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                 최백호



첫사랑이란 낱말을 들을 때마다 내겐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대학입시에 실패해 재수를 하고 있던 스무 살에 만난,
내 친구의 여자친구와 가까운 친구였던 그녀는
긴 머리에 덧니가 귀여웠던 대학 초년생이었다.  

위로 누님만 둘뿐이었던 나는 예쁜 여동생을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고,
쫑알거리는 입모양과 밝은 웃음, 청바지에 하얀 운동화 차림의 그녀 모습은
내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녀에게 빠져서 공부도 가족도 버리고 매일 그녀를 만나러 다녔다.

그녀는 내가 다니던 화실에 갑자기 찾아와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고,
친구들과 어울리던 바닷가 막걸리집 앞에
약속도 없이 기다리고 있어 나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그때 한창 기타에 심취해 있던 나는
톰 존스의 ‘딜라일라’ 를 불러주기도 하며 꿈같은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비극적인 사랑의 노래 ‘딜라일라’ 였는지 모르겠다.)

당구를 처음 배우면 방천장이 당구대로 보인다더니....
나에겐, 천장뿐이 아니라 벽이나 문,
아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에는 그녀의 얼굴이 겹쳐져 있었다.  
마치 넋나간 사람처럼 그녀의 이름만 부르고 다녔으니...

그러나 그때의 나는 그녀의 손 한번 잡지못한, 밤새워 가슴만 두근거리던 팔푼이었다. (사실이다.)

어떻게 손 한번 잡아보려고 일부러 가파른 길로가서 손을 내밀면,
그녀는 픽! 코웃음치며 땅을 짚고 올라왔고,
그녀의 집앞 골목에서 포위를 좁혀가며 손을 (정말 손이다) 잡으려하면,
얼굴이 빨개져서 살짝 몸을 빼어 뛰어가버리던, 아!
그 시절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아서 도대체 뭘 어쩌겠다는 것이었는지........

그렇게 세월아 네월아 재수생 주제를 잊고 살던 것도 잠시,
지금도 항상 아픔으로 남아있는 어머니의 죽음,
철없이 어머니의 품에서만 자라왔던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이라는 회오리바람에 휘말리게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멍하니 앉아있던 어느 날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끝이었다.

그러나 사람살이 인생살이라는 것이 참으로 희한한 일이어서
그 뒤 십수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그녀의 손을 잡게 되었다. 꼭 한 번,
가슴 두근거림도, 짜릿한 감동도 없이,
그냥 두 시간쯤 지나고서야  ‘아, 그 손을 잡았었구나’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그녀와의 이별,

그 충격에 ‘부선망 독자 입대면제’ 라는 혜택을 마다하고 군대엘 갔다.
‘입영전야’ 라는 노래는 없었지만
친구들과 밤새워 마신 막걸리를 토해가며 까까머리 군인이 되었다.
1년여의 군생활을 마쳐갈 때 약해질대로 약해진 내 몸은
결핵균을 이겨내지 못하고 의병제대를 하게 되었다.

그 후 몇 년 너무도 힘든 생활 속에서 문득,
노래를 부르면 돈을 벌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되고,
그 막연한 생각이 거짓말처럼 현실로 다가와 가수가 되었다.
조금씩 이름을 얻어가며 노래를 하던 어느 날  ‘호강에 빠져 요강에 X 싼다’ 는 옛말처럼 나는
내 목소리가 듣기 싫다는 핑계로 부산으로 내려가
선배가 운영하던 나이트 클럽의 얼굴사장 노릇을 하며 살았다.

나 하나만 믿고 따라온 아내와 아무 생각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날 찾는 손님이 있다는 연락에 종업원이 가리키는 자리로 무심히 갔다.
장사가 꽤 잘 되었던 그 나이트 클럽에서는 나를 찾는 사람들이 꽤 많았었다.

부부인듯한 두 쌍의 남녀가 기다리고 있었고 그 중 한 남자가
“XXX 라고 아십니까?”  하며 내 가슴에 녹슨 못으로 박혀있던 그녀의 이름을 묻는 것이 아닌가.
좀 놀라긴 했지만
“예, 잘 알지요.” 라고 하자 자기 옆의 부인인듯한 사람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XXX 아닙니까....... 오래 되어서 기억을 못 하시나보죠.”  라고 하는게 아닌가.
희미한 조명아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여인.......
나는 그 때 세월을 보았다.  실체의 세월을, 허무의 세월을......

“집 사람이 옛날부터 최백호씨를 잘 안다고 얘기했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악수나 한 번 하시죠.”  

당황해있던 나는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고, 손을 잡았고........그리고 놓았다.
그토록 잠 못 이루며 쥐어보려 했던 그 손을  
“안녕하세요?” 란 바보스러운 인사까지 곁들여가며 잡았다 놓았다.
그날 밤
평소와 달리 일찍 집에 들어가 어리둥절해 하는 아내에게,
살랑거리며 애교를 떨었던 건 또 무슨 짓거리였는지......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라는 ‘낭만에 대하여’ 를 내놓고
“낭만이 뭡니까?” 하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나도 낭만이 뭔지 모른다.
“낭만이란 이런거지요.” 라고 집게로 집어내놓을 수도 없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낭만입니다.”  라고 선을 그을 수도 없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주변에 있었던 모든 것들이 아닐까!
세월이 흐르며 사라지기도하고, 낭만이라는 빛깔로 남이있기도 하는
파스텔 그림처럼,
어릴 적 친구의 흰머리처럼........
그렇게 서서히 변색되어있는 우리의 삶이 아닐까.

그렇지만 나의 첫사랑에 대한 낭만은, 분명히 선을 그을 수가 있다.
처음 만나 가슴 조이며 사랑하고, 헤어지고,
남의 아내가 되어 만나 무심히 나누었던 악수의 그 순간까지,
그 십여년의 세월을 낭만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래!  차라리 그때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손이라도 잡지 않았더라면,
나이 더 들어 흰머리 파뿌리 되어서라도 마누라 몰래 숨겨놓은
더 길고 끝없는 향기로운 비밀 하나 낭만적으로 간직하고 살았을 텐데....

바이 바이 낭만이여, 내 가슴에 다시 올 수 없는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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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본 사람은 벌써 알았겠지만 이 글은 가수 최백호씨가 1996년에 쓴 글이다.
이 때만 해도 나는 ‘낭만에 대하여’ 라는 노래를 알지도 못했다. 물론 들어본 적도 없었다.

여기에 나오는 이 소녀가 김자옥은 아니겠지.
물론 바닷가에서 같이 살았던 마누라도 김자옥은 아닐것이고....
이 글을 보고나서 나는 막연히 최백호를 좋아하게 되었다.
어딘지 약하고 바보스럽고 순진하고 착하고 그래보이지않는가?
여성의 모성본능으로 감싸주고싶어지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작년에 나는 미사리 라이브 카페에서 그 사람,  최백호의 노래하는 모습을
5 미터 이내의 거리에서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흠~~~~
반백의 머리에 빛바랜 청바지
흐릿한 조명아래 드러나는 깊은 주름살과 흘러내리는 땀방울
힘겨운듯한 탁한 허스키의 목소리

아!  나도 같은 말을 하고싶다.
나도 그 때 세월을 보았다.  실체의 세월을.....  허무의 세월을....

바이 바이 낭만이여. 내 가슴에 다시 올 수 없는 것이여.  (3기, 조영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