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대한 내 기억의 퍼즐 조각들.

인천 이라는 지역과 인연을 맺은지도 삼십년이 넘고 내나이 벌써 이순 , 지금도 인천에 꼬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으니 나와 인천은 참 질긴 전생의 인연이 있나보다. 그러나 내 어린시절 인천에 대한 기억은 그래도 강팍하고 뭔가 배신 당한 것 같은 지금의 인천은 아니었다. 인천에 대한 내 첫 기억은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까까머리 반바지 시절 (내가다닌 경북중학교는 학생 들에게 반바지를 입혔다). 당시 대구에는 6,25때 서울 등지에서 피난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우리는 서울에서온 학생들을 서울래기 다마내기라고 질투반 심술반으로 놀려대곤 하였다. 그때 같은반 학생중에 인천에서온 학생이 있었다. 그땐 아직 어릴때라 인천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고 학교에서 배운대로 갑문식 독이있는삭막한 어떤 항구 정도로 막연히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후로 나는 서울로 고등학교 진학을 했고 곧 인천에 있는 친구들이 생겨 인천을 드나들게 되었다. 당시에는 서울에 전차가 다닐때이고 서울이 조그만 도시일 때여서 학생들은 시간이 있을때 뚝섬과 광나루(지금의 워커힐)등을 다녔는데 광나루의 물이 너무 맑아서 수영을 하면서 마시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서울에서 인천을 오는것은 기차를 타고 딴도시를 여행하는 상당히 멀고 긴 여행이었다. 용산에서 출발해서 소사에서 한번서고 인천역에 도착 했는데 그땐 기차가 화물칸도 같이 달고 다녓던것 같다. 우리는 인천에서 친구들을 만나 주로 월미도 작약도 송도등을 다녔고 말하자면 제법 관광을 했던 셈이다. 당시에 작약도는 인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이었고 바닷물이 맑아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말하자면 청정해역 이었는데 지금의 작약도를 생각하면 꿈같은 이야기다. 이렇게하여 시작된 인천과 나와의 인연은 십여년의 서울생활과 경기도 유랑생활후에 다시 인천으로 이어 지면서 그 질긴 악연이 이어지고 있는샘인데 내가본 칠 팔십년대 인천은 지금의 신포동과 신흥동 그리고 자유공원 주변을 중심으로한 조그만 도시였으며 청관을 중심으로한 중국인 거리와 신흥동 일대의 일본식 건물이 아기자기 하면서 이국적인 풍경을 가진 그런 도시였다. 그때만해도 인천에는 답동성당을 비롯한 일제시대의 각종 공관 건물들이 제법 큰 모양으로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어 옛맛이 나는 풍경 이었는데 새로지은 율목동 언덕위의 시립도서관 자리에 올라서면 인천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인천시립도서관은 인천의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청운의 꿈을 키우던 명소 이기도 했으며 지금으로 이야기 하면 인천 젊은이들의 미팅 장소 이기도 했다. 그일대 율목동의 한옥집들은 인천 특유의 작은 미음자 형태의 한옥으로 인천의 중산층들이 살던곳이었다. 시립도서관 남쪽으로 내려오면 해광사 절이 있었고 그 일대에 일본식 집들이 있었는데 그집 이층에서 지금은 타계하신 황추선생이 그 유명했던 누우런 바다 그림을 그리던 모습이 생각 난다. 그 때만해도 인천의 높은곳에 올라가면 손에 잡힐 듯 바다의 염전들이 보였는데 인천교 일대의 개건너 염전과 제일제당 건너편의 낙산주변 염전이 그랬다. 그땐 제일제당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친구와 같이 그곳에서 망둥이를 잡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 염전의 둑길들은 갈대들과 어울려 해질녁이면 멋진 풍경을 만들었는데 소금창고를 배경으로 나는 수채화를 그렸다. 당시 인천에는 승합버스 라는 것이 다녔는데 약사사 부평 송도등의 시외를 나가려면 그것을 타고 갔다. 송도 쪽으로 나가면 옥련동 바다가에 조개고개라는 곳이 술집동네로 유명 했고 남동까지 나가면 무공해 바다풍경이 시원하게 뚤려 있었다. 지금은 절 이름이 바뀌었지만 송도 뒷산에 인명사라는 절이 있는데 늦가을 쯤인가, 젊은 객기에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고 절 마당에서 자다가 새벽에 얼어 죽을뻔한 기억이 난다. 인천은 항구도시고 항구 하면 술집을 이야기 하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당시의 인천에는 동인천일대 신흥동주변 학익동 등에 홍등가가 번창을 했고 신흥동에는 옛유곽건물 같은 것이 남아 있어서 그곳을 지나며 시인 이상의 삶에 대하여 생각해보기도 했다. 술집동네로 이름있던 곳은 그래도 애관극장뒤 용동일대가 유명 했으며 그당시만 해도 팁 이라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는데 교육받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기생들이 술대접을 했고 밤늦게까지 젓가락 장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항동쪽에 외항선원들을 주고객으로하는 시멘스크럽 인터네셔널 등의 외국인전용 대형술집들이 생겨났는데 나중에는 한국사람들도 술을 마셨다. 그곳에서는 루이 암스트롱 풍의 째즈를 들을수 있었고 흑인들의 정열적인 춤도 구경 할수 있었고 돈을좀 쓰면 이국적인 정취를 맛볼수도 있었다. 당시의 유일한 문화시설이 극장이었는데 일제때부터 내려온 동방극장이 입구의 조그만 아치와 의자등이 옛정취를 느끼게했고 신세대 극장으로 키네마극장 세기극장 애관극장등이 새로생겨 유명해졌다. 그시기에 서울에서는 종로와 명동 등에 디쉐네 돌채 라스카라등의 클래식 음악실이 유행 했는데 곧인천에도 상륙하여 짐다방 커피코너등이 클래식다방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의 인천 미술인들은 주로 인천공보관 등에서 작품 발표를 하였는데 은성다방이 화랑역활을 하고 있었다. 검여 유희강 등의작품을 그곳에서 볼수있었고 당시 열심히 활동을 하던 화가는 박영성 우문국 황병식 이철명 정순일 등이었으며 동정 박세림의 집도 신포동 쪽에 있었다. 인천에서 활동하던 시인들과 화가들은 주로 신포동 쪽에서 만났으며 신포시장안의목로주점 백항아리집과 신포주점 미미집등이 유명 하였다. 백항아리집은 큰 항아리크기의 일제시대에 만든 흰색 항아리에 술을 담아놓고 할아버지가 바가지로 퍼 주었는데 그술이 너무독해 게딱지 빨고 한두잔이면 취해서 비틀 그렸다. 그래서 인천의 내가 아는 한 시인은 그곳을 병병자를 써서 백병원 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주사맞으러 간다고했다. 당시 시장안에는 답동관 이라는 해장국집이 유명했으며 튀김우동이 싼값으로 해장국 역할을 하기도 했다. 깡술에 쓰린속을 싸구려 튀김우동으로 달랜 것이다. 당시의 신포시장에는 황새기(연평도 근해에서 잡은 누런 참조기) 민어 등이 먹거리로 유명했는데 지금은 구경도할수 없으니 세월따라 식생활도 많이 변했구나. 인천을 이방인의 도시라고 했던가. 내가 나를 그리 만들었는가. 시멘스 크럽의 실력있던 밴드마스터, 째즈 키타를 치던 우리들의 와이키키 부르더스 들과 백항아리의 시인 묵객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 인천에 대한 기억의 파편들 그것은 시대를 끼워 맞추어온 하나의 퍼즐 조각에 불과한 것을, 지금의 인천 살이도 그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강하진  작가 약력
1943년 대구출생
서울사대졸

1974-1999 인천지역 중등학교 미술교사

인천 시립대학교 강사 역임
한국미술협회 회원

서양화가,설치미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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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가을  고국방문중 인천 자유공원,연오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