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960년대 다방과 문예 중흥시대 - 은성다방 시절Ⅰ 


2011년 12월 09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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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1월13일'은성다방'에서 열린 음악회 포스터.


피난 시절 부산에는 각지에서 모여든 문화 예술인들이 암담하고 불안한 나날을 함께 보내던 다방, '밀다원(蜜茶園) 시대'가 있었다면, 인천에는 1950년대 말을 지나 1960년대에 들면서 전쟁의 상흔도 이제 무던히 지워져 가던 무렵, 북에서 남에서 이리저리 떠밀려 온 문화 예술인들이 저마다 찻잔을 앞에 놓고 삶과 예술을 논하던, 가난했지만 예술만은 더 없이 은성(殷盛)했던, 바로 '은성(銀星)다방' 시절이 시작된다. 

고여와 필자와의 만남은 1950년대 필자의 고교시절부터였다. 이후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부단한 교우를 가졌는데 부친뻘 연배인 그와 노소동락하며 술자리까지 함께 했던 것은 외람스럽게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라 할 것이다. 황량하고 고달팠던 시절 인천의 예술인들이 담합해 주로 모이던 장소는 예총이나 문화원 사무실, 그리고 은성다방, 신포동의 시장바닥 주변 목로주점 등지였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우리들의 하루 일과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장소로 맴돌았다. 70년대 이후 거의 전업 화가나 다름없는 무직 상태에서 고여 또한 어려운 생활 여건을 헤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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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8년'화선장'앞에서 기념 촬영한 인천로터리 회원들. 맨 왼쪽 사람 머리 위쪽으로 일식집'이화정'간판과 그 밑에 작은'은성다방'간판이 보인다. /사진제공=조우성


그 시대(60~70년대)를 산 사람들은 신포동 일대에 대한 남다른 애틋한 감회를 가질 것이다. 인천 예술관계 인사들의 이른바 '대폿집 순례'가 신포동 시장 골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백항아리집'이라는 특이한 목로주점이 그 순례 축의 한가운데에 있다.

문학평론가 김양수의 글을 인용하면 "그 때 '백항아리집'으로 말하면 단순한 목로주점으로서 몇 평 되지 않는 구조인 까닭에 따로 술과 안주를 차려놓는 탁자가 있는 것이 아니고 벽 쪽으로 돌아가면서 선반이 걸려 있고 대개는 그 선반에 안주 한두 접시와 술 주전자가 놓여 각자 마실 수 있을 만큼 청해서 마시는 아주 싼 술집으로 신포동 일대를 배회하는 많은 술꾼들이 드나드는 집이었다." 

이 '백항아리집'의 정경만치나 궁핍했고 그러면서도 낭만이 살아 있었던 시절, 고여의 행동반경은 많은 인천 예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신포동 언저리를 별로 벗어난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신포동 시장 골목은 한 시절 인천 예술인들의 숨통을 열어 주는 카타르시스의 바운더리였다고나 할까, 그것도 술시(酒時)에 접어든 이후부터이다. 그 이전 훤한 대낮에는 예의 은성다방으로부터 불시적인 선택이 이루어진다. '은성다방의 추억'에 대해 언젠가 필자가 기술했던 글의 일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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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성다방'이 있던 자리. 현재 1층은 의류점, 다방이었던 2층은 주점이 들어서 있다. /사진제공=김효선

그 무렵, 도심의 번화가였다고도 할 수 있는 중앙동 대로변의 한 모퉁이 일식집 2층에 자리잡은 이 다방은 한때 문화 예술인들의 휴식처이자 거점이었으며, 또한 예술 활동의 숨통을 터주는 장소로도 활용되어져 왔다. 무엇보다도 마땅한 전시 공간을 달리 구할 수 없던 당시에 화가들의 작품 발표가 여기서 치러지는 일이 많았다. 혹은 시 낭송이나 시화전의 장소로, 혹은 창작집의 출판기념회나 각종 문화 예술 관계 집회 모임의 장으로 크게 배려되었던, 황량한 시대의 문화 소통의 공간이자 카타르시스의 배출구이기도 했었다. 

차 한 잔으로 공허한 시간을 때우는 실업자 예술인들이 매일같이 본능적으로 찾아들어 환담을 교환하는 '만남의 터'였다. 무엇엔가의 기다림 같은 것이 항상 짓누르는 무거운 분위기 가운데서 무위에 주눅 든 듯한 예술인들이 초현실적인 자세로 앉아 있는가 하면, 제법 활기 있게 움직이는 봉급생활자 무리도 끼어든다. 늘 틀어놓는 레코드판은 그런대로 격조 있는 클래식이다. 삐걱거리는 목조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맞아주는 그 집 주인 속칭 마담 김윤희는 애교라고는 거의 없어 보이는 여성이지만 손님에게 긴장감을 조성하지는 않는다. 

이 은성다방에서의 모임이 실마리가 되어 의기투합된 50대의 미술인들로서 출범을 본 것이 오소회(五素會)이다. 이경성의 발의로 결성된 이 모임은 처음에 5인의 50대(박응창, 윤갑로, 김영건, 우문국, 이경성)로 틀이 짜였고 현직 인천시장까지 영입되었다. 69년 은성다방에서의 창립전을 시발로 10년 가까이 수명을 누렸다. 나중에 검여를 필두로 서예가까지 참여한 이 그룹은 점차 회원의 수를 늘리면서 아마추어적인 성격을 탈피하게 된다.

얼마 전에 작고한 인천 출신 미술평론가 김인환(金仁煥)이 쓴 <고여, 인천화단의 산증인>이라는 글의 일부분이다. '은성다방'의 '터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고여 우문국 선생과의 한 시절에 대한 김인환의 개인적 회상기다. 

여기에 그 글의 상당 부분을 인용한 것은 초기 '은성다방'의 성격과 분위기, 거기 출입하던 문화 예술인들의 실정과 모습, 또 그들과 다방의 관련, 역할 등을 이처럼 재미있고 자세하게 기록한 글로 이것이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내용 중에 "중앙동 대로변"이라는 대목에서 혹 착오가 있을까 싶어 부연하는데 지금은 '개항로 대로변'이라야 맞는다. 중구 신포동 59번지(새 번지로는 신포로 32-1)이다. "일식집 2층"의 일식집은 그 상호가 '이화정'으로 그 아래 있던 음식점 화선장에 비해서는 훨씬 성가(聲價)가 떨어졌다. 현재는 게스(Guess)라는 의류점이 들어 있고, 그 지하에는 주점이 문을 열고 있다. 옛 건물은 외부와 달리 내부는 일인들이 지은 목조건물로서 지하실이 없었으나 후일 양옥으로 신축하면서 생겼다. 

1960년대 말 우리는 군대에 가기 전이나, 돌아온 1970년대 초나, 늘 기름 걸레질을 한 나무 계단과 나무 널바닥을 밟고 도로에 면한, 정해진 듯 4번 테이블에 가 앉아 창 밖 저 멀리 월미도 쪽으로 쓸리는 자줏빛 노을을 바라보곤 했었다. 안쪽으로는 한상억, 김길봉, 최병구, 손설향, 김양수 선생들이 앉아 계셨고…. 그 시절이 한없이 그리워진다. 그곳은 진정 향수(鄕愁) 같은 곳. 그곳은 젊음과 문학이 있던 곳. 노을을 내다보며 인천을 울고, 문학을 울고, 사랑을 울던 장소. 은성다방! 이렇게 조용히 입속으로 뇌어 보면 그 옛날이 모조리 되살아나 온몸을 욱신거리게 한다. 

다시 이야기를 돌리자.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은성다방'이 인천 예술인들의 아지트, 나아가 예술인들의 메카가 되어 버린 것일까. 그리고 1990년대 이 다방이 문을 닫을 때까지 계속되었던 것일까. 

1960년 2월 김찬희개인전이 은성다방에서 막을 열고 같은 장소에서 11월 유희강서예전, 12월 김종휘 수채화전 등이 있었고 7월에 이재호개인전이 20세기다방에서 열렸고 11월에 제2회 소성미전을 상공회의소 전시장에서 열고 신인상을 반도병원장 이동신 씨의 유화에 수여했다.

역시 우문국 선생의 글에서 인용한 것인데, 1960년 시작과 함께 '은성다방'이 미술인들의 전시장 으뜸 노릇을 하고 있다. '낙랑' '등대' '세루팡' '유토피아' '항도' '금잔디' '미원'으로 내려오던 예술인들의 출입 다방이 어느 결에 이렇게 '은성'으로 바뀐 것일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이의 대답은 앞에 인용한 김인환 평론가의 글 중에 "삐걱거리는 목조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맞아주는 그 집 주인, 속칭 마담 김윤희는 애교라고는 거의 없어 보이는 여성이지만 손님에게 긴장감을 조성하지는 않는다"는 구절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출입을 시작한 우리에게는 썩 그렇지도 않았지만, 속칭 마담 김윤희 씨가 우리 윗세대인 우문국 선생 연배에 대해서는 늘 긴장감을 조성하지는 않았던 이유가 첫째였을 것이다. 
실제 문화 예술인들은 지나치리만큼 예민해서 다방 여주인의 말 한마디에 영영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는 경우가 많다. 혹 차를 안 마신들, 혹 종일 '벽화(壁畵)'처럼 붙박여 앉아 엽차만을 축낸들, 터지는 속을 누르고 예사스럽게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같으면 누가 이런 식으로 장사를 하랴. 그러나 '은성'은 그렇게 다방을 운영했다. 물론 앞의 다방들이 어느 날 꼭 그 같은 '실수(?)'를 해서 문화 예술인들로 하여금 발걸음을 돌리게 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훗날에 이르러 '은성다방 1세대 분들'과 자주 접하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그런 느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뿐이다.

우리가 첫 출입을 시작하던 1966년에는 다방은 두 명의 레지 여성과 주방장이 운영하는 체제였다. 유독 이 다방은 일반 다방들과 달리 전문 '가오 마담'을 두지 않았다. 거개가 신문기자나 문화 예술들, 혹은 화선장에서 식사를 끝낸 높은 공무원 같은 점잖은 손님들이 주를 이루니까 다방 명성 때문에도 그랬던 것 같다. 또 레지를 불러 앉히고 잡담을 하거나 시시덕거리는 일도 이 다방에서는 없었다. 

낮은 높이에, 등을 기대기에 적당한 각도로 벌어진 목의자와 테이블 위로 길게 내려진 따듯한 백열등과 그것을 씌운 하얀 깔대기형의 전등갓, 그리고 좌우 두 면이 아래위로 올리고 내리는 도르레 식의 환한 유리창으로 뚫린, 널마루 2층집의 다실 분위기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문화다 싶고 예술이다 싶었다. 길게 카운터 맞은편의 유일한 흰 회벽에도 요란하지 않은 동양화와 서예 액자 둘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음악은 주로 살롱 뮤직이 나지막하게 실내를 흘러 다녔다. 조촐하면서도 맵시 있고 안락하게 꾸민 응접실 분위기였다.


사각형 실내의 긴 쪽 두 면에 창문이 세 개씩 달려 있어서 실제 그림 전시를 하기는 유리하지 않았다. 문 옆의 1번 테이블 쪽 층계 때문에 생긴 작은 벽에 두 점 정도 걸 수 있는 공간과 양쪽 벽 유리창 사이의 공간을 합쳐 예닐곱 점, 그리고 유일한 회벽에 두서너 점, 1층 화장실로 가는 계단 입구의 칸막이에 두어 점을 걸 수 있는 정도였으니 여간 옹색하고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당시 아무런 문화 인프라가 없던 인천시내에 갤러리로서 미술인들의 전시 갈증을 풀어주는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은성다방'의 이런 아취(雅趣) 있는 실내 분위기, 그리고 "손님에게 긴장감을 조성하지는 않는" 마담과 아름다운 레지 여인들의 품위 있는 운영 자세가 일거에 인천 문화 예술인들을 끌어들이는 강한 흡인력으로 작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윤식(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