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재미있고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수없이 많이 보아온 “현고학생부군신위” 에 대해서 이제서야 좀 제대로 알게 되었군요.
이제 생각하니 언젠가 대강의 의미를 들어본 적은 있었어요.
‘학생’ 이 학교다니는 학생이 아니라 관직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다는 정도는 기억이 납니다만
이렇게 재미있게 상세하게 풀어주시니 역사공부가 저절로 되네요.

황교감선생님의 글은 inil.org 에서도 많이 접하고 감사했습니다.
신년을 맞이하여 이렇게 좋은 글 정성스럽게 올려주심을 거듭 감사드립니다.

누가 묻지도 않지만 제 경험을 좀 이야기하고 싶어지네요.
어려서부터 집에서 내내 제사모시는것 보면서 자랐지요.
진짜 양반인지 가짜 양반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학교시절 역사 이항구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셔서 종종 저를 지목하시면서
“조영희, 조광조 조씨....” 하시곤 하셨어요.
불운의 정치가였지만 조광조야 분명히 양반이지요?

결혼후에도 맏며느리인 저는 설과 추석까지 합치면 일년에 열번정도 제사를 지냈습니다.
몇대위까지 모셨는지....... 아마 3대까지 같았는데........
사실 제사음식 준비 등등 일에 휘말려서 실지 조상님에 대한 고찰은 해보지도 않은거같애요.

우리가 이민오면서는 (저는 브라질에 살고있는 교포입니다)
같이 이민오지않으신 시어머니께서 다른 며느리하고 제사를 모시다가
어느해인가 우리가 고국방문 갔더니 저보고 제사를 모셔가라 하셔서
다시 우리가 이 먼 타국땅에서 몇해를 지방 써 붙이고 엎드려 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은 제사를 폐지했다고 할까요? 지내지않고 있습니다.
집을 이사한다던가
집안에 큰 변동사항이 있을 때를 기해서 제사를 폐해도 된다고 하시더군요. (시어머님 말씀)

제가 제사를 폐한 이유는
물론 이민생활에 하루하루가 시간에 쫓기고 바쁘기때문에 물리적으로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도
제사라는 형식을 거부하는 아이들하고의 씨름에서 너무 지쳤기때문이었습니다.
아이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켰다고 단언을 하신대도 할 말은 없지만
제삿날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기어이 나가버리는 아이를
억지로 붙들어 구부려 절을 시키면서 부모도 자식도 다 골이 잔뜩나서 씩씩~~~

몇번 그런 일을 겪고
어느해 이사하면서 제사를 폐했습니다. 우리 맘대로.....
그 후 우리 부부는 살아오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천주교인데 어느 핸가 성당묘지 분양이 있기에 우리앞으로 한 기를 마련했습니다.
제사 받을 생각이야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죽어 들어갈 내 집은 내 손으로 마련한 셈이었지요.
그러나 그마저도 십여년 지나다보니 생각이 또 바뀌더군요.

자식들이 외국인하고 결혼을 하고
또 뿔뿔이 멀리 멀리 떨어져 살게되니
막상 부모 산소가 어디 있다한들 일년에 한번인들 찾아가보게 될것 같지도 않더군요.

우리 애들 얘기할것도 없이 우리부부부터도 한국에 있는 선산, 조상님들 산소에 몇번이나 갈 수 있었는지.....
마음만 무겁고 늘 죄지은듯한 불편한 느낌으로 살게되고......

그리하여 우리가 기왕에 사 놓았던 산소자리를 없애기로 했답니다.
즉 우리는 죽으면 화장을 하고 흔적없이 지구를 떠나기로 작정을 하고
십여년동안 관리비를 내던 빈 산소를 남에게 양도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죽어서 꽃 핀 아름다운 공원묘지에 묻히기보다는
‘가끔이라도 생각이야 나겠지.......’ 아이들 가슴에 묻히려 합니다.

천주교신자는 원래 화장하는 것이 옳지않다고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그럴까요?
많이 생각해봤지만 결론은 그렇게 났고
우리는 나중에 한 줌의 바람으로 돌아가기로 했답니다.

황선생님, 새해를 맞이하여 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기원하며 아울러
좋으신 글 종종 올려주시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