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초상(肖像)>

참으로 이게 몇 년 만인가? 그러니까 꼭 20년만이었다.
뚜껑을 열면 어떤 감당하지 못할 예언이 쏟아질 까 겁이 나서
감히 열어보지 못하는 판도라의 상자처럼 난 녀석의 소식이
무척이나 궁금하면서도 20 년을 그저 주위에서 맴돌았던
S를 오늘 만난 것이었다.
 
20년 전 그 때 난 매년 연례행사처럼 앓는 병치레 치고는
어느 해보다도 심한 몸살과 기침에 무척이나 허우적댔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별 뾰족한 방법은 없으리라
여기면서도 난 고교동창 S를 찾아갔었다.
 
그러나 두 달이 넘도록 조금도 차도가 없자 오히려 S가 긴장하여
폐 사진을 찍어보자는 둥 조바심을 쳤다.
 
“도대체 뭐야, 아니 정말 폐나 기관지는 말짱하잖아.
그런데 그렇게나 심하게 기침을 해대다니...
너 때문에 난 돌팔이소리 듣겠다.”
“실제 돌팔이가 아니고?”

그렇게 3개월이라는 긴 통과의례와 같은 기간을 넘겨서 기침이 유야무야 수그러들자,
어쨌든 환자가 많이 늘어서있을 때도 나를 특별히 미리 예약한 환자라며
우선적으로 불러 진료해주던 녀석에게 늘 미안하고 고마웠던 마음의 빚을 갚을 겸
겸사해서 어느 저녁 s를 조촐한 일식집으로 초대했다.

그와는 고교졸업 후 첫 술자리였다. 동창들 소식,
살아온 얘기를 꽃 피우는 가운데 술잔이 여러 순배 돌았다.
 
“네 와이프는 서울 사람이 아니던데... 중매냐?”
“야 어떻게 결혼을 싱겁고 지루하게 중매로 하냐? 어느 날 한 여인이
몰록 내 눈에 와 박히기에 한 이불 쓰게 되었지.”
“그래? 그리 쉽게?”
“웬걸! 출장길 기차역에서 우연히 본
이름도 성(姓)도 모르는 여자와 그게 그리 쉽게 되겠냐?
어디 사는 아무개라는 걸 알아내는 데만도 거의 1년이 걸렸는데...”
“과연 용상욱답다. 그 얘기 또 하나의 소설이겠군, 한번 들어보자.
그런데 너 아이들이 셋이나 되더라.”
“셋? 바로 몇 달 전에 하나 더 놓아서 다섯이다.”
“뭐야? 다섯? 농구 팀을 차려도 되겠다. 이놈아.”
“넌 몇인데...?”
“...........................................................”
 
그 때 문득 s의 눈은 깊어졌다. 녀석은 갑자기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곤 긴 연기를 뿜어내며 한동안 말이 없다.

“너 고교 P선배 알지?”
“알지, 전교에서 늘 1등을 맡아 놓고 하던 천재중의 천재라던 그 선배를 모르냐, 
근데 뜬금없이 그 선배 얘기는 왜?”
“그 선배와 불같은 사랑을 하던 K여고 학생 얘기도 아냐?”
“아니...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했기에...”

“그 여학생과  P선배는 같은 학년으로 중 2
영어회화 클럽에서  만난이래(以來) 정말 불꽃 튀는 사랑을 했지.
나중 선배는 서울 공대에 그 여인은 서울 미대에 들어갔고...”
“그럼 해피엔딩이겠군. 뭐 젊은 시절 질풍노도와 같은 사랑은 종종 있는 거잖아.”
“더 들어봐, 그렇게 대학에서도 그 둘은 열렬히 사랑을 했지.
그런데 어느 날 선배가 그 여인을 자기 집에 데리고 가
부모님께 인사시키고 나서 문제가 벌어진 거야.”

나는 몸을 더 앞으로 당겨 앉았다.

“그날 더 이상 둘의 교제에 대한 금지령이 내린 거지.”
“아니 왜?”
“그녀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는 것이지.”
“뭐야? 겨우 그런 이유로?
나도 장인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혼인한 사람인데 그런 문제로?
그 선배가 너무 유약(柔弱)한 거 아냐?”

“그런데 참 네 얘기를 묻는데 선배 얘기는 왜?”
“내가 죽자 사자 교제하던 여인이 바로 그 여인의 5살 아래인  친동생이었고
나도 내 애인을 인사시키러 집에 데려올 즈음에 그 홀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그 때 그 자매는 천애(天涯)고아(孤兒)가 된 거야.
그러니 우리 모친이 당신도 청상(靑孀)인데 며느리까지
고아를 들일 수는 없다고 한사코 반대하시는 거야.”

나는 이쯤에서 뭔가 감이 오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의 담배를 슬그머니 한 대 빼문다.

“내 애인은 서울의대 간호학과를 나와 지금 정선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난 이렇게 청진기 걸고 살아가고 있는 거지.
아니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지고 있지”
“네 어머니 아직 살아계시지? 좀 더 적극적으로 설득해보지그래.”

녀석은 말이 없다. 메마른 가을바람이 그의 얼굴에 내려앉는다.
그의 어깨는 한 뼘이나 더 내려 앉았다.
나는 목이 말랐다. 찬물을 들이켠다. 그 선배는 다른 여인과 결혼해서
현재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고
여인은 40을 훨 넘긴 나이에 긴 생머리 휘날리며 달랑 화구(畵具)만 들고
여기 저기 홀홀히 다니며 오직 선배만 그리며 산단다.
..........................................................................................

그리고 그날 술자리이후 스무 번의 봄과 가을이  오고 갔다.

그런데 바로 오늘 오후
난 그 s를 만난 것이다. 이상하게도 마당발인 동창들조차
녀석의 소식을 정확히 아는 놈이 없고
오히려 내가 직접 녀석을 찾아보려면 쉽게 찾을 수 있을 듯싶었지만
차마 발걸음이 선뜻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렇게 흘러간 세월이 스무 성상(星霜)!


반쯤 열려있는 진찰실에 고개를 빠끔히 들이밀고 녀석과 눈을 맞춘다.
녀석은 한눈에 나를 알아본다.

“야 이게 누구냐? 도대체 얼마만이냐? 어쩐 일야? 우리 병원엔?”
“응 어머니 일로...”

원래 살결이 무척 곱고 희었던 녀석은 여전히 주름 하나 없이 고왔다.
헌데 머리칼이 거의 다 빠져버린 곱게 가라앉은 노인이 되어있었다.

“야 우리 손이나 한번 잡아보자. 그리고 언제 우리 대포나 한잔 하자.”
겨우 내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환갑이 된 지금
아직도 녀석은 총각이었다.
녀석의 애인 간호사도
여전히 홀로 살고...

그녀의 언니인 화가(畵家)는 지금은 마치
<김용의 무협지 주인공인 백발(白髮)마녀(魔女)>처럼
온통 하얗게 세어버린 생머리 길게 어깨 밑까지 휘날리며 여전히 화구 챙겨들고
여기저기 쓸쓸히 헤매듯 다닌다는 사실을 듣고 정말 내 가슴엔 비가 내린다.
주룩주룩 쏟아진다.

아!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이기에...
과연 그것이
사랑의 올바른 실체(實體)일까?!
그토록 사랑은 정녕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에고덩어리일까?!

아!
사랑!!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