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의 안익태 선생이 친일파로 객사한 슬픈 이야기가 있다.

요즈음 친일파 논쟁이 다시 재연되고 있는 가운데, 과연 안익태가 친일파가 맞는지 아닌지 그의 일생을 재정리하면서 세세히 따져 보기로 한다.

안익태는 1906년 12월 5일 평양의 돈많은 여관집 안덕훈 씨와 김정옥 여사 사이의 7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나중 나운영 씨는 안익태 추도사에서 "1월 10일생"이라 하기도 했다)
여섯 살 때 찬송가 풍금 소리에 이끌려 동네 예배당을 다닌 것이 음악에 눈을 뜨게 된 동기였고, 몰래 풍금을 건드리던 안익태 어린이는 일곱 살 때 큰 형님 안익삼이 일본에서 동경에서 사 가지고 온 바이올린에 완전히 넋을 잃어 버렸다. 불과 6개월 연습에 간단한 찬송가를 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늘어 버렸다.

1914년 평양의 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학교 취주악부에도 들어 가게 되는데, 이번에는 트럼펫에 넋이 나갔다. 아버지를 달달 볶아서 트럼펫까지 확보한 안익태 어린이는 학예회 때마다 바이올린과 트럼펫을 양손에 들고 펄펄 날았다.

1918년 숭실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그 음악 실력이 인정되어 바로 관현악단에 들어갔고, 1919년 2학년 때에 벌써 음악부장이 되어 버렸다. 음악부장이 되자 자기 집에 있는 일본제 축음기를 학교로 갖고 와서 '작은 음악회'를 여는 등 음악에 관한 한 안익태 학생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러자 동생의 음악적 재능을 기특히 생각한 큰 형님이 이번에는 첼로를 사다 주었고, 여름방학 때 서울로 올라 와 카나다 선교사에게 특별과외까지 받은 안익태 학생의 인기는 더욱 올라갔고 평양 시내 각 교회의 가장 인기 있는 특별 손님이 되었다.

이 해는 3.1운동이 일어났던 해라 서울에서부터 기독교 학생회 형, 누나들이 몰려 와서 독립이 어쩌고 했는데, 이 때 안익태 학생은 스코틀랜드 민요 가락의 "애국가"라는 노래를 처음 들어 보았다고 한다.

안익태는 1919년 2학년 때 학교에서 친일 교사 추방 운동에 주도하여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학교에서는 무기정학까지 당했다고 한다. 오로지 음악밖에 모르던 안익태 학생이 주동자가 되었다니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기는 하다. --- 아마도 교회에서 배운 "애국가"란 노래를 학교에서 못 부르게 하니까, 음악에 관해서는 누구의 제지도 받은 적이 없던 안익태 학생이 발끈하여 그 교사를 학교에서 몰아 내려 한 것이 아닌가 짐작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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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당시에 학생들에게 유행되었던 "애국가"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실, "애국가"란 제목의 노래는 1896년 대한제국 수립 이후 "독립신문"에 실린 것만 수십 편이 넘는다. 작자 이름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었다. "독립가"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계에서도 "애국가" 같은 것을 한번 만들어 보자 하여 이상재가 주선하여 대성학교 교장 윤치호, 화가 지운영 등 기독교인 4명을 지운영의 집에서 모이게 하여 공동 작업에 들어 가서 4절까지 만들었고, 나중에 안창호가 앞뒤 몇 군데를 수정하여 "윤치호 자네가 현재 교장으로 있으니 그냥 자네를 작사자로 하세"라고 하여 그 때부터 작사자는 윤치호가 되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주요한과 윤치영의 증언에 의한 것임)

지운영(이 지운영이라는 사람은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형님이기도 하다)이 자기 앞집에 살던 서양 음악 강사 김인후에게 애국가의 곡을 붙여 보라 하였더니,

당시 우리 나라 기독교 찬송가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김인후도 스코틀랜드 민요에서 곡을 따 왔다. "올드 랭사인(Auld Lang Syne-- 전세계적으로 12월 31일 밤에 잘 부르는 노래)"이라는 곡에다 이 애국가 노랫말에다 붙인 것이다.

이 악보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1910년 9월 21일자 "신한민보"(안창호 신민회 신문)에 "국민가"란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이 곡이 언제부터인가 "애국가"란 제목으로 바뀌어 버렸다고 한다.

경신, 배재, 이화 등 여러 학교에 강사로 나가던 김인후 교사는 1909년 경부터 각 학교에 이 노래를 퍼뜨렸고 한일합방 이후 이 노래의 출처를 조사하던 경찰에게 붙들려 가는 신세가 되었다고 하는데, 경찰 취조 과정에서 '곡은 일본 친구 나라 영국 것이고 가사는 옛날부터 내려 오던 것'이라 둘러 대었다고 한다. 이 교사는 결국 재판에 회부되어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게 되는데, 죄명은 '풍기문란' 죄였다고 한다.

어쨌든 이 노래가 기독교를 통해 계속 이어지다가 1919년 3.1운동 때에 기독교 학생들을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이 노래가 안익태에게도 들려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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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안익태를 아깝게 여겼던 교장 "마우리" 박사는 안익태를 갑자기 평양기독병원에 입원시키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경찰에 붙들려 가지 않도록 도와 주었고, 안익태 학생은 본의 아니게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형님과 일본으로 간 안익태는 1920년에는 일본어 실력을 쌓기 위해 사설강습소에 다녔고, 1921년에 동경 세이소꾸 중학교에 음악특기자로 입학하게 된다. 5년 졸업 후 1926년 동경고등음악학교(지금의 동경 국립 음대)에 진학해서는 지도교수의 주선으로 예과 1학년 때부터 일본, 조선 전국 각지에서 첼로 독주회도 가지는 등 음악가로서의 경험을 쌓아 갔다.

1928년 본과 2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등록금을 낼 수가 없게 되자 "동경회관"이라는 양식 집에서 "첼로"를 연주해 주며 1년간 등록금을 벌었다고 한다. ( 이 때 바이올린으로 아르바이트하던 동료가 있었는데, 안익태가 30년 뒤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어 다시 동경회관을 방문할 때까지도 그 자리에 있길래 즉석에서 300달러를 주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1930년 졸업하여 평양에서 첼로 연주회를 개최하려고 하자 경찰이 제지하였고, 안익태는 아예 미국 유학으로 방침을 바꾼다. 일본에서 미국 가는 배를 타기 전에 송별연에서 친구와 후배들에게 "언젠가는 런던 교향악단을 지휘하고 말 거야"라고 외쳐서 놀림감이 되기도 하였다. --- 그러나 그 꿈은 나중에 정말로 현실이 되고 말았다. ---

안익태 청년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한국인 교회에서 다시 접한 "태극기"와 "애국가"는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11년 전 3.1운동 때 잠깐 보고 들었던 것인데, 여기 미국에서는 정말 겁도 없이 태극기도 게양하고 애국가도 마구 부를 수 있고... 정말 별천지였다.
( 이 애국가 노래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공식적 노래가 되어 전세계 한국 교민들의 애창곡이 되어 있었다. 참, 그리고 최근에는 1931년 LA 한인 교회에서 만든 노래책에서 "윤치호 작사 애국가" 악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애국가 악보와 가사를 잘 베껴서 넣고 음악학교가 있는 신시내티로 향했다. -- "언젠가는 이 애국가의 곡을 내가 다시 쓰고 말 거야"라고 맘 속으로 외치면서 -- 이 때 한인 교회에서는 이 기특한 25세의 동포 청년에게 등록금에 보태 쓰라면서 헌금을 모아 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때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는 미국 서부지역 밤의 환제로 군림했던 마피아 보스 '제이슨 리'(한국명 이장손/하와이 이민 1기)였다. 제이슨 리는 헐리우드의 숨은 실력자로 에바 가드너와 잠깐 동거하기도 했고, 그레이스 켈리를 발굴하고 프랑크 시나트라를 톱스타의 대열에 올려놓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시카고의 '알 카포네'의 목숨을 살려준 적도 있는, 알 카포네보다 더 막강한 사람이었다.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회 헌금 상태는 괜찮은 편이었으며 하와이 한인교회와 함께 상하이 임시정부의 중요한 돈줄이 되었다. 물론 자금 전달책은 이승만이었다.

1931년 신시내티 음대 2학년 때 안익태는 신시내티 시립 교향악단 첼로 주자로 입단하게 되고, 여러 곳에서 첼로 독주회도 갖게 된다. 당시 "워싱턴포스트" 신문의 기사를 보면, "안씨가 연주한 '첼로'의 'D단조협주곡'은 놀랄만한 기교와 세련된 소리를 가지고 청중을 도취시켰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안익태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신시내티 관현악단 생활에서 첼로보다는 작곡과 지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선배 박윤정의 도움을 받아 필라델피아 음대에 편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레오폴드 스토코브스키'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관현악단에 연습단원으로 들어가 지휘를 배우면서, 또 커티스 음대에도 등록하여 '프리곤 라이어'로부터 작곡 기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1935년 조업 직후 하숙비 낼 돈도 없으면서 뉴욕교향악단 주최의 '작곡 콩쿠르'에 참하기 위하여 열심히 곡을 썼다.

제목은 "한국환상곡(코리아 판타지)" -- 11월에 뉴욕 카네기 홀에서 안익태 자신의 지휘로 그 곡이 연주되었는데, 이 때 출품한 곡은 현재의 절반밖에 안 되는 소품이었다. 그러나 곡을 연주하는 주자들이 동양인 안익태를 우습게 보고 너무 불성실하게 연주했고, 화가 난 안익태는 중도에 내려 와 버렸다고 한다.

"미국은 역시 문화 후진국이야... 유럽으로 가자" 안익태의 마음은 어느 사이엔가 유럽으로 가 있었다. 1936년 초에 안익태는 무작정 유럽행 배를 탔다. "유럽에서 최고가 되어야지.."

그렇다면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가는 누구일까?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 1933년 11월 히틀러 나치 정권으로부터 "제3제국 국가음악국 총재"라는 중책을 임명 받은 당대 최고의 음악가가 생각이 났다.

보통 때 같으면 감히 만나 볼 수도 없는, 엄청나게 높은 사람이었지만 하늘이 도왔는지 스트라우스는 나치 정부의 미움을 받아 공직을 박탈 당한 채 빈에서 가택 연금 중인 처지였다... 그래서 바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영국으로 망명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작가 '츠바이크'의 대본으로 오페라를 준비 중이었고, 이를 나치 정부가 알고 만류하였으나 스트라우스가 그냥 밀고 나가다가 총재직에서 쫓겨 난 것이었다. 스트라우스는 누구든 실력이 있다고 인정되면 무한정 도와 주는, 좀 특이한 성격의 음악가였다.

어쨌든 괴짜 스트라우스가 안익태를 잘 보았는지 빈에서 "바인가르트너"에게 지휘를 배우도록 주선해 주었고, 안익태는 스트라우스 집에 들락날락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72세의 스트라우스가 집에 그냥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치 정부로부터 뭔가 큰 과제를 부여받아 곡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곡은 바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기념 행사에 사용될 "올림픽 찬가"였다. 나치 정부가 스트라우스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던 것이다.

올림픽이라 --- 참, 이번 올림픽에는 일본 선수단에 우리 조선 청년들도 많이 선발되었다는데 ---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위해 이번에 "응원가"를 한번 작곡해 봐야지 -- 그럼, 가사는 어떡한다? --- 참, 그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베껴 왔던 "애국가" 가사를 활용하면 되겠군.

안익태 본인의 말에 의하면 1936년 6월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악상이 떠 올랐고, 그걸 바로 "애국가"의 곡으로 삼았다고 한다.

1936년 7월 스트라우스는 자신이 작곡한 "올림픽 찬가"를 직접 지휘하여 발표하였고....
며칠 후 8월 1일 히틀러가 참석한 개막식에 당당히 입장한 안익태는 개막식 직후 메인 스타디움 서북쪽 코너에 웅성웅성 잡담하고 있는 손기정, 남승룡 등 조선 동포들을 발견하였다.

무조건 뛰어 가서는 구깃구깃 악보를 펴더니 손기정, 남승룡 선수에게 다짜고짜로 "내가 여러분들을 위해 조선 응원가를 만들어 왔으니 함께 부르자"라고 했고, 어리둥절해 하는 조선 선수들 7명과 함께 안익태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 "를 불러 댔다.

1936년 8월 1일 히틀러가 막 퇴장하고 없는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서북 코너 ---- 이 곳이 바로 세계 최초로 지금의 우리 나라 애국가가 발표된 곳이었다.
그리고 8월 9일 일장기를 가슴에 단 손기정 선수가 영국 선수를 제치고 세계신기록으로 메인스타디움으로 들어올 때, 손기정의 눈에 제일 먼저 띈 광경이 '두세 명의 청년들과 안익태가 거의 미친 듯이 큰 소리로 애국가를 부르는' 광경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직접 영광의 금메달을 걸어 줄 때에도 손기정 선수가 '세상에서 가장 고뇌스러운 표정을 지었던' 까닭이 저 쪽에서 들려 오는 안익태 무리의 애국가 소리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적어도 이 날 손기정에게는 독일 군악대가 연주하는 일본 국가 "기미가요"보다 저 쪽 스터디움 한 켠에서 들려 오는 "애국가" 소리가 더 크게 들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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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던 현진건 씨가 이 손기정 선수의 기분을 알았는지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에 냈고, 그 때문에 동아일보는 무기정간됐었다. 이 현진건 씨가 2005년에 와서야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일본 여권을 가지고 독일에서 만났던 두 평안도 청년의 만남 --- 이 만남이 적어도 손기정에게는 평생에서 가장 큰 충격이었다. 수십 년 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스터디움을 다시 찾았을 때에도 그 때 안익태를 만났던 서북쪽 코너 좌석에서 한동안 앉았다가 왔다. 손기정에게는 히틀러보다도 안익태가 더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손기정은 그 이후 일본말을 일체 쓰지 않았으며, 누구에게 사인해 줄 때에도 한글로 "손기정"이라고 써 주었다고 한다. 참, 말년에 일본 말을 한번 쓴 적이 있기는 있다. 일본의 최고문학상인 "아쿠다카와" 상까지 받은 젊은 재일교포 여류작가 "유미리"를 만났을 때였다.

손기정은 유미리에게 일본말로 "너의 할아버지는 훌륭한 장거리 선수였다"라고 말해 준 적이 있는데... 유미리가 간 뒤에 "친구의 손녀가 한국말을 모른다고 해서 중간에 통역을 붙일 수야 없지 않는가?"라고 하여 주위를 숙연하게 했다. 유미리는 나중에 그 말을 전해 듣고 물론 눈이 퉁퉁 붇도록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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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는 이 악보를 즉시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회로 보냈고, 이 악보는 이승만을 통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되었고, 그 이후부터는 "애국가"가 우리 나라 청년 안익태가 작곡한 것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1936년 10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서 1937년 6월에 템플대학 음악대학원에서 음악학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아마도 이 때 졸업논문 대신 제출한 악보가 "애국가" 합창 부분을 추가한 "한국환상곡" 악보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1937년 11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음악학교에 특별연구생으로 들어가서 "코다이"의 지도를 받고, 주위의 도움으로 1938년 2월 아일랜드의 더블린 국립교향악단을 직접 지휘하여 세계 최초로 "한국환상곡"이 발표된다.

안익태가 지휘하는 한국환상곡의 가장 큰 특징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 연주되든 합창 부분의 애국가는 반드시 한국어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초연 때 더블린 합창단은 물론이고 나중에 일본에서 한국환상곡을 지휘할 때에도 일본 합창단에게 한국어로 애국가를 부르도록 했다.

더블린 국립교향악단의 지휘를 성공적으로 끝낸 안익태는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로부터 크게 인정을 받았고, 불과 몇 개월 뒤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교향악단에서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교향곡"과 스승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교향시 죽음과 정화"를 지휘하게 되었는데...

이 역시 큰 성공을 거두어 1939년부터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자신에게 들어 온 대부분의 지휘를 안익태에게 바로바로 넘겨 버린다. 괴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히틀러 나치 정권의 간섭에도 아랑곳 없이 유대인과 공동 작업을 계속한 적이 있지만, 문화 후진국인 일본에서 왔다는 안익태에게도 주위의 걱정스러운 염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업무를 팍팍 넘겨 버렸다.

스트라우스는 상대가 실력이 있다고 인정만 되면 유대인이든 일본인이든 일본령의 조선인이든 인종차별 같은 건 전혀 없이, 그냥 믿고 맡기는 괴짜였던 것이다. 무작정 무림의 고수를 찾아 나선 안익태 역시 굉장한 괴짜였지만, 이 두 괴짜의 만남은 이후 유럽과 전세계의 음악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어쨌든 당대 유럽 최고였던 리하르트 스트라우스 대신 몇몇 굵직굵직한 연주회에 지휘를 나가다 보니 안익태는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유럽, 아니 세계의 최정상급 지휘자 대열에 서게 되어 버렸다.

옛날 꿈에도 그리던 런던교향악단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와 미국에 이르기까지 실로 정신없을 정도로 초청되었는데, 1959년 5월까지 안익태가 지휘한 횟수를 누군가가 세어 보니 무려 232회가 되더라고 한다. 거의 매달 여기저기로 불려 다녔다는 이야기이다.

1940년인가 일본에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에게 "개국 2,600주년 봉축기념 서곡"의 작곡을 의뢰한 적이 있는데, 이 때에도 스트라우스는 안익태를 대신 보내서 지휘하도록 했다. 그 다음 해에 일본이 중-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일본은 안익태에게 만주 관동군 위문공연 지휘를 부탁했으나, 안익태는 "벌써 몇 년치 예약이 다 되어 있는데요" --- 그래서 안 갔다.

참, 안익태가 로마 공연에서 이탈리아 최고의 권력자 무솔리니도 만났었다. 무솔리니가 기립 박수를 치면서 "일본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 에키타이 안 선생 만세!"라고 했다가 안익태가 "나는 코리안이요."라고 대드는 통에 갑자기 머쓱해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와 안익태 -- 이 두 괴짜는 천하의 독재자 히틀러도 아예 제껴 놓은 사람들인데, 세상에 누가 있어 감히 이들에게 시비를 걸겠는가? 안익태의 여권은 비록 일본국 것이지만 안익태는 어디를 가든 당당한 한국인이었다.

안익태는 "한국환상곡"을 유난히 좋아하여 1년에 평균 2번 정도는 지휘했다. 그 때마다 "애국가" 합창 부분은 번역을 불허했고 언제나 한국어로만 부르게 했다. 그 때문에 주최 측과 여러 번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렇게 안 하면 안익태가 안 오겠다고 하는 걸.....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이 돌아 왔다. 이제는 더 이상 일본의 여권을 갖고 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여권도 대한민국 것으로 빨리 교체해야겠고.... 그리고 이제는 빨리 평양으로 돌아가서 장가도 가야지... 흐흐흐....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는구나..."

해방이 되면 고향에 가서 고향 처녀와 결혼하려고 나이 40이 되도록 아직 홀몸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일본의 여권으로 히틀러 나치 정권의 혜택을 엄청나게 받았던 안익태를 반겨 줄 곳은 지구상에 거의 없었다. 82세의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당장 나치 정권의 협력자로 고발되어 영세 중립국인 스위스로 피신해 버리고, 안익태도 얼떨결에 같이 갔으나 일본 국적의 안익태는 스위스에서도 가시 방석이었다.

서울로의 귀국? 그건 말도 꺼내 보지 못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 선생도 미군들이 허락을 안 해서 한참 있다가 돌아 오게 했는데, 히틀러 나치 정부의 총애를 받던 안익태를 미국이 좋아 할 리가 없었다. 안익태 자신은 몇 년 전 무솔리니에게도 당당히 "나는 한국인이요"라고 밝힌 적이 있지만, 미국 쪽에서 볼 때에는 안익태가 그저 나치 정권의 협력자일 뿐이었다.

갑자기 국제 미아가 되어 버린 안익태는 독일의 아는 사람 소개로 스페인 바르셀로나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으나, 안익태에게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국적이 필요했다. 일본은 이제 죽어도 싫고, 한국은 근처에 오지도 못하게 하니 역시 글렀고, 제3의 국적이 불가피한 시점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산다더니.... 이 때 안익태에게 걸린 지푸라기가 하나 있었다. 스페인 무슨 왕족의 딸인가 하는 처녀가 몇 년 전에 선생님의 지휘 모습을 보았다면서 찰싹 달라 붙었다. 고향에도 돌아갈 수 없는 허탈한 신세가 된 안익태는 모든 게 자포자기 상태였고, "에라, 스페인이면 어떠냐.."

1946년 안익태는 10살 연하인 스페인 처녀와 결혼을 하였고, 스페인 국적도 취득했다. 다행히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정권이 안익태의 음악성을 높이 평가하여 국적 취득을 허락해 준 것이었다. 그래서 안익태는 히틀러 치하에서 프랑코 치하로 넘어 가게 되었다. 이상하게 독재자일수록 예술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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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르카 섬의 팔마 시에 좋은 집을 하나 장만하는 게 어떨까요?"
파란 눈의 젊은 아내 로리타 여사의 간절한 청을 안익태는 단칼에 잘랐다.
"아냐, 안 돼! 난 한국에 돌아가서 한국의 집을 살 거야... 조금만 기다려 봐..."
안익태의 마음은 벌써부터 고향 땅에 가 있었다. 로리타 여사는 남편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 로리타의 신혼 생활에는 셋방살이로 시작되었고...
비운의 주인공 안익태는 끝끝내 우리 나라에 집 한 채 장만 못하고 객지에서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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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 --- 지중해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섬 마요르카는 세계적인 거장 안익태의 정착으로 갑자기 시끌시끌해졌다. 안익태가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하기 전에 안익태를 오랫동안 붙잡아 둘 명분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요르카 섬은 교향악단을 창단한다고 발표했다. 단장은 물론 '마에스트로 안(거장 안익태)'을 추대하자는 계획이었다.

스페인 프랑코 총통 결재도 났고, 어차피 오갈 데 없는 '거장 안익태'도 단장직을 수락했다. 이로 인하여 안익태의 바쁜 생활은 다시 계속되었다. 보금자리가 안정된 안익태는 다시 예전처럼 세계 각지로 돌아 다녔고, 런던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여전히 세계 최정상급 지휘자의 대우를 받았다. 덕분에 조용한 섬 마요르카도 엄청나게 많이 홍보가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서울에서는 임시정부 때부터 불러 오던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정식 국가(國歌)로 공표했는데, 정작 안익태에게는 한 마디 연락조차 없었다. 하기야 옛날 임시정부 때에도 안익태에게 허락 받고 불렀던 건 아니지만....

나치 전범 재판에서 무죄로 입증된 리하르트 스트라우스는 안익태와 함께 1947년 런던에서 "스트라우스 음악제"를 1개월 동안 개최하였으나 노령에 건강 악화로 1949년 독일 바이에른 자택에서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다.

이에 안익태는 "나의 스승 스트라우스"라는 책자를 발간한다. 일본어판이었다.

1950년에 조국 대한민국에서 또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리는 듯하더니 1953년에는 전쟁이 끝났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렸다. 그러나 조국 대한민국은 언제나 마음 속의 고향일 따름이었다.

그러던 중 1955년에 정말로, 정말로 반가운 소식이 들려 왔다. 조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팔순 생일잔치를 하는데, 해외동포들의 입국도 허락한다는 소식이었다.

안익태는 무조건 비행기를 탔다. 그리고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났다. 이승만 대통령이 말문을 열었다.
"요즈음 스페인에서 고생이 많다며? 유럽에서 크게 성공했다지? 참, 그때 샌프란시스코 교회에서 나 만난 것 기억 나나? 벌써 25년 전 일이구만.."
"글쎄요, 그 때는 경황이 없어서.. 누가 누군지.... 그 때 어르신들이 너무 고맙게 도와 주셨지요"
"그 때 교회에서 애국가 가사 베끼는 모습이 눈에 선한데... 결국은 나중에 일 냈더구만.. 지금은 우리 국민들이 모두들 잘 부르고 있다네.. 정말 고맙네.."
프란체스카 여사도 한 마디 거들었다.
"제 고향이 오스트리아 빈인데... 요즈음 거기도 많이 달라졌겠지요... 앞으로 자주 들어 와서 고향 소식 좀 전해 주세요"

이승만과 안익태, 짧은 만남이었지만 안익태로서는 이제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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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안익태의 등장은 그 동안 잊고 지냈던 "애국가" 작사자에 관한 논쟁에 다시 불을 지폈고, 1955년 한 해는 이 문제로 또 한참 시끄러웠다.

수많은 학설 중에 윤치호 작사설이 가장 유력하여 윤치호 작사자 안을 놓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표결에 들어 갔으나 찬성 11표, 반대 2표가 나와 만장일치를 보지 못하여 그냥 "작자 미상"으로 놓아 두자는 쪽으로 결론을 짓고 말았다. 반대 2표는 윤치호 만으로는 아직 좀 약하니 안창호로 하자는 쪽이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애국가 작사자는 "작자 미상"으로 되어 있다. 최근에 윤치호 작사설을 확인시켜 주는 1910년과 1931년 자료가 나와서 이제는 윤치호 작사로 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애국가 작사 당시 윤치호, 지운영, 안창호 등 여러 사람이 같이 협의하여 결정했다는 증언도 많기 때문에 윤치호 단독 작사로 하지 말고 "윤치호 등 작사"로 하는 것도 좋은 해결책의 하나가 될 것 같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작자 미상"은 국가의 위신에 문제가 될 수 있다.

참, 지난 1948년 애국가의 가사가 또 바뀌었다. 가사 중의 "하나님"이 특정 종교를 연상할 수 있다고 하여 하늘을 의미하는 "하느님"으로 바꾼 적이 있다. 어차피 애국가의 작사는 여러 사람의 공동작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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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는 스페인으로 가자마자 한국 공연계획을 짰다. 안익태로서는 꿈에도 그리던 고국 공연이었다. 옛날 일본서 음대를 졸업하고 평양에서 첼로 연주회를 하고자 했을 때는 경찰이 막았지만, 이번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든든한 후원이 있으니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그런데, 그냥 보통의 연주회로는 뭔가 부족한 것 같다. 이 감격을, 이 기쁨을 음악으로 표현할 길은 없을까... 그렇다... 현재 3악장으로 되어 있는 "한국환상곡"을 4악장으로 완성을 하자, 그래 좋다...

사실 1936년 "한국 환상곡" 3악장에 "애국가" 합창 부분을 추가한 이후 벌써 20년이 흘렀다. 이번 기회에 제4악장을 추가하여 "한국 환상곡" 작곡의 최종 마무리를 지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 먹었다.

지난 20년 간 조국에는 2차 세계대전과 6.25 한국동란이란 두 차례의 큰 전쟁이 휩쓸고 지나갔지만.... 지금 나라가 건재하고 국민들이 활기에 차 있으니, 아직 희망은 있는 것이야... 아, 아직 희망은 있다, 우리 민족에 좌절이란 단어는 이제 영원히 없다...

1956년에 안익태는 "한국환상곡" 제4악장 작곡에 착수했고...
그 4악장은 군인들의 행진곡으로 시작하여 제3악장의 "애국가" 멜로디가 다시 등장하면서 끝이 난다.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은 1935년 뉴욕 카네기 홀에서 1, 2악장이 발표되었고, 1936년 베를린에서 "애국가"가 만들어진 뒤, 이를 3악장으로 추가하여 1938년 더블린에서 발표되었다가....
이제 1957년의 서울 공연을 위하여 마지막 4악장이 드디어 완성이 된 것이다.

"솔도시라 도솔미솔 도레미파미레.. "로 이어지는 3악장의 주제 멜로디는 독립국가 '대한제국'의 존재를 알리는 소리일 수도 있고, 3.1운동 때 젊은 학생들의 우렁찬 외침일 수도 있고, 대한민국 상하이 임시정부의 존재를 만천하에 알리는 소리일 수도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스터디움에서 처음 울렸던 이 애국가 멜로디는 이 한국 환상곡 전체를 감싸는 음악으로 추가되면서 영원한 "희망의 메아리"로 승화되고 있었다.

1957년 안익태는 결국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서 음악회를 개최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크게 치하하면서 "애국가" 작사자 안익태에게 문화포장을 수여하였다.

지휘 여행하랴, 작곡도 하랴, 서울도 왔다갔다 하랴, 너무 바빠진 안익태는 마요르카 교향악단에게 미안했는지 1959년 고별 연주회를 갖고 공식적인 단장직을 사임한다. 그렇다고 악단을 아주 떠나는 것은 아니었고, 집은 계속 마요르카 섬에 있었다.

1961년 박정희 장군의 5.16 군사혁명 직후 안익태는 다시 서울로 왔다. 박정희 장군 역시 화끈한 성품이었다. 박정희 장군이 안익태에게 우물안 개구리 한국음악의 발전을 위해 적극 도와 달라고 요청한다.

그래서 흩어져 있던 음악단체들을 통폐합하고 단일화된 한국음악협회의 출범을 도왔고, 국제음악협회의 가입도 주선해 주었다. KBS관현악단과 이화여대에서 연주회도 지휘했다. 박정희 장군은 안익태 선생의 탁월한 능력으로 내년부터 서울에서 세계적인 규모의 국제음악제를 열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한다.

이상하게도 역사적으로 독재자라고 욕을 먹는 사람들이 안익태에게는 모두들 잘해 주었다. 독일의 히틀러는 안익태가 세계적인 명성을 굳히는 데 지대한 공로가 있었고, 스페인의 수십 년 독재자 프랑코 총통은 국제적인 미아가 된 안익태를 받아들여 가정과 직장을 장만해 주었으며...
또 독재자라고 하와이로 쫓겨난 이승만 대통령도 안익태에게만큼은 은인이었는데, 이번에 한국의 새로운 지도자 박정희 장군까지 이토록 잘해 주니 안익태로서는 이런 희한한 인연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 지... 어쨌든 안익태는 바빴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이 안익태를 너무 좋아한 것이 화근이 되어 국내에 안티 안익태 그룹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예 모함하는 세력까지 나타났다.

"우리가 국내에서 일본 놈들에게 고생고생할 때 저 놈은 바깥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지금에 와서 통반장 다해 먹으려 하는군"
"말이 유럽이지, 제일 깡촌 시골의 악단장 출신인 주제에 엄청 잘난체 하는군..."
"국제음악제? 흥, 놀고들 있네.."
"누가 뭐래도 쟤는 친일파야, 친일파... 박정희도 친일파... 두 친일파끼리 죽이 잘 맞는군..."

안익태도 그 말을 들었다. 안익태는 슬펐다.
"전 세계에서 나를 서로 불러 가려고 난리들인데, 유독 내 조국만큼은 왜 이리 나를 냉대할까? 혹시 내가 애국가를 잘못 작곡해서 그런 건 아닐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났다. "에라, 언제 내가 누구 눈치 보고 살았나? 그냥 추진해 나가자.. 언젠가는 내 진심을 알아 주겠지.."

그래서 1962년 5월에 5.16 군사혁명 1주년 기념행사를 겸해서 "제1회 국제음악제"를 열렸다. 안익태는 뿌듯했지만 국내 음악계 인사 중에는 안익태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

국내 음악계의 비협조는 1963년 제2회 국제음악제의 일부 프로그램을 광주까지 내려가서 운영해야 하도록 만들었다. 광주일보사 초청으로 광주에서 일부 행사를 가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때만 해도 광주 사람들이 박정희와 안익태에 대해서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

거의 안익태의 "나홀로 음악제"로 시들해지던 국제음악제가 1964년에는 음악제 중간에 아예 중지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김종필-오히라 각서의 일부 내용이 공개되면서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격화된 것도 음악제 중단 이유의 하나였다.

덕분에 안익태에게는 과거 40년간 항상 꿈속에만 있던 경주 석굴암, 해인사, 진주 등을 볼 수 있는 천금같은 시간이 생겼다. 안익태는 이 여행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하며, 필생의 대작인 교향시곡(全4악장)을 구상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땅에 마지막 글을 남기고 간다. 그 때만 해도 이 여행이 안익태의 마지막 고국 방문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우리의 강산과 대자연은 모두가 화려하고 아름답게 합리적으로 꾸며진―금수강산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사는 우리 민족은 모순과 불합리 속에서 허덕입니다.
예술과 아름다운 전설의 나라, 정서(情緖)의 나라가 예술을 잃고 전설을 망각하고 법(法)과 지능(知能) 속에서 진실을 속이며 웃음과 즐거움을 잃고 사는 가련한 민족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이 단결하여 힘을 합한 곳에 우리들의 희망과 빛나는 건설의 역사가 멀지 않다는 것을 나는 믿고 우리 금수강산을 세계에 자랑하여 서울이 동양의 아테네가 될 줄로 믿습니다.」

1964년 아시아 최초로 일본에서 동경 올림픽이 개최되었는데, 안익태가 올림픽 기념으로 동경에서 ABC교향악단 지휘를 맡게 되어 안익태 친일파 논쟁이 다시 일어났고....

또 1965년은 박정희 정부에서 일본과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였고, 야당과 학생들이 격렬하게 한일회담 반대 데모를 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도 안익태의 보호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1965년에는 국제음악제가 아예 열리지도 못했다.

우리 나라에서 "너, 친일파지?" 라고 하면 최대의 욕인 상황에서 안익태는 동경 올림픽 때문에 친일파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 때문에 다시는 서울 갈 일이 없어진 것이다.

1965년 7월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영국으로 가 런던 뉴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서 자작곡 "논개"와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지휘하였다. 곡목 선정부터 안익태의 착잡한 심경을 암시하는 듯하였는데, "논개"의 연주로 조국에서의 친일파 논쟁을 약간이라도 둔ㄴㄴ화시켜 보려는 의도도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결국은 마음의 병이 악화되어 런던에서 쓰러졌고 급히 마요르카 섬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이것이 안익태 평생의 마지막 지휘였다. 그동안 조금 모아 놓았던 돈은 서울 국제음악제 때 다 써 버려 가족들에게 이렇다 할 재산 하나 남겨 주지도 못한 채 안익태는 9월 16일 59세의 나이로 영원히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운명할 때에 바르셀로나 병원의 병실 녹음기에서는 서울 국제가요제에서의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세계적인 거장의 너무나 쓸쓸한 최후였다. 추모식은 스페인에서 더 크게 이루어졌다.

안익태는 바르셀로나 시립 공원 묘지에 묻혔고, 마요르카 섬에서는 세계적 거장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키타이 스트리트"를 만들었다. "이키타이"는 "익태"의 스페인식 발음이다. 1965년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객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안익태까지 객사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우리나라에서는 뒤늦게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유해를 우리나라로 모셔 오자 말자 법석을 떨었다.

해외로 쫓아낼 때는 언제이고 다시 모셔 오자는 말은 또 웬 말인가? 우리나라 국민성이 참으로 기이하고 기이하다. 어쨌든 박정희 대통령은 고 안익태 씨에게 문화훈장을 추서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유해는 서울로 모셔 와 국립묘지에 안장했지만, 안익태의 유해는 못 가져 왔다. 스페인 법률에 "한번 묻히면 10년간 파낼 수 없다"라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안익태의 유해는 1977년이 되어서야 모셔 올 수 있었고 지금은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우리나라 국민의 2중성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안익태가 국립묘지에 안장되자 신문에 이름 나고 싶어 하는 몇몇 사람이 또 딴지를 걸었다. 애국가의 멜로디가 불가리아 민요와 닮았대나 어떻대나...
결국 이 논의는 1936년까지 안익태가 불가리아에 간 적도 없고, 또 그 나라 민요와 별로 닮은 것 같지도 않다고 하여 유야무야되고 말았지만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안익태가 국립묘지에 묻혔지만 국내 음악가들의 냉대는 여전했다. 우리나라 초중고 음악 교과서에 19세기 유럽 낭만파 음악가들은 잔뜩 등장해도 안익태에 대한 소개는 아예 없거나 있다 해도 엄청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

1985년 8월 15일 광복 40주년 기념이라 하여 아침 10시 반 경에 KBS TV에서 모처럼 마음먹고 안익태의 "한국 환상곡" 전체가 방송된 적이 있다. 3악장 중간 쯤 되자 전국에서 항의 전화가 방송국으로 빗발 쳤다.

"신성한 애국가를 이렇게 마구 변조해도 되는 거냐?"
"빨랐다가 느렸다가 애국가를 가지고 뭐 하는 짓이냐?"
"당장 방송을 중단하라" "방송국 부수러 간다"
방송국 측에서는 그게 원래 곡이라고 해명을 하고 했지만 대부분 막무가내였다.

그동안 우리 국민들 대부분은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어서였다.
얼마나 몰랐으면 다들 그렇게 흥분해 했을까?
생각할수록 쓴웃음만 나온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황당한 이야기가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이 열렸을 때, 지금은 중견이 되어 있는 어느 아나운서 한 명이 옛날 안익태가 세 들어 살던 집을 방문해서는 "여기가 안익태 선생의 생가인데요" 어쩌고 하는 내용을 듣고 기절할 뻔한 기억이 있다. 그 기자가 "생가"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갑자기 남편과 아버지를 잃어버린 유가족들은 살길이 막연했다. 나중에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배려로 둘째 딸은 KBS 해외방송 스페인어 담당직원으로 채용시켜 준 적이 있다. 그리고 노태우 대통령 때 열린 88 서울올림픽 개막식에 로리타 안 여사가 초대된 적이 있었는데, 애국가가 나올 때 한없이 눈물을 훔치던 장면이 카메라에 잡힌 적이 있다. 남편의 음악이 전세계에 생중계되니 그 심정이 어땠겠는가..

그리고 요즈음 방송인으로 활약 중인 서울음대 출신 박윤신이라는 리포터가 안익태의 딸 안순영씨(소프라노, 현 안익태 기념사업재단 이사)의 딸이라서 안익태의 외손녀라는 보도가 나온 적이 있다. 또 어떤 보도에서는 안순영 씨가 안익태의 손녀이니 박윤신이가 증손녀라고 하기도 했다. 둘다 2005년의 일이다.

그러나 안익태는 우리 말 이름의 딸도 손녀도 둔 적이 없다. 모두 스페인식 이름이다. 현재 기념사업회의 이사로 있는 소프라노 안순영 씨는 안익태의 조카이다. (2002년 안익태 기념 음악제에서 유족대표로 노래도 불렀다.) 그러니까 박윤신은 안익태 7형제 중 어느 형제의 손녀가 된다. 이 박윤신은 일본게임업체의 게임삽입노래를 취입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무슨 책도 냈다고 전해진다.

그건 그렇고...
안익태 일생 중에 어느 부분이 "친일"이었을까?
또 그 "친일"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녔으며, 누구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을까?

또 지금 그걸 밝혀서 무얼 하자는 것일까? 이번엔 또 누구를 매장시킬 것인가?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옥의 티 찾기를 너무 좋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티를 발견해서는 그것이 옥보다도 더 크다고 우기는 사람도 가끔 있다. 100가지 10000가지 잘해도 1가지 잘못하면 바로 퇴장시키는 것이 나쁜 습성 중의 하나이다. 그동안 친일파 논쟁으로 사람 여럿 퇴장시켰는데, 보기 싫은 사람 퇴장시킬 때 가장 잘 써 먹는 것이 바로 "친일파"이다.

그러나 요즈음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 때문에 어린 청소년 친일파가 이미 천만 명을 넘었고
각 방송국에서 일본 프로 베껴 대는 친일파가 또 얼마나 많은데...
이제서야 뒤늦게 친일파 사전을 만든다고 해서 이 어린 청소년 친일파들에게 얼마나 교육적인 효과가 있을까?

친일파 논쟁, 과거사 논쟁 -- 정말 부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즈음 신문을 보면 10년 전 신문인지 30년 전 신문인지 옛날 이야기가 너무 많이 나온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다니면서 역사신문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과거사고 친일이고 도청이고 뭐고 간에 또 누구를 잡으려고 저러나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난다. 정말로 청소년들에게 절대로 보여 주지 말아야 할 것이 요즈음 방송이고 뉴스이다. 대표적인 청소년 유해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다.

역사는 언제나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나침반으로만 활용되어야 한다.
역사가 현재의 발목을 잡는 족쇄로만 쓰여질 때에 그 나라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 환상곡" 마지막 부분 "희망의 메아리"를 듣고, 우리 모두 미래로 향하는 희망만 가지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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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환상곡"이 듣고 싶은 분은 아래의 주소를 인터넷 주소에 치고 엔터를 누르면 됩니다

mms://211.251.8.9/vod/j_music/a03.mp3

처음부터 끝까지 참 아름다운 곡입니다. 특히 1악장 부분 우리 민요가락 같은 부분이 좋습니다. 영화 "피가로의 결혼"에서도 "한국환상곡"의 일부가 나온 적이 있지요...

지금 바쁘시면 나중에라도 들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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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소리에 한이 맺혀 아직도 눈을 제대로 감지 못한 안익태 선생을 추모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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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