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을 준비하기 위해 떠난 길은
눈이 내린 빙판 길이였다.
평소 한 시간이면 갈 수 있었던
청평 가는 길이 무려 네 시간 이상 걸렸다.

나는 종가의 맏며느리이다.
남편은 5남 3녀의 맏아들이다.

설날이나 추석에는
집안의 어른들이 오시기 때문에
40명 정도가 한 식구가 된다.
같이 일해주는 동서가 있지만
그래도 이름있는 날을 치루고 나면
나는 며칠간 몸살을 한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단단히 준비를 하고
설날을 맞이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 설날은
부모님의 심기가 편안치 않으셨다.
우리를 보자마자
느닷없이 둘째나 네쩨 아들 집으로 가야겠다는 것이다.
"이 곳에서 사시는 것이 불편하시면
저의 집으로 가셔야지요." 라고 말씀 드렸더니
우리집은 교회 사택이여서 불편하여 싫으시다니
이 난감함을 어떻해야 좋을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형님이 허락하시면 저희집으로 모실께요."
둘째와 네째 며느리가 합창을 하며 나섰다.

내가 결혼 했을 때
노할머니를 비롯하여 12식구였다.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가는 동안
시동생들이 장가가고...
시누이들이 시집가고...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시던 노할머니는
92세로 장수하시고 돌아가셨다.
온 식구가 십수년을 같이 살다가
건강이 나빠지신 부모님이 시골로 가시고 싶어 하셔서
이 곳 청평에 집과 텃밭을 마련해 드렸다.

그 세월을  한 가족으로 엉키어 살아 왔는 줄 알았는데
이제와서 너희집 내집이 따로 있어야 한단 말인가?

설날 내내
큰 죄를 지은 죄인처럼
이십년이 넘는 세월을
부모님께 제대로 못한 자식으로 정죄 당하고 있었다.
그 무거운 쇠사슬을 풀어준 것은 시누이들이었다.
설날 오후에 친정에 온 시누이들은
부모님의 폭탄 선언을 듣고는
"언니! 부모님이 가시고 싶다면 한 번 가 보시라고 해.
다른 오빠들이 모시고 싶다면 한 번 모셔보라고 해.
언니는 가만히 보고만 있어." 하더니
"큰 오빠가 허락 하신다니 누구든지 부모님 모시고 가세요.
오늘 공개적으로 결정해요.
아버지! 누가 모시겠다고 했어요?."

아버님이 지적하려고하자
방에 있던 며느리들이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엄마!
이것 보세요.
제발 큰 오빠, 언니 좀 속상하게 하지 말아요."
이렇게 해서 한 번 불어 닥쳤던 바람은 잔잔해졌지만
나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차라리 묻어두게 할것을...
사태의 진실을 알게 된 부모님은 얼마나 깊은 상처를 받으셨을까?
나는 나에게 큰소리 치시는 부모님의 모습이 보기에 더 좋다.

시동생들은
"형수님! 형수님이 계셔서 언제나 든든해요.
어려운 집에 맏며느리로 오셔서
고생이 많으셔도 항상 웃으셔서 너무 고마와요.
형님에게도 절대 알리지 마시고
형수님 혼자 쓰세요.
형수님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다 사세요."하면서
둘째는 상품권을
네째는 선물을  
다섯째는 수표를 주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각자의 지혜를 짜서 나에게 건낸 것들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동서들에게 적절히 나누어 주었다.
서먹하고 틈이 벌어졌던
우리 며느리들은 이내 깔깔 웃으며 하나가 되었다.
자기가 받은 선물이
바로 자신의 남편이 갖고 온 것임을 모르는 채로...

우리네 인생살이 중엔
때로 밝히지 말아야 좋을 것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가령
누가 부모님을 모시겠다고 말로만 했는가? 라든지
오늘 우리들에게 준 맏동서의 선물은 왜 이렇게 후하고 좋은 것일까? 등등

묻어두면 좋을 것들은 그렇게 묻어두면서 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