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초교 사택에서 아버지와 자취를 하다 주말이 되어 고향집을


      찾은 나는 깜짝 놀랐다.


      군인들이 오가고 군용트럭이 진을 치고 산에는 초가집이 새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네가 생긴 이래로 가장 많은 이방인들로 붐볐다.


      무슨 일일까?


      혹시 동네에 전쟁이라도 난 것일까? 아주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1968년 여름,


      내가 살던 살미골에 영화 셋트장이 설치되고 당시 유명했던 인상파


      영화배우 허장강과 독고성이 다른 조연들과 동네에 나타나니


      산골마을은 발칵 뒤집혔다.


      동네 어른들은 농사일을 제쳐두고 모두가 동원되어 일당을 받고


      엑스트라 역을 맡아 와와 몰려다니다 인민군에게 학살되어 나뒹구는


      장면을 연출하는 시체들이다.


      연구네 아버지도 꼬질꼬질한 한복 차림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비녀를 튼 오촌아주머니도 눈에 들어왔다.




      “따! 따! 따! 따! 드르륵!” 기관총 소리에 밭두렁이고 논두렁에 쓰러져


      죽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는 모양 같았다.


      답답했던지 조감독이 멋지게 시범을 보였다.


      “으악!” 소리를 내고 몇 바퀴 비틀거리다 풀썩 넘어지는 장면을 선


      보인 것이다.


      그러나 맨 날 꼴이나 베고 농사를 짓던 사람들을 불러다 돈 몇 푼을


      쥐어주고 연기를 주문하니 모두가 가관이었다.


      총에 맞았는데 금방 죽지를 않고 몸만 비비 트니 어린 나로서도 이해가


      안가는 대목이었다.


      특히 주인공쯤 되는 사람은 더욱 그랬다.


      여러 발을 맞았는데도 여전히 말할 것은 다하고 죽었다가도 다시 일어나니


      말이다.


      동네 분 모두는 죽어본 경험이 없어서인지 으악 소리는 잘 내는데 죽을


      자리를 손으로 다듬고 쓰러지질 않나 어디서 막걸리를 얻어먹었는지 흥에


      겨워 어깨춤을 추다 죽는 시늉을 하니 확성기를 든 감독은 더위에 죽을


      맛인가 보다.


      “엔지! 컷!” 소리가 수십 번이 나서야 겨우 한 장면의 촬영을 마쳤다.


      동네 분들의 한복에는 풀물과 흙투성이로 연기의 어려움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공포탄이 아닌 실제 기관단총을 논바닥에 쏘니 개흙이 튀고 무서워 도망치는


      시체역의 어른도 눈에 띠었다.


      당시 소품의 부재로  총소리에 시체가 살아  줄행랑을 치고 있는 것이다


      안전한 반대편으로 총을 쏘긴 했지만 얼마나 놀랬겠는가?.


      구경하던 나도 오금이 저려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 했다.




      우리 집은 시골성당 옆에 자리한 중심지라 인민군 사령부로 발탁되어


      인민군 대장 역을 맡은 허장강이가 말 장화를 신고 저벅저벅 봉당마루를


      밟으니 어린 나로서 부아가 치밀었다.


      분명 어머니가 돈 몇 푼에 빌려주시긴 했지만 우리 국방군의 본부도 아닌


      인민군의 본부라는 사실이 정말 맘에 안 들었다.


      그리고 허장강의 짙은 눈썹이 나와 같아 더더욱 싫었다.


      옆집 시갑이네는 내 속도 모르고 아주 부러워했다.


      돈을 많이 받았다고 여겼는지 공연히 시샘까지 부리고 있었다.


      은근히 자기네 집도 채택되어 뭐라도 찍고 임대료를 받고 싶었으나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라 촬영 진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후로도 한동안 말 장화를 신은 주연배우 허장강은 제집 드나들 듯


      봉당마루에 군화 발자국을 새기고 있었다.




      내 또래인 여자아역 배우는 연기를 참 잘했다.


      고물의 탱크도 오고 국군이 우리 집을 점령할 때 그 여자아역 배우는


      국군장교의 손을 이끌고 서서히 텃밭을 가로 질렀다.


      까만 눈망울을 대록대록 굴리며 또박또박 대사를 잘도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어린 소녀의 눈망울을 통해 전쟁의 비참함을


      고발하는 내용의 반공영화이었던 것 같다.




      일요일 오후, 산속에 설치한 초가집 폭파장면의 촬영지에 멋모르고


      따라갔다 화염에 놀라고 뜨거워 타죽는 줄 알았다.


      스텝 진에서 화약을 너무 많이 장착하여 엎드려 숨을 죽이고 구경하던


      우리에게까지 순간 열기와 불로 나의 까만 눈썹과 머리카락을 반이나


      태우는 불상사가 생겼다.


      큰 화상은 아니나 얼굴은 벌개 지고 노린내를 맡을 사이도 없이 금세


      산불로 번졌다.


      청솔가지를 꺾어 불을 끄느라 모든 연기자와 구경꾼들이 뒤범벅이 되어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동네에 잘 생긴 형 하나는 여자 조연이 맘에 들었는지


      추파를 던지며 그녀의 뒤를 졸졸 따랐다.


      그러나 샛노랗던 보리밭은 깜부기만 남긴 채 밭고랑의 누런 이를 드러내고


      있었으니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그해 그 영화는 망했다.


      소문에 의하면 극장에 문패도 걸지 못하고 영화사는 문을 닫았다한다.


      한참 후 학교 운동장에 가설극장이 들어왔다.


      “어떤 눈망울” 영화였다.


      다 망한 영화를 누군가가 필름을 가져와 마을 어른들에게 보답코자


      영사기를 돌렸다.


      우리 집 장면이 나올 때는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분명 다행인 것은 실제로  우리 집이 인민군 본부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였다.


      당시의 반공교육으로 어린 나의 가슴에도 승공의 노래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오학년인 나는 며칠 후 군내 학생 노래자랑 대회에서 기억이 가물가물하나


      이 노래를 불렀다.


      “찬란히 솟는 해도 하나이듯이


      조국은 하나요 겨레도 한겨레


      너와 나의 가슴속에 끊는 동포애


      한마음 한뜻으로 함께 뭉치어


      승공의 굳은 길로 우리 나가세


      너도나도 민주낙원 세워 나가세


      온 누리에 휘날리는 자유에 푸른 깃발


      승공 승공의 길로 우리 모두 나가세.”




      내가 아직도 위 노래를 어렴풋이나마 잊지 않고 있는 것은 당시에 얼마나


      반공교육이 철저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내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신봉자가 되었으니 나와 다른


      생각의 사람들은 어떤 판단을 내릴 지 새삼 궁금하다.


      허나 자유와 목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개개인 모두에게 소중하기


      이를 데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