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학당

우선 숭례문 화재에 대한
윤용혁님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다음은
내 대학동기들과의 모임인 지란회 친구들에게 보냈던 글로서
그저 잠시 쉬어가는 기분으로 가볍게 읽어주세요.
글구 어디까지나 제목이
봉숭아 학당이라는 걸 감안해주시고요.

과거 TV의 코미디 프로 중에 봉숭아 학당이란 게 있었지요.
이창훈이 열연한 맹구 등이 나와서
쮀끔 웃기던 프로인데 오늘 그걸 패러디해서
한 마당 엮어보죠. 글구 우리의 영원한 천사 오드리 헵번과
그 어떤 영화에서도 상반신조차 단 한 번도 홀딱 벗지 않았던
영원한 신사 우리 그레고리 펙 형님을 추억하는 의미에서
영화 로마의 휴일의 하이라이트를 다시 한 번 복습해보죠..
(영화 평을 쓰신 분 성함은 아쉽게도 잊었습니다.
아시는 분 알려주시면 나중 정정하겠습니다)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중에 내 스승이 하나 있다.는
공자님 말씀처럼
내가 미처 모르는 분야를 배우는 것도 재미있어요. ㅋㅋㅋ

1: 이모부
“난 한 번도 진한 사랑을 해보지 못했어,
그 사람 내게 시집와서 그 많은 낟가리를
혼자 쌓아 올리는 둥 고생 참 많이 했어,
시골에서 농사짓고 산다는 것이 사실 무척 바쁘고
수고가 많이 드는 일이거든, 그것이 지금도 마음에 걸려.”
“그래요 쌀이 만들어지기까지 88번이나 손이 간다는 의미로
쌀 米자를 만들었다는 말처럼 농사가 어디 쉬운 일이겠어요?
그래도 부부 금슬이 좋아서 자식 여럿 낳고
오랜 세월 함께 사셨잖아요.”
“살다보니 자식은 생긴 것이고 그 사람과 나는
일에 치여 사느라 알콩달콩 요즈음 젊은 부부처럼
데이트도 하고 손잡고 고궁 나들이도 하는 둥
재미있는 시간을 전혀 갖지 못했어,
나는 지금도 그것이 아쉬워.”

나는 깜짝 놀랐다. 이것이 동갑부인과 85세까지 사시다가
그 부인을 먼저 보내고 지금 91세 잡수신
이모부 입에서 나온 말을
내 기억력이 감당하는 한 토씨까지 그대로 옮긴 말이다.

이모부는 이모 세상 버린 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뒷산 저 너머 이모의 묘에 간단다.
거기서 그는 이모와 나누지 못한 진한 사랑을
미안해하고 아쉬워하며
바다 건너 저 앞에 보이는 인천 공항의 화려한 야경을
몇 시간이고 앉아서 이모와 함께 꿈꾸듯 본다고 한다.

원래 이모는 자그마하고 가냘픈 체격의 이모부와는 사뭇 달리
이모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체격은 아마존이었고
음성도 괄괄하고 우렁우렁했다.
젊은 시절 늘 이모부를
그 우렁찬 목소리로 그야말로 개 몰듯 몰고 다녔고
허구한 날 잔소리였다. 밥상에서조차...

그런데 어느 날 이모부가 그날도 밥상머리에서
왈왈대는 이모에게 광에서 낫을 들고 와
소위 망나니 춤을 춘 것이었다. 역시 여자는 여자였다.
아니 눈이 컸던 이모는 사실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 날 이후 이모는 잔소리도 않고 고분고분해졌단다.

그런데 나이 들어서 그때만 해도 시골이 아직 힘들고 어려울 때라서
너무 일을 많이 한 탓인지 이모는 무릎을 못 쓰게 됐고
당시 수술비가 1000 만원이 넘는데다 수술 결과도
기대할 수 없는 급성 관절염이라는 판단 하에
포기하고 그 때부터 자리에 누워 자기 발로 걷지 못했다.
이모부는 그 5년을 한 결 같이 옆에서 온갖 시중 다 들고
씻기고 먹이고 입혀주며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지만
이모는 5년을 그렇게 누워만 있다가 돌아간 것이다.

“그 때 돈도 없었고 또 그 사람이 수술은 무서워
죽어도 안하겠다고 펄펄 뛰는 바람에 안한 것이 못내 아쉬워.
지금이야 그 당시보다 땅값이 100배는 더 뛰었고 의료기술도
많이 발전했지만 의례 막상 필요할 때 없는 게 돈 아닌가 말이야.”
이모부는 저 멀리 인천 공항을 바라보며 아련한 옛 생각에
잠기는 듯 목소리가 젖어든다.

이모 산소에 오를 때
살살살 가볍게 내 앞을 저만치 앞서 걷던 이모부이지만
연세가 연세인 이모부에게 난 차에 항상 싣고 다니던
스틱 하나와 명아주 뿌리로 만든 지팡이를 드렸다.

나는 늘 내게도 며칠, 아니 하루라도 가서 지낼 수 있는
시골 친척이 있었으면 했다.
내게 도시에서의 일탈(逸脫)이 그에게는
귀찮고 사치스러운 방문이 안 되는 그런 친척이 아쉬웠다.
그런데 인천 공항 개통으로 많이 가까워지고 편리해진
인천 앞 바다 신도에 사는 이모부 댁,
철 지난 코스모스와 들국화가 사이좋게 어우러져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제법 넓은 새마을 포장도로가
동네 어귀를 돌아 지나고
지붕에 널려있는 새빨간 고추, 밭에는 주먹보다 큰 고구마,
야트막한 저 언덕 뒤엔 잘 익은 포도송이들,
밭이랑 여기저기 널려있는 늙은 호박덩어리들을 보며
여기가 내가 맘속 그리던 그런 친척집임을 느낀다.

“우리는 시골에서 뼈 빠지게 고생하는 데
너희는 서울서 편히(?)돈 버니 뭐 좀 내 놀 것 없냐?”
하며 공연히 갈구고 희뜩대는 옛날에 흔히 보던
부질없는 심술과 질투가 말끔히 가셔지고,
영락(零落)한 자에 대한 가진 자의 상대적 아량과 너그러움,
거기에 많이 풍족해진 시골 살림에서 오는 여유로움에
이제는 오히려 순수하게 고구마 하나라도
더 집어 주고 싸주고 싶어 하던그 마음들이
내 고향 내 친척의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다.

2: 24절기
산소에 다녀온 오후 나와 이모부 그리고 또 한 명의 친척 K,
이렇게 우리 셋은 이런 저런 야그 꽃을 피우며
다과(茶菓)를 즐기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대한(大寒)이 소한(小寒) 집에 와서
얼어 죽었다는 옛날 우스갯소리를 하던 끝에
K가 이모부에게“대한, 소한이 모두 24 절기중 하나인데
그 24 절기가 왜 생겼는지 알아요?”
“몰라”
“그건 농사짓는 데 편리하게 하려고 씨 뿌리는 시기,
벼 베는 시기 등을 놓치지 않도록 만든 것으로
우리 한국 옛 조상들이 달을 기준으로 만든 거야요”

나는 이때 그냥 모른 척 넘어갔어야 했다.
허나 아직은 너무나 수양이 부족한 나는
“24절기는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쓰는 음력이나 양력과는 약간 다른 절기력(節氣曆)으로서
태양의 황경 즉 태양이 1년 동안 움직이는 360˚를
15˚씩으로 나누어 중국에서 만든 거야.
이를 농경사회에서 음력과 함께 비벼 사용했지
그래서 그걸 태음태양력이라고 하지. 줄여서 음력이라고 하고...
그렇지만 우리가 보통 말하는 음력과는 달라.
어디까지나 그건 달이 아닌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한 양력(陽曆)인거지.
물론 이집트에서 B.C 2000년경에 1년을 365일로 계산해서
만든 양력과는 좀 다르지만 오히려 그보다 더 정확한 거야."

그래도 K는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린다.
K 왈 “어쩌면 이리 무식할 수 있냐,
나는 전통예절을 성균관 학자에게 3개월 간
정식으로 배웠기 때문에 정확히 아는 것이니
정 내 말을 못 믿겠거든 내일이라도
기상청에 물어보자”며 기세가 등등하다.
(그날이 일요일이었던 것이 참 아쉽다)

그래서 나는 다시 예를 들어 자기 생일을 음력으로
기념하는 사람들은 어느 때는 20일 씩이나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절기력인 입춘은
항상 매년 2월 4일이고 24절기의 첫 번째 절기로,
절기를 위주로 하는 사주(四柱)학에서는
새해의 시작을 음력 정월 초하루가 아닌
입춘을 기준으로 소위 12 가지 띠가 구별된다.
물론 그것도 지구가 23.5˚ 기울어서 타원궤도로 돌기 때문에
몇 년에 한 번씩은 하루 이틀 바뀌는 거야. 라고
자세히 설명해줘도 소귀에 경 읽기다.
목소리 큰 사람한테 당할 재주가 있나?
물을 입에 떠다줘도 마다하니
내가 입 다물 수밖에...
그 때 틀리는 사람이 평생 동생하자고 내기 걸 것을
후회가 막심하다.

어쨌든 비판을 받지 아니 하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
(마태복음:7장 1절)라고 했는데 나는 아직도 이 모양이다.

3: 한자 공부
그동안 주제넘게 이런 저런 어쭙잖은 호를 남발하던
이 아우에게 제형(諸兄)들이 설명이나 한 연후에
써 먹으라는 질책을 하시니 이에 황급히 설명 올립니다..

1): 찬하당(餐霞堂)
잘 아는 어느 재야 학자 어르신 호가 반하당(飯霞堂)주인이었다.
飯 : 밥 반, 먹을 반霞 : 아침 혹은 저녁노을 하.
노을을 먹는다고?...와 끝내주는 구나. 내 어찌 가만있을 소냐.
짧은 한자 실력으로 손에 잡히는 온갖 도교 책들을 탐사하기 여러 날
餐 : 삼킬 찬, 안주 찬으로 반하(飯霞)만큼은 질박한 맛이 덜 하지만
찬하라는 말 자체가 도가(道家)에 나오는 말로
아침저녁의 노을 또는 그 빛, 곧 우주를 먹고
우주와 내가 한 몸처럼 산다는 말이니
고(故) 탄허(呑虛)스님의 허공, 즉 우주를 삼킨다는 호와
비슷한 맥락의 자못 건방진 호이네요.
혜량해주시길 엎드려 빕니다.

100여 가지의 호를 사용했던 추사 김정희를
감히 흉내 내겠다는 것은 아니고
그때그때 글의 냄새와 무게에 따라
글과 비슷한 맛이 나는 호를 쓰고자 하는 객기를 부리니
그저 한쪽 눈 질끈 감아주시길...
자 우리 내친 김에 한자공부 더 해봅시다.

2): 화천(花泉), 오정(午亭), 만춘(晩春)
화천(花泉)은 돌아간 큰 스님 일붕 서경보 삼장법사께서
달마도와 함께 내게 내려주신 호다.
풀어보면 꽃샘이라는 뜻인데 10여년 잘 썼다.
헌디 좀 여성스러운 맛이 나는데다 내 사주(四柱)가
겨울철 김장배추 다 뽑고 난 후에 서리 앉은 시래기처럼
너무나 춥고 외롭기에
일양(日陽)이라고 무지 밝고 따뜻한 글자만으로
내 추운 사주를 비보(裨補)하는 의미로 스스로 지어 사용했었다.

그러다 어느 해 대전에 살던 고(故) 박재완 옹을
만난 자리에서 크게 혼이 났다.
“무슨 그런 크고 거창한 호를 건방지게 함부로 지었느냐”고...
하시며 따뜻한 한낮의 조그마한 정자라는 뜻의
오정(午亭)이란 호를 지어주며 앞으로 이걸 쓰란다.
하여 그 후 난 주로 찬하당주인 오정이라고 쓴다.

거기에 난 평생 겨울의 추위에 약한 한랭알레르기를 지녔고
여름엔 여름대로 원캉 땀을 많이 흘리며
남들은 하늘 높고 말 살찐다는 그 좋은 가을엔
소위 환절기라 하여 감기에 무방비 체질이다 보니
늘 봄이 농익고, 아직은 땀나기 전인 늦은 봄을 가장 좋아해서
만춘(晩春)이란 호를 같이 사용한다.

3): 구라(口羅)
입(口), 벌릴 라(羅) 이건 내가 수십 년 전 구라라는 말
처음 이 땅에 태동할 때부터 강의했던 터니 잘 아시겠죠?
즉 구라라는 말은 거짓말이나 뻥이라는 뜻만이 아니고
그저 입을 벌려 말한다는 뜻이라는 것을요.
나 그때도 그렇게 구라에
높은 품격의 옷을 입혀주느라고 애 많이 쓴 거죠.

4): 수작(酬酌)
이 말은 엉뚱한 말을 하거나 말을 서로 주고받는다,
라는 뜻으로 쓰기도 하지만
오늘의 강의는 술에 쓰이는 두 번째 뜻을 말하려 해요.
酬 : 술 권할 수. 酌 : 술잔 작, 술 따를 작.
작부(酌婦) : 술 치는 女子(이것을 격이 없게 술 친다, 대신에
술 따른다, 式으로 말하지 말아요, 최소한
우리 지란의 지기(知己)들은요)
엄밀한 뜻은 酬 : 술 권할 수이고 酌 : 술 받을 작으로
술을 주고받는 즉 권커니 작커니의 뜻입니다.
내가 하는 말은 전부 구라의 Combination으로 치부하고
통 배우려하지 않는 친구도 있지만요!

5): 어두일미(魚 두(?)一味)
생선 맛을 제대로 아는 일본인 중에는
생선회를 대체로 초고추장이 아닌
물기 없는 와사비(=고추냉이)를 한 덩어리 묻혀먹으며,
생선의 꼬리와 눈만 먹고 생선 다 먹었다 하는 이가 꽤 있어요.
그러나 그들이 생선 머리가 일미라고 머리 찾는 거 봤어요?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장어구이를 먹을 때
흔히 꼬리가 남자들 정력에 좋다고
그것만 기를 쓰고 먹는 친구 있잖아요.
그것도 사실은 더 맛있는 부위를 덜 미안해하며
더 많이 먹고 싶은 엉큼한 사람들이 만든 쌩 구라야요.

10여 년 전 중국에 갔을 때 난 중국인에게
생선 머리를 양보하며 내가 몸통을 먹겠다고 했더니
그 사람 눈빛이 좀 일그러지는 거야요.
난 그 때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요.
이상하면 치과 갈 것이 아니라 연구해봐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구라도 아카데믹해지고 발전되는 거야요.

생선 먹을 때 배받이 살 소위 ‘엔삐라’ 가 최고라는 말
많이 들어들 보셨죠? 바로 그기야요.
어두일미는 魚頭一味가 아니라 魚 두(?) 一味였었어요.
두(?) : 배 두字로 중국 등 다른 나라에서는
배나 뱃속을 나타낼 때 많이 쓰는 말예요.
이 말만 안 했어도 여태껏 한 말을 믿을 뻔 했다구요?
글쎄 손에 쥐어 줘도 싫다는 걸 낸들 어쩌겠어요!
자 오늘 공부(?)는 여기까지...

追記: 친구 간에는 가끔 편지는 말하듯이(구어체)
대화는 글 쓰듯이(문어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바램이다.

시몬 그대는 듣는 가?
낙엽 구르는 소리를... 구르몽

친구여 그대와
흐느끼는 저 바다
뜻 모를 신음소리를
밤새워 듣고 싶구나...
시커먼 밤 하얗게...

누구 나랑 불쑥 내일 새벽이라도
저 겨울 바다를 찾아갈 친구 없느뇨?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 1953)
각본 : 이안 맥렐란 헌터(Ian McLellan Hunte),
존 다이톤 (John Dighton)
감독 : 윌리암 와일러 (William Wyler)
출연 : 그레고리 펙 (Gregory Peck)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에디 알버트 (Eddie Albert)
하틀리 파워 (Hartley Power)
하커트 윌리암스 (Harcourt Williams)
마가렛 로우링스 (Margaret Rawlings)
털리오 카미나티 (Tullio Carminati)
녹음 : Joseph De Bretagne
미술 : 헐 페레이라 (Hal Pereira),
월터 타일러 (Walter Tyler)
분장 : Wally Westmore, Alberto De Rosssi
원안 : Ian McLellan Hunter,
달톤 트럼보(Dalton Trumbo)
음악 : 조르주 오릭 Georges Auric
의상 : 에디스 헤드 (Edith Head)
제작 : 윌리암 와일러 (William Wyler)
조감독 : Herbert Coleman, Piero Mussetta
촬영 : 프란츠 플래너(Franz Planer),
앙리 알레칸(Henri Alekan)
편집 : 로버트 스윙크 (Robert Swink)
상영시간 : 118 분
관련영화사 : Paramount Pictures
William Wyler"s Production

역대 영화의 히로인 중 「공주」역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는? -
오드리 헵번, 그리고 그 공주가 헐렁한 기자와 사랑에 빠진다면
가장 잘 어울릴 도시는? - 로마

최고의 해"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故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그같은 선택은 절묘했다. 53년 아카데미가 혜성과 같이 나타난
오드리 헵번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이래 "로마의 휴일"은
기껏해야 동화의 품속에서나마 휴식을 얻고자했던 세계인들의
소박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세상 여자들이 모두
그녀 같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는 누군가의 말에
시비 걸 생각이 없을 만큼
헵번은 예쁘고, 생동감 있고, 싱그럽고, 요정 같고 또 공주답다.
"로마의 휴일"은 무명이었던 오드리 헵번을
단번에 세기의 요정으로 만들어 놓았다.

텅 빈 기자회견장을 빠져나오는 그레고리 펙의 허망한 눈빛을
마지막으로 엔딩 크레딧이 떠오를 때 가슴 한켠이
싸아해지기도 마찬가지였다.
지지고 볶는 사랑 영화를 무수히도 봐왔건만,
에로틱과는 거리가 한참 먼 밋밋한 키스신 밖에 없는
영화를 보면서 여전히 가슴이 싸아 해질 수 있다는 게
오히려 신기했다.

로마의 휴일"은 윌리엄 와일러와 오드리 헵번, 그레고리 팩을
한데 묶어 좋아하는 배우·감독·작품으로 선정하던,
얼치기 할리우드 키드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색다른 감흥도 주었다.
더불어 마지막 로맨티스트라 불렸던 영화평론가 故 정영일씨를
기억 속에서 불러내는 가외의 소득도 있었다.

EBS에서 명화극장 프로로 「사브리나」,
티파니에서 아침을등을 소개할 때 「오드리 헵번의,
오드리 헵번에 의한,
오드리 헵번의 영화입니다. 놓치지 마십시오」라며
맛깔스레 우리를 유혹하곤 했던,
텔레비전 화면에서 영화평론가 고(故) 정영일 씨의
두꺼운 안경테와 특유의 음색이 사라졌던
그 즈음의 토요일 오후가 얼마나 허전했던지....

깡마른 소말리아 어린이를 안고 있던 말년의 오드리 헵번을
생각해본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올 웨이즈」에서
사랑하는 홀리 헌터를 잊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리처드 드레이프스를 위로하는 흰 옷의 천사로 나왔던 그녀.
그 영화처럼 지금도 어느 하늘 아래선가
사랑을 잃고 헤매는 이들을 지키고 있지 않을까?

해마다의 조사에서 영화팬들이 다시 보고 싶은 명화 중에
첫 번째로 꼽힌다는 영화 "로마의 휴일"은 1953년에 제작된 이래
근 50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도
변함없는 절찬과 사랑을 받는 명화 중의 명화이다.
몇 차례나 리바이벌 되고 있지만 그래도 물리지 않고
퇴색되지 않는 주옥같은 명작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거장 윌리암 와일러 감독이
오드리 헵번이라는 신인 여배우를 만남으로 인해
거의 영화의 성공을 약속 받은 작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귀족 가문인 어머니의 피를 이어 받은 그녀는
연기로도 보충할 수 없는 우아한 기품을 갖추고 있다.
만약 그녀 이외의 다른 여배우가 그 역을 맡았더라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만인으로부터
사랑 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자아내게 한다.

명시되지 않은 가상의 한 왕국의 공주인 앤은
유럽 각국을 친선 방문 차 순방 중에 로마를 방문하게 된다.
그녀는 왕실의 엄격한 규율과 꽉짜여 진 스케줄에
지쳐 있는 상태이고 잠시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음에
아쉬울 뿐이다. 바쁜 스케줄에 시달린 공주는 의사의 권유로
다음날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안정제를 먹고 침대에 눕는다.
그러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자유로운 해방감에 잠도 오지 않는
앤 공주는 창밖을 보다 문득 충동적으로
로마의 거리에 나가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잠자리에 드는 척하고는 변장을 하고
몰래 궁전을 빠져 나와 밤거리의 로마로 무작정 향한다.

생전 처음 맛보는 자유로운 해방감에 그녀는 신이 나서
거리를 쏘다니다가 몇 시간 전에 먹은 안정제의 약효로
스페인 광장에 있는 벤치에 쓰러져 그만 잠속으로 빠져 든다.
그때 마침, 이번 앤 공주의 유럽순방을 따라다니며
특종 기삿감을 노리고 있는, 미국에서 파견된
로마 특파원 신문기자 조(그레고리 펙)가
거리를 거닐다 우연치 않게
광장 벤치에 쓰러져 잠들어 있는 앤 공주를 발견한다.

조는 거리에서 자고 있는 아가씨를 그냥 내버려 두고
갈 수가 없어 일단 자기 하숙으로 데려가 침대에 누이고
자기는 소파에서 잠을 잔다.
다음날 아침 조는 신문사에 출근해서야 비로소
공주의 실종사건을 알게 되고 어제 그 아가씨가
자신이 찾던 특종 감임을 알고 부랴부랴
동료인 사진기자 어빙을 불러 의논하고는
하숙집을 나온 앤의 뒤를 몰래 따른다.
아침에 잠을 깬 앤 공주는 낯선 풍경에 놀라기는 했지만
지금을 다시없을 기회로 여겨 로마 시내를 구경하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선 것이다.

트레비 분수 가까운 미용실에 들어가 긴 머리를 숏 커트해 버리고
사람들이 눈치 채지 않게 거리를 거닐었다.
아무런 낌새도 차리지 못한 앤에게 스페인 광장의 계단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접근한 조는 그녀에게 로마 구경을 안내하고
친구 어빙은 라이터 모형의 소형 카메라를 몸에 지니고서
공주의 일거수일투족을 몰래 촬영한다.
둘은 로마 시내를 구경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앤 공주는 신사답고도 부드러운 매너의
조에게 사랑을 느끼고, 조도 아름답고 순수한 앤 공주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앤은 처음으로 담배를 피워보기도 하고,
조 브래들리가 모는 모터사이클의 뒷좌석에 앉아
로마 시내를 구경하기도 한다. 그리고 과속으로 경찰에게 붙잡히자
앤 공주가 조의 허리를 껴안으며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한다.
"결혼식을 하러가는 거예요"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던 감시관의 눈에서 해방된 그녀는
마냥 즐겁기만 하다. 보는 것, 듣는 것 모두가 처음 보고 대하는
진귀한 서민의 생활 가운데서 평소에 동경해 온 자유를 만끽하며
기뻐 날뛰는 모습에서 오드리 헵번 자신만의 경쾌한 리듬이
들려오는 듯하다. 스트로로 종이를 불어 멀리 날리기도 하고,
버스를 타고 소란을 피우는가 하면 기타로 남자를 휘갈기는 등
공주답지 않은 행동에 웃음이 새어 나오며 관객들은 점차 그녀에게
이끌리게 된다. 그러나 이때 공주의 실종을 알아차린 대사관은
발칵 뒤집혔고 정보기관이 총출동하는 등 초비상이 걸린다.
한편,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민의 자유를 만끽하는 앤과
행동을 함께 하던 조는 점점 그녀의 순수한 아름다움에 이끌리며
차츰 애정을 갖게 된다.

테베르 강변의 무도장에 간 두 사람은 왕궁 쪽에서 보낸
비밀탐정에게 발견되어 대 소동이 일어난다.
첩보원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달려들자 그들은 물속으로 뛰어들어
간신히 추격을 피하지만, 그들에겐 돌아가야만 하는 현실이 있었다.
서로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아쉬운 작별의 키스를 하고
공주는 무지갯빛 추억을 간직한 채 궁전으로 돌아간다.
조도 특종 감으로 기록해둔 사진을 모조리 찢어버리고
이들만의 순정을 영원히 간직하기로 한다.

귀국하기 전의 앤 공주 기자 회견장.


앤은 수많은 기자들의 무리 속에서 순간 조를 발견한다.
앤의 눈망울 속에 잠시 당혹함이 돌 때,
한 기자가 로마를 방문한 기념 선물이라며 작은 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는 어제 만난 조의 친구 어빙...,
어빙이 건네준 봉투 속에는 조와 앤의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이
담겨져 있었다. 두 사람은 사랑을 가득 담은 눈길만을 주고받을 뿐,
신분의 차이로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추억을 가슴에 묻은 채
서로의 길을 걷는다. 마지막으로 조는 앤 공주에게
어떤 도시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앤 공주는 로마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앤 공주는 정중하게
조 브래들리를 향해 고맙다는 말을 하고 돌아선다.

영화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 번 조 브래들리를 쳐다보고서
기자회견장을 떠나는 앤 공주의 모습과 천천히 그곳을 빠져 나오는
조 브래들리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달콤하면서도 애절한 두 사람의 이별 장면은
영화사상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기록되고 있다.


오드리 헵번은 열아홉 살 때 단신으로 런던으로 건너가
발레리나 수업을 받다가 1950년 마리오 덴비 감독의 눈에 띄어
"낙원의 웃음"에 단역으로 데뷔했다.
이후 "젊은 아내의 이야기", "첫사랑"등 6개의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했으나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프랑스의 몽테 카를로에 체류 중에 출연하는데
이곳에서 만난 "지지"의 작가 꼴레트 여사의 눈에 띄어
브로드웨이 무대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됐다.

그 공연을 계기로 오드리 헵번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로마의 휴일"에 주연 배우로 캐스팅 되면서
청순하고 여린 이미지로 세계적인 배우로 발돋움하는 한편
영국에서 활동하던 무명의 오드리 헵번은 이 영화로
미국 영화계의 신데렐라가 됐고 아카데미여우주연상까지 받게 된다.
그리고 1964년엔 "마이 페어 레이디"로 최고의 스타 자리에 오르면서
"사브리나", "샤레이드", "티파니에서 아침을", "어두워 질 때까지"
등으로 네 번이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됐다.

오드리 헵번의 출현은 당시 영화 스튜디오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풍만한 몸매와 육감적인 매력이 여배우의 인기도를 좌지우지하던
시대에 가냘픈 몸매를 가진 발레리나 출신의 오드리 헵번은
당대의 스타, 마릴린 먼로나 리즈 테일러, 소피아 로렌과
완전히 다른 매력을 보여줬던 것이다.

오드리 헵번은 남다른 패션 감각을 자랑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지방시의 심플하고 품위 있는 의상을 즐겨 입었다.
빌리 와일더 감독은 그녀를 가리켜
"아무리 어려운 말이라도 알듯한 분위기를 가진 배우”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그녀는 영화 촬영장에서도
책에서 손을 떼지 않은 독서광이자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의 휴일"의 촬영 이 후로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펙은
다시 함께 콤비를 이루어 영화에 출연한 적은 없지만
둘은 죽을 때까지 좋은 친구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