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진규 은사님을 생각하며/신 금재

 

새벽에 전화벨이 울리면 가슴이 철렁한다. 

분명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일 텐데 무슨 일일까.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하게 된다.

수화기를 들려하자 벨소리는 멈추었다. 

잠시 후 다시 울리기에 얼른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거기 캐나다인가요. 혹시 신 금재 씨 댁이 맞는지요.”

귀에 낯익은 목소리, 아 김 진규 선생님

"안녕 하세요."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1976년 인일여고 3학년 9반 우리 담임선생님.


그때 우리 집은 더 이상 가난할 수 없는 아주 어려운 형편이었다.

황해도에서 피난 내려오신 연로하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대신하여 생계를 꾸려가던 어머니마저 신장병으로 앓아 누우셨다.

아마도 일 년 전 내가 대장 수술로 몇 개월 입원할 때 어머니는 너무 무리하셨던 게다.


은사님은 알라스카 크루즈 여행을 하신다고 하셨다.

밴쿠버에서 출발하여 다시 밴쿠버로 돌아오는데 

크루즈 여행을 마친 후 로키를 돌아보고 캘거리 우리 집에 방문하고 싶다고 하셨다.


“네, 물론이지요. 환영합니다.”

은사님이 여행하시는 동안 다행히 카톡이 연결되어 

우리 집 마당에 핀 튤립 사진을 보내드렸다.

돌이켜보면 나는 참 성의 없는 제자였다.


2001년 캐나다로 이민 와서 은사님에게 인사도 드리지 못하다가 

2006년 첫 수필집 -로키에 봄이 오면-을 출판할 때 

반 친구를 통하여 추천 글을 부탁드렸는데도 흔쾌히 받아주셨다.

단아한 수필의 향기-라는 제목으로,

은사님은 우리 학창 시절의 자그마한 일까지도 기억하셨고 

청어 이야기의 비유를 들어 멋진 추천의 글을 써주셨다.


그 후로 나는 캘거리 문인 협회에서 활동하면서 

두 권의 시집도 출판하였지만 은사님을 까마득히 잊고 지내왔다.


중간에 고국 방문을 하면서, 은사님이 근무하시는 공주대학교를 방문하였고 

학교 근처를 돌아보며 부여 낙화암을 여행시켜주시던 추억은 

간간히 떠오르는 그리움으로 마음속에 남아있을 뿐.


드디어 은사님이 오시기로 한 날

아들 내외는 근사한 저녁 테이블에 

알버타 산 쇠고기로 야채를 곁들인 스테이크를 준비하였다.

은사님과 사모님은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오셔서 환한 웃음을 지으셨다.


우리 동네 살고 계시는 사모님 동창 되시는 선배님도 

우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시면서 지난 옛 추억을 나누었다.

알라스카를 여행하시는 동안 추우셨다는 이야기

로키를 돌아보면서 아름다운 절경에 감동하셨다는 이야기 등을 

나누다가 은사님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시더니 집중해주세요, 하셨다.


교회 장로님이시니 우리 가정을 위하여 기도해주시려나 하였는데 

작은 메모지에 시를 쓰셨다고 하셨다.



마음으로 피는 꽃/김 진규


입술을 꼭 다문 소녀 인일의 소녀 *미사의 집 뒷마당엔 붉은 채송화가 피어있었다

삶의 무게까지 엷게 미소를 지으며 글쓰기를 너무도 사랑했던 문학소녀

꿈은 날개가 되어 태평양을 건넜겠지 얼마나 추웠으랴 얼마나 외로웠으랴

흔들리는 가지에도 꽃은 피듯이 

먼 나라 이곳 캐나다 캘거리에도 미사의 집 앞마당엔 튤립이 피었다

겨울이 추워도 철새는 돌아오듯이 

꽃은 미사의 낯익은 몸짓이다 내 몸 찢기어 이룬 사랑이다

아직도 꽃씨를 심고 가꾸는 미사는 꽃을 든 여인이다 마음으로 피는 꽃


(*미사는 지은이의 고등학교 교사 때 제자 신 금재 시인의 아호)


은사님의 시 낭송을 듣자 그냥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 나의 마음을 아니, 나의 살아 온 그 세월에 공감해주고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정어머니가 많이 아프실 때 아마도 나는 결석을 하였고 

은사님은 배꼽산 아래 돌 축대 우리 집, 

그 누추한 집을 방문하셨고 뒷마당에 피어났던 붉은 채송화를 떠올리셨다.


숭의 교회에 출석하실 때 목사님 설교 집을 탈고해드린 것

이민 살이의 그 깊은 외로움으로 글을 써야만 했던 것

내 몸 찢기어 이룬 사랑-이라는 구절에서는 숨이 턱, 막혀왔다.


은사님이 추천의 글에서 표현한 

한 마리 청어로 그 거친 물결을 헤치고 여기까지 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캐나다에서 소수 민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정부에서는 모자이크 문화라고 해서 소수 민족 문화도 존중해주긴 하지만 

언어와 문화가 다른 주류 사람들을 따라가는 것은 어렵다.


그래도 데이케어를 운영하면서 케네디언 학부모를 상대하다 보면 

이민자에 대한 배려를 볼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어느 덧 추수 감사절이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하다.

가장 순수하고 섬세했던 사춘기를 

인일의 교정에서 배울 수 있었고 

그 교정을 떠난 후에도 언제나 인일의 향기는 내게 남아 

나를 키워주는 힘이 되어주고 있다.

 

들국화가 피는 계절, 

지금쯤 통일동산에는 하얀 꽃이 무더기로 피어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