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명신 장군]

나 채명신. 전우를 사랑해 여기에 묻히다.

채명신 장군이 장군묘역을 마다하고 건군 이래 최초로 사병묘역에 묻혀 잠들었다.

해방직후 김일성이 같이 일하자고 회유하였지만 공산당의 본질을 꿰뚫어본 채명신은 이를 뿌리치고 월남하여 국군에 들어왔다.

母胎信仰을 가졌던 채명신은 이들과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채명신은 516에 동참하였다. 전방에서 후방으로 들어오는 길목이 되는 양평 양수리에서 야전군 사령부 참모의 저지를 받았으나,

‘사단 전 장병과 함께 혁명에 동참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하고 서울로 진주하였다. 516을 이제 모두들 군사정변이라고 한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하나, 보다 더 긴 시간이 흘러 516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장도영 참모총장과 이한림 야전군

사령관도 혁명의 당위성에는 공감하였으나, 장면 정권에 대한 의리와 유엔군사령관의 작전통제권 때문에 주저하였을 따름이다.

419 혁명 당시 국군도 궐기하려고 하였으나 장면 정권의 등장으로 잠시 미루어졌다가 결국 폭발한 것이 516이다. 516은 터키의 케말파샤나

이집트의 낫세르와 같은 군사혁명이었다.

그러나 채명신은 10월유신에는 반대하였다. 10월유신은 516군사혁명의 대의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채명신이 중장으로 예편하고 오랫동안 대사로 외국을 돌아다니게 된 것은 박정희가 채명신을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한신, 이병형과 채명신이 군에 있었더라면 군에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1970년대에 일어났고 결국 10.26에 이른 것은 군에나 국가에

다 같이 비극이었다.

채명신은 월남전에서 두코 전투, 짜빈둥 전투에서 중대전술기지전술로 미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625전쟁에서 미군에게 배운

한국군에게 미군이 월남전에서는 한국군에게 배우는’ 상황이 되었다. 이것은 채명신이 파월 초기부터 한국군 독자의 작전권을 확보

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채명신의 성공의 요체는 대게릴라전에서 주민과 군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라는 것을 꿰뚫고, 월남 주민의

마음을 얻기 위한 정치심리전을 구사한 것인데, 이는 채명신이 유격부대인 白骨兵團의 지휘관이었던 경험에 기초한 것이었다.

채명신은 대유격전에서 적을 둘러싸고 있는 주민의 마음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휘 통솔에서는 장병의 마음을 얻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永眠의 터로 같이 싸운 장병들이 잠들어 있는 사병묘역을 택한 것은 果然 채명신 장군답다.

채명신 장군은 살아서 국군의 龜鑑이요 英雄이었다. 죽어서는 軍神이 되었다. (이상 김국헌 장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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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벚이 만개한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엘 가니, 사람은 많아도 고요하고 참 아름답다. 

영웅들이 잠든 현충원 한구석에 웬 사람들인가 웅성거려.... 가보니, 채명신 장군의 묘역이다.

돌아가신지 벌써 여러 해 건만 화환과 참배객이 끊이질 않는다. 그저 길거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재향군인들..... 하시는 말씀,

박정희한테 밉보여 대장 못달은거야! 아니.. 이 양반이 대장이나 원수가 아니었던가, 싶어 서방님 김장군의 에세이를 들추어

[군신 채명신] 글제목을 찾아 내었다.

 

마침 얼마전 베트남 여행을 하여,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과 한국군, 한국군과 베트남 사람들의 관계를 공부했겠다!

서방님의 지적이 딱 맞는다.  그 지겨운 월남전을 마친 베트남 사람들은 미국은 혐오하지만 한국은 좋아하고 흠모한다.

대적하여 전쟁을 치룬 나라에서 존경을 받는 전쟁지휘관과 그의 나라! 참말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