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교회 부교역자 지원자 중에서
다른 사람에 비해 서류상으로 미흡한 그를 선정했다.

다른 전도사들과 같이 서 있는 그는
키가 유난히 작았다.
반듯한 얼굴에 빛나는 눈은
깊은 슬픔이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우리 교회 학생부(중,고등부)를 맡아 지도하게 되었다.

우리 교회에서 일하기 시작한지
한 달도 못되어
그의 신실한 신앙과 순전하고 정직한 인격때문인지
곳곳에서 중매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 전도사는 결혼 이야기만 나오면
새파랗게 질리고 밥도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무런 이유없이 우리 아들의 얼굴을
시퍼렇게 멍들도록 때려준 것이다.

사직서를 들고 온 그에게
"우리 아이 때린 것은 정말 잘했어요.
다른 전도사들은 우리 애가 잘못해도
목사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야단을 못치는데
김 전도사님은 우리 아이의 진정한 교사이세요."

그는 아무말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더니
"아니예요. 내가 성일이를 때린 것은
잘못을 고쳐주려는 것이 아니였어요.
저, 저는 성일이가 너무 부러웠어요.
목사님이신 훌륭한 아버지 그리고 좋은 어머니
착한 동생들과 살고 있는 이 단란한 가정...
저에게는 하나도 없는데
성일이는 나에게 없는 것을 다 갖고
다 누리고 있는 것이 너무 질투가 나고 화가 났어요.

그는 핏덩이인 채로 부모에게서 버려져
고아원에서 자랐다.
그의 부모는 아이를 버릴 때 이름도 출생일도 써 놓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이세상에 버려진 날이
그의 출생일이 되어 생일로 지켜지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그 당시 그 또래의 남자 아이 4명이 고아원에 들어왔는데
우리 나라 성 중에 가장 많은 김씨로 하고
동수, 서수, 남수, 북수로 짓다가 북수가 이상하다하여
북수는 문수로 바꾸고 이름 지을 때 그 중 하나를  받았다.

배고픈 어린시절.
고아원 형을 따라 숲속에 갔는데
숲길에 먹음직스러운 빵이 여러개 널려 있었단다.
같이 갔던 고아원 형은 그 많은 빵을 혼자 다 먹고
옆에서 부스러기라도 얻어 먹으려는 그에게는
빵 반쪽을 주었는데
그 날밤 그 형은 죽고
빵 반쪽을  얻어 먹은 그는
고열로 신음하며
밤새 앓고 살아났다고 한다.
고아원에 누군가 손님이 나타나면
이번에 내가 입양아로 뽑힐까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피부병을 앓고 있던 그는
그 사람들로 인하여 그 때마다 오히려 친구만 하나 잃을 뿐이었던 것이다.
미움과 원망이  그의 가슴속에
돌덩이처럼 맺혀져 가면서
그는 분노와 한을 오직 공부로만 풀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성적은 언제나 1등이었으나
고아원에서는 고 3 이 되기 전에
무작정 사회로 내보낸다는 것이다.
실상은 고 3 이 될 때까지
고아원에 남아 있는 아이는 없다.
중학교 나이만 되면 거의 배고픈 고아원을 가출하기 때문이다.
그는 고3 이 되면서 이 넓은 세상에 또다시 혼자 버려졌다.
장애자 재활원 일을 하면서 대학을 합격했다.
아무도 축하해 주지 않는 합격의 기쁨은 그에게 그대로 아픔이 되었다.
고아의 슬픔은 자신의 기쁨을
자신과 똑같이 기뻐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것일 것이다.  

안해본 일이 없이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이 되었으나
그는 직장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어렸을 때부터 지녀온 신앙의 길을 찾아
다시 신학 공부를 하여 전도사가 된 것이었다.

그는 사회 생활에 적응 못했듯이
가정생활도  공포증을 앓고 있었다.
자신은 가정을 이루지 못한다는
심한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래서 29살이 되도록 여자를 사귀어 본 일이 없었다.
여자를 사귀면 결혼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그 날로
그의 짐을 우리 집으로 옮기게 했다.
그를 극진히 보살펴 주려고 오게 한 것이 아니다.
나는 그에게 우리 식구 전체의 밥을 하게 했다.
우리는 밥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기 전에
이 음식이 우리에게 오기까지
수고한 손길에 감사하는 기도를 드린다.

그는 음식을 만들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우리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점차 가정이라는 것에 적응하고 있었다.
음식 하나가 우리에게 공급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수고가 이어지는지
깨닫는 것이었다.
가정은 저절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 서로의 책임과 사랑의 노력과
댓가 없는 헌신으로 이루어 지는 것을 배워가고 있었다.

그 해 추석날.
그에게 쌀을 빻게 하고
송편 속을 만들게 하고
송편을 빚게 하였다.
그는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송편을 빚어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가장 잘 빚어진 송편을 부모님께 드리고 싶다고 했다.
자신을 버려야만 했던 절박한 이유가 있었을거라고...
자신의 아버지는 자기처럼 키가 작았을거라고...
어느덧 부모에 대한 미움은 그리움과 연민으로 변하여 있었다.

나는 그를 데리고
그가 자라난 춘천의 고아원엘 갔다.
그의 뿌리에 대한 미미한 흔적이라도 찾아주려고...
그 곳 고아원 기록에는
"성내동 파출소앞에 버려짐."이라고 적혀 있었다.
다른 흔적을 하루종일 찾아 보았으나 더 이상의 진전이 없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부르고 싶은 두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아버지이고 하나는 어머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부를 때
아버지! 아버지! 꼭 두 번이상 부른다고 했다.
  
그 해 겨울.
그는 신랑보다 키가 10cm나 크고
인하대학에서 동양화를 공부한
아름다운 자매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부의 집에서는
어머니같은 누님이 있어서 마음놓고 딸을 준다고 한단다.
신랑을 보고  단 번에 마음을 뺏긴 신부는
신랑이 고아라면 집에서 반대할 것이 뻔하니
나를 그의 누님이라고 말한 것이다.
나에게 남동생이 생긴 것이다.
하나 밖에 없는 남동생이니 누님 노릇 잘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모님! 올해 모세가 2학년이 되었어요.
은혜는 유치원엘 들어 갔고요.
모세(아들)와 은혜(딸)가 아빠보다 영어를 더 잘해요."

지금 뉴질랜드에서 한인목회를 하고 있고
유학생 미션홈을 하고 있는  
동생댁의 전화 목소리다.

"나의 누이! 나의 어머니!.
나의 누이! 나의 어머니!
그 동생이 꼭 두 번씩 부르는 나의 호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