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완서 소설가

다들 멈춰 선다.

한번도 멈춰선 적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바쁜 사람들이 여기 저기 멈춰서 있다.

생전 처음 멈춰서 보는 것처럼 스스로 어색해하면서도 행복하게 멈춰 선다.


나는 멈춰 섬을 멈추고 한발 물러나 내남직없이 바쁜, 어쩌면 바쁜 척이라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멈춰 섰다 움직였다 하는 걸 바라본다.

 나의 멈춰 섰던 시간은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순간도 그리움이 되면 길어진다.

 나의 일상의 쫓기는 시간들, 아무 것도 안 할 때조차 숨 가쁘게 그러나 승산 없이 달려야 하는 나날에도 잠시 멈춰서는 서늘한 여유를 도입해보고 싶어진다.


저걸 하나 훔쳐갈까.

서울 도심에서도 한복판, 광화문이 이웃인 두가헌의 한옥마당은 거짓말처럼 고풍스럽고, 아무렇지도 않게 놓인 돌확들은 하나쯤 훔쳐가도 자리도 안 나려니와 누가 감히 소유를 주장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게 무심해 보인다.

나는 나의 도심(盜心)에 티끌만한 죄의식도 없다. 그러나 그 무게를 어쩔 것인가.

그 중 가장 작은 것이라 해도 사람의 힘으로 슬쩍 할 수 있는 한계 밖의 무게를 지닌 바위 수준의 돌들이다.


지금 물과 만나 물풀이나 이끼를 기르기 전의 돌들을 조각가 이영학의 집에서 본 적이 있다.

 맨 처음 그의 집을 구경 갈 때, 같이 간 친구는 골목이 복잡한 그의 집을 다음에 쉽게 찾으려면 문 밖에 쌓인 돌만 보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집 안팎에 엄청난 돌들을 쟁여놓고 있었다.

 세월의 풍상으로 자연스러워진 옛날 대갓집이나 정자의 댓돌이나 주춧돌 같은 돌들이었다.

그 무거운 것들을 그렇게 많이 모으기까지의 눈 설미보다는 욕심 같은 게 더 많이 느껴져 그에게 친밀감을 가질 순 없었다.


나의 경원감은 아마도 언제 분출할지 모르는 예술가 내부의 제어할 수 없는 에너지에 대해서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가 전국각지에서 모아 들인 돌 안에 숨은 형태를 끌어내기 위해 미친 듯이 돌을 깨부수고 쪼고 다듬을 줄 알았다.

그러나 돌확전에서 만난 그의 작품에는 돌과 사투를 버린 흔적은 찾아지지 않았다. 그는 마치 돌을 애무하듯이 조금밖에 상처내지 않았다.


그가 돌에게 한 짓은 상처에 물을 주어 물풀이나 이끼를 키우게 하는 일이었다.

그가 돌에게서 찾고 싶어 한 것은 숨어 있는 형태가 아니라 더 깊이 숨긴 돌의 꿈이 아니었을까.

 돌의 꿈은 흙의 꿈보다 훨씬 더 연하고 수줍은 원초적인 녹색이다.

생물과 무생물, 영원불변의 고체와 영원히 일정한 형태를 지닐 수 없는 물이 만나 만들어낸 살아있는 조형물 사이를 조각가 이영학은 서늘한 모시 고의적삼 차림으로 어슬렁거리고 있다.

마치 그는 그것들의 결합의 중신아비 노릇 외에는 아무 짓도 안 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