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즈음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그것은 우리가 목회 사역을 처음 시작할 때
남편과 내가
주님앞에서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서이다.

남편이 신학을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인격으로나 신학으로나
다른 사람들을 잘 인도할 자격이 없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궂은 일하는 것은 할 수 있으니
그 일에 써달라고 주님께 약속한 것이다.

남편이 신학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첫 사역지가 나타났다.
하나는 우리 합동측 장로 교회에서
가장 장자격인 대형 교회의 부교역자 자리였고
하나는 경기도 광주 거여동(현재는 서울 소재로 바뀌었다)에 있는
장애자들의 교회였다.
남편은 첫 사역지가 제출한 서류 심사에서
합격된 것을 너무 기뻐했다.
그것은 앞으로 남편의 목회의 길에
빛나는 경력으로 자리 매김 될 것이고  
남편의 실력을 어디서나 고스란히 인정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 부러워하는 소리를 들으며
우리 부부는 설레이는 밤을 맞이했다.
그런데 문제는 매일 밤에 드리는
가정 예배에서 드러났다.

나는 기뻐서 어쩔줄을 모르며
"우리나라에서 최고인 교회로
뽑히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소리높혀 크게 기도했는데
커다란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것이었다.
남편도 나와 똑같았는지 기도를 중간에 마치고
"이게 아닌데..."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곳은 우리가 주님과 약속한
남이 가기 싫어 하는 궂은 일자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리는
수많은 사람이 앞다투어 가고 싶어 하는 자리가 아닌가?

우리는 그 날밤의  갈림길에서
그 좋은 교회를 포기하고
거여동의 장애자 교회로 결정했다.
그 곳은 단 한명도 지원자가 없는 사역지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택한 거여동  교회는
성도들의 대부분이 중증 장애인들이었다.
발에 고무 튜브를 끼고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눕거나 기어다니며
수세미등을 팔아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비닐 하우스를 개조하여 교회 공간을 만들었고
교회를 중심으로 닥지 닥지 그들의 거처가 지어져 있는 곳이다.
그나마 남의 땅에 지어져 있어서
조만간 비닐하우스가  철거될 것이라는 위기의 교회였다.
그들은 그런 교회에 자원해서 온다는 목회자니 뭐 볼 것이 있겠냐고
한 주간 버티면 잘 버틸 것이라고 빈정거리며 앉아 있었다.
우리는 우선 그들이 올바른 신앙인이 되는 것이 급선무여서
한 명씩 그들의 인생의 깊은 상처를 치유해 나갔다.
몸보다 더 중증을 앓고 있는 그들의 영혼은
작은 위로의 말 한마디에도 한번 터지면
몇시간을 그칠줄 모르고 엉엉 울어대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이 쏟아놓는 아픔의 소리를
그들의 심정이 되어 글로 적어 나갔다.
또 얼마 안 있으면 갈 곳 없는 그들이  
길가로 내몰릴 사정도 글로 호소했다.
그 내용을  선교회에서 발행하는 문서 선교지에 올렸는데
그 것을 본 한 장로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3층으로 된 견고한 교회를 지어주게 된 것이다.
1,2층은 그들의 숙소로
3층은 예배당으로 지은 것이다.
장애인 교회이니 엘리베이터를 설치해 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기적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 청년은
그의 삶을 수기로 써 놓은 글을 보고  
건강하고 예쁜 아가씨가 나타나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그 이듬해 그들에게서 예쁜 딸 아이가 태어났다.

그 이후 외부로부터 어느 정도 교회 후원도 받을 수 있게 되어
이 교회에도 일하겠다는 지원자가 여러명 생겨나게 되었다.
그 곳이 더 이상 궂은 일 하는 곳이 아니라고
모든이가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곳을 떠났다.
후에 우리는 그 뇌성마비 청년이 목사님이 되었고
그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의 두 번째 목회지로는
청계천 노점상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 곳이 종로 5가 로얄 빌딩 12층 이다.
노점을 하는 상인들이
차가 무섭게 달리는 길가에서
어린 아이들과 물건을 그대로  펴놓고 장사한다.
혹시 구청에서 단속이라도 나오면
물건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도망가는 부모에게서
아이들은 언제나 무방비 상태로 버려진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은
버려진 아이들을 위한 무료 탁아소 였다.
오전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12시간을
노점 상인들의 아이를 돌보는 일이었다.
퇴근 시간은 정해져 있어도
8시가 넘어서 10시가  되어도
아이들을 데리러 오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노점상들은 쉬는 날도 없으니
우리 탁아소에는 주일 이외에는 휴일이 없었다.
60명의 아이들을 3명의 선생님이 보살폈다.
나는 매일 그 아이들의 점심과 저녁, 간식을 마련했다.
한 번도 힘든 기색이 없이
진정으로 헌신하고 봉사하는 선생님들이 고마와서
무엇이든지 그들을 위해 일하고 싶었다.
부모님의 고맙다는 인사 한 번 변변히 받는 적도 없이
선생님들의 꽃다운 나이의 시간들이
그 곳에서 3년이 흘러갔다.

그 즈음.
서울에 있는 어떤 교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불이 나서
아이들이 죽고 심한 화상을 입는 대형 사고가 일어났다.
그 사고로 정부에서는 2층 이상의 어린이 보육 시설을 모두 폐쇄 시켰다.
국가에서 반 강제적이었기 때문에 우리 무료 탁아소도 폐쇄되었다.
아무런 대책없이 또다시 아이들을 길가로 내몰게 되었다.
또 번화한 시내의 상가는  교회같은 비영리 단체에게 임대할 수 없었다.
건물 주인에게 과중한 세금이 책정된다는 것이었다.
우리교회는 상가 건물을 임대 했던 것이여서
부득이 그 곳을 떠나야만 했다.

우리의 세 번째 목회지는
강제 이주 철거민들과 장애인들에게
서울시에서 분양한 아파트 밀집 동네이다.

아파트가 밀림처럼 들어서자
길가의 상가마다 교회가 수없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가 별로 없다.
영구 임대 아파트 지역!
바로 이 곳이 일하기 어려운 궂은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는
시영 아파트 단지내에 있는 상가 건물 지하에 있다.
중랑천이 범람하는 위험 수위는
우리 교회를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수해 때마다 거르지 않고
수영장 처럼 물이 넘치기 때문이다.

교회가 하나, 둘...떠나는 이 곳에서
우리는 14년째 목회를 하고 있다.

이 동네의 가난 속에 우리도 깊숙히 들어와서
이들과 똑같이 가난하게 살아간다.

우리 교회는 항상 문을 열어 놓는다.
혹시 잘 곳 없는 사람도 마음놓고 들어와 잘 수 있도록.
배고픈 사람은 교회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기도 하는 것은 어느때든지 항상 할 수 있다.
24시간 문열어 놓는 이 작은 일 하나에도 시중이 만만치 않지만
가난한 교회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니!
  
14년이 지나가는 동안
이들은 우리를 정말 사랑하고
우리도 이들을 지극히 사랑한다.
그런데 왜 우리 부부에게 갈림길의 선택에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어느새 이 곳이 내가 안주하고 싶은 편한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곳 사람들에게 좋은 목사님으로 대접받고 있다.
이젠 이 곳도 누구든지 오고 싶어하는 교회가 되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는 궂은 일, 궂은 곳에
한 살이라도 더 늙기 전에 가야하지 않을까?
요즈음 이 물음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갈림길에서 올바른 이정표는 항상
우리 부부를 이렇게 지시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