그저 말초적인 쾌락을 쫓으며 아무 고민 없이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탄탄한 건설회사에 들어가 현장에서 노무자들과 잔뼈가 굵어 오늘날까지 왔다.
아내는 수학과 출신이다. 살아가는 모든 것을 산출된 공식에 대입해 원칙대로 살아가는 여자다. 아내는 공식대로 살 뿐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한 아내가 편하지만 가끔씩 나를 못 견디게 한다.
언젠가 내 차에 같은 방향의 직장 여직원을 태워주었던 적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안 아내는 여직원을 찾아가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앞으로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각서를 받고 한동안 아내의 감시의 눈길 속에 살아야 했다.
공식에 벗어나지만 않으면 내 생활은 언제나 편안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고민하지 않고 아내가 외워둔 공식 속으로 기꺼이 들어갔다. 그 공식 속은 죽음같이 안온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편안함만이 있다. 어쩜 아내는 내 몸 속에 있는 아내가 보기에 천박하다고 느껴지는 그러한 감성들의 싹을 잘라 버리려고 작정했을지도 모른다. 나의 감성들은 아내의 의도대로 하나하나 제거되었다. 아주 오래 전에  제거되었다고 믿었던 그 싹이 놀랍게도 아내가 없는 이 밤에 꿈틀거리는 것이 아닌가. 내 가슴속에 말라있던 그 싹은 봄비를 듬뿍 맞은 알뿌리 화초처럼 고개를 디밀고 올라오고 있었다.
위스키를 혼자 한 병째 마시고 있었다.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한강변에 붉은 꽃이 가득 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내의 강요에 의한 안온함이 아니고 나는 내 스스로 알콜을 집어넣어 안온한 상태로 몰입했다. 꽃인데 그 빛깔과 모양과 향기가 각양각색인 것처럼 똑같은 편안함인데 스스로 들어간 편안함의 세계는 아내가 만들어 준 것과는 모양이 달랐다. 향기가 달랐다.
현관 벨 소리가 울렸던 거 같다. 문을 열었다. 여자가 있었다. 젊었는지 예뻤는지 향기로웠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몽롱해 있었다. 여자는 코트를 하나를 걸치고 와서 내 앞에서 벗었다.

사우나를 하고 오니 어느 새 다른 경비가 부스 안에 있었다. 나는 새로운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 여자를 찾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새 경비와 사귀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다음으로 여자가 갈 만한 곳을 생각해 보았다.
두 번째로 생각해 낸 것은 여자의 동생이 사는 곳이었다.  내가 그곳을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것은 먼저 살던 집과 그곳은 이 십 분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일 억이나 되는 전세금을 나 몰래 빼서 달아났다면 아주 먼 곳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도 가 보기로 했다. 여자의 아들을 찾아갔을 때도 여자의 동생 아파트를 찾아갔을 때도 내가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주차장의 차를 살펴보는 일이었다. 여자는 동네 슈퍼마켓을 갈 때도 차를 몰고 갔다. 여자는 걷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운동은 일정한 시간을 정해 수영장에 가서 했고 그것이 끝나면 헬스를 했다. 차는 늘 여자 곁을 쫓아다니는 그림자와 같았다.
시동을 끈 차들은 꼭 숨을 멈춘 시체들 같다. 차들은 학살의 현장을 찍은 사진 속의 시체들처럼 늘어져 있었다. 낯익은 여자의 차를 발견한 것은 주차장을 한바퀴 다 돈 다음 건물 뒤 주차 공간이 좀처럼 있을 것 같지 않은 데서였다. 누가 보면 아주 깊숙이 숨겨놓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 번호와 색이 달랐지만 나는 첫눈에 그 차가 낯익었다. 새 번호 판과 도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차였다. 차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언젠가 수영장에서 누군가가 긁어 놓았다는 지렁이 모양의 흠이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니 흠이 그대로 만져졌다.
조수석 앞 유리창에는 나무가 하나 그려져 있고 그 옆에 108동이라고 쓰여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단지내의 차량이라는 것과 동을 표시해 놓은 것이라고 짐작이 되었다.
지금 여자는 동생 집에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달려가 여자의 멱살을 끌고 나오려는 것을 그만 두었다. 동생이 모르는 사람이라고 우기면 나는 그저 불법침입자일 뿐이다. 나는 여자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여자는 구태여 이름짓는다면 나의 내연의 처일 뿐이다.
나는 일단 내 차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주차시키고 여자의 차가 보이는 가장 먼 장소로 가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여자의 동생 베란다를 틈틈이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베란다에서 누군가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여자 쪽에서 내가 이렇게 차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라는 짐작이 갔다.  
낯선 남자가 서성거린다는 신고가 들어왔다며 경비가 내게 다가온 것은 저녁 무렵이었다. 나는 경비에게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찔러 주었다. 그리고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면서 돈 떼어먹고 도망간 사람을 찾는다고 말했다. 경비는 만일을 생각해서 라며 주민등록 번호를 적어 놓겠다며 가지고 갔다가 와서 돌려주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도록 행동하라는 의례적인 말만 했을 뿐 그대로 돌아갔다.  
얼마쯤 지났을까. 모르는 남자가 여자의 차에 오르더니 순식간에 아파트 광장을 빠져나갔다. 내가 그 차를 알아보는가를 시험해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를 향해 달렸지만 소용없었다. 여자가 나간 것이 아니라 일단 안심을 하기로 했다. 나는 다시 계속해서 그 차가 들어왔는가를 보기 위해 주차장 살피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 밤 중에 나는 내가 있던 곳과 반대쪽에 세워져 있는 여자의 차를 발견했다.
다음 날 아침 여자의 차를 지키다가 어제 저녁부터 굶은 배를 채우러 갔다가 왔더니 차가 없었다. 그 사이에 여자가 빠져나갔음을 알아 차렸다. 빵으로 아무렇게나 끼니를 메울 것을 잠시 후회했다.
여자가 빠져나간 그 곳에서 더 기다린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여자는 절대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때 떠오른 것이 108동이었다. 그래 108동을 뒤지자. 그러나 어디부터 뒤져야 할 지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아내가 죽었을 때도 이렇게 황당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죽은 아내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여자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들수록 나는 더욱 여자에게 빠졌다. 나의 아내에 대한 그러한 미안함은 아내가 쓰던 물건에 집착하면서 보여졌다. 일하러 오는 파출부에게 아내가 평상시 쓰던 그대로 유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파출부는 아내가 쓰던 보잘  것 없는 그런 물건들을 매일 닦아 놓았다. 아내가 살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집에서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했다.
어느 날 문득 여자가 내 집에 가 볼 것을 제안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없는 내 집에 여자가 온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것은 없었다. 게다가 나는 홀아비가 아닌가.
집에 들어온 여자는 불편한 듯 식탁 의자에 십 분 정도 앉아 있었다. 나는 여자의 얼굴에서 불편한 심기를 읽을 수 있었다.
여자는 기분이 상할 때는 심하게 손을 꺾는 버릇이 있다. 엄지손가락으로 검지 중간을 누르면 우두둑 하고 소리가 났다. 여자는 한동안 그렇게 있다가 아무 말 없이 가 버렸다. 내가 여자에게 청혼하기 전의 일이었다.
청혼을 하자 여자가 단호하게 거절한 것은 내 집에 방문했던 일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자가 이혼한 남편을 떠올린 것도 그날 이후일 것이다.  
나는 아주 가능성이 희박한 일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108동을 찾는 일이었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앉아 있을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는 나를 누군가가 본다면 정신병자쯤으로 오인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지도를 사다가 펴놓고 여자가 이사 갔을 법한 그런 지역을 체크했다. 안양 시흥 안산 정도에 있는 여자가 가지고 있는 전세금으로 얻을만한 집을 대상으로 108동을 찾기로 했다. 못 찾으면 차츰 반경을 넓혀갈 생각이었다.
안양에 있는 108동을 모조리 뒤져 여자의 차번호를 추적했다. 여자는 먼저 집에서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았다. 그러니 관리실에 자신의 차를 등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전적으로 경비에게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며칠동안 주차시켜 놓았던 차를 확인하기 위해 많은 음료수 값이 지불되었다.
여자의 차가 어디에서건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추적을 하다가 지치면 여자의 동생 집으로 가서 쉬곤 했다. 내 차가 여자의 동생 눈에 띠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내가 그곳에 나타나는 것을 알고 그곳에 여자가 오지 않을 것을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안양에 있는 24평 정도의 108동을 뒤지는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시간이 갈수록 여자에 대한 증오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전세금이 아까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내게는 아내도 자식도 없었다. 주위의 친지들은 여자와의 관계가 알려지고 부터 모두 다 내게 등을 돌렸다. 내게는 그 여자 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자는 어디에도 없다.
시흥의 아파트를 뒤질 때는 이미 내 정신이 아니었다. 눈앞에 여자가 있으면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 여자를 질겅질겅 씹어 먹는 꿈을 꾸기도 했다. 여자가 눈앞에 있고 내 손에 총이 쥐어졌다면 나는 당장에 여자를 쐈을 것이다. 그것도 한방이 아닌 수 십 발의 총을...
이미 나는 경비들에게 음료수를 사 주어가면서 108동을 찾는 그런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다. 그래도 일은 계속되었다. 낮에 사우나에 가서 목욕을 하고 잠시 쉬는 일 외에는 108동 찾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날은 안산에 있는 아파트를 뒤졌다. 108동을 뒤지고 다니면서 여자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린 지는 오래이다. 습관처럼 아파트 숲을 돌아다니다가 108동이 눈에 띠면 경비에게 며칠동안 차량이 들락거린 장부를 얻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는 쉴 때는 여자의 동생 아파트를 찾아갔다. 사람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남편과 이혼한 여자를 고운 시선으로 볼 리가 없었다. 여자 주위에 있는 친지들은 모두 여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오로지 동생만이 여자 곁에 남아서 살림살이 같은 궂은 일들을 돌보아 주었다. 여자는 자신의 수족처럼 움직여 주는 동생을 떠나서 살 수 없을 것이라 짐작되었다. 나는 여자가 언젠가는 이곳에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여자의 동생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건너 편 아파트 단지에 108동이라는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환각인 줄 알았다. 거리를 달리다가도 108동만 눈에 들어오는 환각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두 달째 108동을 찾아 헤매는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환각이 아니라고 확신한 순간 머리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여자는 동생이 살던 건너편에 살 생각을 했을 만큼 배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을 만큼 여자는 당돌했다.
언젠가 아내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려는데 여자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아내는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누르며 기다려 주었다. 나는 여자에게 다른 이웃여자에게 하듯이 약간의 아는 체만을 하였다. 아내가 먼저 내리고 비닐 쇼핑백 봉투를 정리하여 들고 내리는데 여자가 뒤에서 슬며시 엉덩이를 만졌다. 내가 손을 떼자 여자의 손이 내 사타구니 속으로 밀고 들어왔다. 나는 급히 엘리베이터를 나왔다.
여자의 차는 아파트 동에서 많이 떨어져있는 공터였다. 아파트 전체를 빙글빙글 돌다가 혹시나 해서 빈 공터를 뒤지기 시작하여 겨우 찾아낸 소득이었다. 경비에게 준 음료수 값 덕분에 쉽게 여자가 사는 동 호수를 알아낼 수 있었다. 경비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선선히 그것을 알려 주었다. 너무 쉽게 말해주는 경비의 태도에서 혼자 사는 여자를 경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자의 집 앞에는 조그만 언덕이 있었다. 그곳에 서면 여자의 집안이 아래로 건너다 보였다. 여자의 집 베란다는 버티칼이 쳐져 있었다. 밤에 불이 들어오자 그 안에 사람이 어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가족은 아무도 없이 혼자 서성거리는 모습이었다.
나는 여자의 집에 들어갈 궁리를 하였다. 어설피 갔다가는 여자는 문도 열지 않고 그냥 도망칠 것이 뻔했다.
우선 과일가게에 가서 사과를 한 박스 샀다. 그리고 여자의 집으로 배달을 부탁했다. 과일가게 남자는 한푼도 깍지 않고 선뜻 돈을 냈을 뿐 아니라 배달료라고 웃돈까지 얻어 주는 나 때문에 신바람이 난 듯 했다. 자전거에 사과박스를 싣는 모습이 아주 흥겨워 보였다.
나는 과일가게 남자 자전거를 따라갔다. 문을 열지 않으면  어떻게든 문을 열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벨을 누르자 안에서는 기척이 없었다. 과일 장수가 여러 번 벨을 누르자 마지못해 누구냐고 물었다. 당연히 여자의 목소리였다. 남자가 사과배달 왔다고 말했으나 여자는  문을 열지 않았다. 남자는 내가 시켰던 대로 일 단지 사시는 동생 분이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안에서 열쇠 따는 소리가 났다.
문소리를 들으며 여자를 어떻게 할까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하얗게 질린 여자의 머리채를 잡을지도 몰랐다.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여자를 발길로 후려치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문을 연 여자는 과일가게 남자 뒤에 서 있는 나를 보고 예상했던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그렇지만 문을 거칠게 밀고 들어가는 내게 여자는 싹싹 빌지 않았다. 나는 발길로 후려칠 기회를 잡지 못했다. 대신 여자는 거만하게 팔짱을 끼고 서서 내가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을 때처럼 일상적인 목소리로 이제 와요 하며 말했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여자가 내게 남은 마지막 사람이라는 생각이었다. 여자가 전세금을 빼 가지고 도망을 쳤다는 사실이 별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가 지금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과일가게 남자가 나가고 나자 여자가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그 속에는 어리광까지 섞여 있었다. 나는 내가 여자를 거실 카페트 위에 쓰러뜨리고 옷을 벗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자는 나에게서 도망쳤다. 나는 두 달 동안이나 한데에서 자며 증오에 차서 그 여자를 찾아다녔다. 그러한 사실이 여자의 어리광을 보는 순간 잊혀졌다.  
여자는 급하게 서두르는 나를 다독거려주고 여자의 방식대로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나의 몸을 구석구석 핥아 내려갔다. 여자의 혀는 봄바람 같았다. 증오를 서서히 녹여주는 따뜻한 봄바람이었다. 여자의 손길은 내 몸의 구석구석을 만지며 그 동안 잠자고 있었던 내 몸 속의 감각을 살아나게 했다.  
그런 여자의 모습은 언젠가 석굴암에서 보았던 부처의 모습이었다. 여자는 한 중생을 확실히 구원해준 보살이었다.  몇 달 동안 여자를 향해 끓어올랐던 증오만큼의 사랑과 쾌락이 녹아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내 몸 안에서 피어올랐다.








'구자용','2003-02-17','기형적인 성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은 것일까?'
'최성희','2003-02-18','소설인 줄은 알고 읽었지만 참 설득력있다.  작가가 여자인 것을 알고 읽어서인지 처음에 남자 narrator 목소리 찾는데 조금 노력이 들었다.  좋은 작품 고마워!!!!'
'정순호','2003-02-18','중년독자들을 위해서 한줄씩 뛰어주시면 덜 지루하겠네요 108동 이 108번뇌를 연상시키려는 의도신건가요? 남자가 읽기에는 많은 동감도 가긴하는데 보살여자분 착한문제아 같은 기분이 드네요 제식구 들에게도 이소설 읽게 하겠읍니다 감사합니다'
'전영희','2003-02-18','끝문단을 읽고서, 그 다음 상상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내가 아직도 인생을 덜 살았나? 참으로 풍부한 상상력과 필력이 오늘 아침 나를 칭칭 휘어 감는구나.'
'정옥','2003-02-18','은희경 저리가라구나.장편으루 다시 써서 출판하면 베스트셀러가 되지않을까..돈많이벌면 한턱쏘고.^^*'
'이초연','2003-02-18','성에 탐닉하는 것은 좀 그렇지만.. 가끔씩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순전한 나만의 나 이고 싶을때가 있다..'
'안광희','2003-02-18','나는 막간에 혹 여동생이 이여자와 동일인물이 아닌가? 단순하지만, 다시 남편과 살고있지않은가? 별별 추측을 다해봤건만...저 남자..정말 벼랑끝에 선것같다.'
'안광희','2003-02-18','근데 명희야, 밑에 남은공백 혹시 얘깃거리가 더있는것 아니니? 아님, 상상을 해보라고 남겨둔 \'여백의 미\' 인거니?'
'전영희','2003-02-18','상상력을 동원하여:마지막 장면후 야구방맹이로 여자를 팰까? 둘이 결혼하여 살까? 내 돈 내놓으라고 아귀다툼할까? 보살님 품으로 영원히 복상사 할까? 별병 상상을 다하지만....답은 없지?'
'김명희1','2003-02-18','문체가 담백한 것이 작가와 닮은 것 같아. 나도 남자들 심리를 좀 아는데 (남자친구가 많아서....히히힛) 심리를 잘 표현한 것 같아. 다시한번 너가 자랑스러워 내가 또 취한다.'
'이기열','2003-02-19','여행을 갔다가도 밤을 도와 돌아오던 여자는 환골탈태를 마치지 못했기에 지금쯤 구천을 헤매고 있을 듯... 바보... 백화점의 누워있는 옷을 남성독자들도 알까? ㅎㅎ. 그리고 차안에 켜놓는 사과초 실험해 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