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인천에 대한 내 기억의 퍼즐 조각들.
인천 이라는 지역과 인연을 맺은지도 삼십년이 넘고 내나이 벌써 이순 , 지금도 인천에 꼬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으니 나와 인천은 참 질긴 전생의 인연이 있나보다. 그러나 내 어린시절 인천에 대한 기억은 그래도 강팍하고 뭔가 배신 당한 것 같은 지금의 인천은 아니었다. 인천에 대한 내 첫 기억은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까까머리 반바지 시절 (내가다닌 경북중학교는 학생 들에게 반바지를 입혔다). 당시 대구에는 6,25때 서울 등지에서 피난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우리는 서울에서온 학생들을 서울래기 다마내기라고 질투반 심술반으로 놀려대곤 하였다. 그때 같은반 학생중에 인천에서온 학생이 있었다. 그땐 아직 어릴때라 인천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고 학교에서 배운대로 갑문식 독이있는삭막한 어떤 항구 정도로 막연히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후로 나는 서울로 고등학교 진학을 했고 곧 인천에 있는 친구들이 생겨 인천을 드나들게 되었다. 당시에는 서울에 전차가 다닐때이고 서울이 조그만 도시일 때여서 학생들은 시간이 있을때 뚝섬과 광나루(지금의 워커힐)등을 다녔는데 광나루의 물이 너무 맑아서 수영을 하면서 마시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서울에서 인천을 오는것은 기차를 타고 딴도시를 여행하는 상당히 멀고 긴 여행이었다. 용산에서 출발해서 소사에서 한번서고 인천역에 도착 했는데 그땐 기차가 화물칸도 같이 달고 다녓던것 같다. 우리는 인천에서 친구들을 만나 주로 월미도 작약도 송도등을 다녔고 말하자면 제법 관광을 했던 셈이다. 당시에 작약도는 인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이었고 바닷물이 맑아 바닥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말하자면 청정해역 이었는데 지금의 작약도를 생각하면 꿈같은 이야기다. 이렇게하여 시작된 인천과 나와의 인연은 십여년의 서울생활과 경기도 유랑생활후에 다시 인천으로 이어 지면서 그 질긴 악연이 이어지고 있는샘인데 내가본 칠 팔십년대 인천은 지금의 신포동과 신흥동 그리고 자유공원 주변을 중심으로한 조그만 도시였으며 청관을 중심으로한 중국인 거리와 신흥동 일대의 일본식 건물이 아기자기 하면서 이국적인 풍경을 가진 그런 도시였다. 그때만해도 인천에는 답동성당을 비롯한 일제시대의 각종 공관 건물들이 제법 큰 모양으로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어 옛맛이 나는 풍경 이었는데 새로지은 율목동 언덕위의 시립도서관 자리에 올라서면 인천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 인천시립도서관은 인천의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청운의 꿈을 키우던 명소 이기도 했으며 지금으로 이야기 하면 인천 젊은이들의 미팅 장소 이기도 했다. 그일대 율목동의 한옥집들은 인천 특유의 작은 미음자 형태의 한옥으로 인천의 중산층들이 살던곳이었다. 시립도서관 남쪽으로 내려오면 해광사 절이 있었고 그 일대에 일본식 집들이 있었는데 그집 이층에서 지금은 타계하신 황추선생이 그 유명했던 누우런 바다 그림을 그리던 모습이 생각 난다. 그 때만해도 인천의 높은곳에 올라가면 손에 잡힐 듯 바다의 염전들이 보였는데 인천교 일대의 개건너 염전과 제일제당 건너편의 낙산주변 염전이 그랬다. 그땐 제일제당 앞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와 친구와 같이 그곳에서 망둥이를 잡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이 염전의 둑길들은 갈대들과 어울려 해질녁이면 멋진 풍경을 만들었는데 소금창고를 배경으로 나는 수채화를 그렸다. 당시 인천에는 승합버스 라는 것이 다녔는데 약사사 부평 송도등의 시외를 나가려면 그것을 타고 갔다. 송도 쪽으로 나가면 옥련동 바다가에 조개고개라는 곳이 술집동네로 유명 했고 남동까지 나가면 무공해 바다풍경이 시원하게 뚤려 있었다. 지금은 절 이름이 바뀌었지만 송도 뒷산에 인명사라는 절이 있는데 늦가을 쯤인가, 젊은 객기에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고 절 마당에서 자다가 새벽에 얼어 죽을뻔한 기억이 난다. 인천은 항구도시고 항구 하면 술집을 이야기 하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당시의 인천에는 동인천일대 신흥동주변 학익동 등에 홍등가가 번창을 했고 신흥동에는 옛유곽건물 같은 것이 남아 있어서 그곳을 지나며 시인 이상의 삶에 대하여 생각해보기도 했다. 술집동네로 이름있던 곳은 그래도 애관극장뒤 용동일대가 유명 했으며 그당시만 해도 팁 이라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는데 교육받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기생들이 술대접을 했고 밤늦게까지 젓가락 장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항동쪽에 외항선원들을 주고객으로하는 시멘스크럽 인터네셔널 등의 외국인전용 대형술집들이 생겨났는데 나중에는 한국사람들도 술을 마셨다. 그곳에서는 루이 암스트롱 풍의 째즈를 들을수 있었고 흑인들의 정열적인 춤도 구경 할수 있었고 돈을좀 쓰면 이국적인 정취를 맛볼수도 있었다. 당시의 유일한 문화시설이 극장이었는데 일제때부터 내려온 동방극장이 입구의 조그만 아치와 의자등이 옛정취를 느끼게했고 신세대 극장으로 키네마극장 세기극장 애관극장등이 새로생겨 유명해졌다. 그시기에 서울에서는 종로와 명동 등에 디쉐네 돌채 라스카라등의 클래식 음악실이 유행 했는데 곧인천에도 상륙하여 짐다방 커피코너등이 클래식다방으로 문을 열었다. 당시의 인천 미술인들은 주로 인천공보관 등에서 작품 발표를 하였는데 은성다방이 화랑역활을 하고 있었다. 검여 유희강 등의작품을 그곳에서 볼수있었고 당시 열심히 활동을 하던 화가는 박영성 우문국 황병식 이철명 정순일 등이었으며 동정 박세림의 집도 신포동 쪽에 있었다. 인천에서 활동하던 시인들과 화가들은 주로 신포동 쪽에서 만났으며 신포시장안의목로주점 백항아리집과 신포주점 미미집등이 유명 하였다. 백항아리집은 큰 항아리크기의 일제시대에 만든 흰색 항아리에 술을 담아놓고 할아버지가 바가지로 퍼 주었는데 그술이 너무독해 게딱지 빨고 한두잔이면 취해서 비틀 그렸다. 그래서 인천의 내가 아는 한 시인은 그곳을 병병자를 써서 백병원 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주사맞으러 간다고했다. 당시 시장안에는 답동관 이라는 해장국집이 유명했으며 튀김우동이 싼값으로 해장국 역할을 하기도 했다. 깡술에 쓰린속을 싸구려 튀김우동으로 달랜 것이다. 당시의 신포시장에는 황새기(연평도 근해에서 잡은 누런 참조기) 민어 등이 먹거리로 유명했는데 지금은 구경도할수 없으니 세월따라 식생활도 많이 변했구나. 인천을 이방인의 도시라고 했던가. 내가 나를 그리 만들었는가. 시멘스 크럽의 실력있던 밴드마스터, 째즈 키타를 치던 우리들의 와이키키 부르더스 들과 백항아리의 시인 묵객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 인천에 대한 기억의 파편들 그것은 시대를 끼워 맞추어온 하나의 퍼즐 조각에 불과한 것을, 지금의 인천 살이도 그러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강하진 작가 약력
1943년 대구출생
서울사대졸
1974-1999 인천지역 중등학교 미술교사
인천 시립대학교 강사 역임
한국미술협회 회원
서양화가,설치미술가
2010년가을 고국방문중 인천 자유공원,연오정에서
???옥인씨!!!!
기억하고 말고요.
희미하게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던 추억들이
하나 하나 떠오르게 합니다.
우리가 나이들긴 했나봐요.
완전히 '그 때를 아십니까?' 이군요.ㅎㅎㅎ
옥인후배! 대단해요.
사실 말이 인천 태생이지 인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요.
우린 아버지가 황해도고 어머니는 경북 출신이셔서 인천 토박이가 아니다 보니
인천의 역사나 변천에 대해서는 그다지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는 듯 해요.
순영언니는 인일여고 시절 어디 사셨어요?
별게 다 궁금해지네요. ㅎㅎㅎㅎ
짐 다방에서 절대로 뺄 수 없는 음악이
프레터즈의 Smoke Gets In Your Eyes 이지요.
왼쪽에 II누르면 음악이 꺼집니다.
글을 쓰신 분이 인천의 문화인들을 잘 알고 있는 것을 보니
그분들과 가깝게 지내셨나 생각이 됩니다
저희도 황 추 선생님의 인천항 유화를 오래 가지고 있다가
몇년전인가 인천시에 드렷다는 말씀을 들은적이 있어요.
인천의 옛 모습들이 아른 아른 눈에 보이는듯 합니다.
1) 저희 집 화가들은 저기 거명되신 화가분들과 대개 교분이 있었지요.
2) 그리고....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것 같은데
외화획득의 현장, 시멘즈크럽.......아마 인천에서 세계와 가장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곳!
여기서 춤추고 떠들던 젊은 시절의 치기 ㅎㅎ, 항상 미소짓게 되는 장면입니다.
3) 연오정...에서 인천 앞바다를 바라보던 추억, 글짓기와 사생대회 등
김 옥인 선배님!!!
오랫만에 들어와 보니 그냥 넘어 갈 수가 없네요..ㅎㅎ
약 7년전 쯤 우리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는데
말씀이 워낙 멧세지가 강해서 열심히 듣고 있는데 부흥 강사님이 갑자기
"혹시 인천에서 오신 분 있으세요? 하며 손 들라고 하셔서 저는
어떨결에 일어나서 "저요"하고 대답했는데....
"나 기억 못해요? 내가 신포동의 짐다방 DJ 였지요.하하하!!!!!"
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아주 어렸을때 자가 형이 자기를 안으려다가 놓쳐서 등이 굽었었다고
간증을 해주셨지요.
주로 까만 셔츠를 많이 입으셨지요 하고 물으니 많이 놀라시더군요.
담배도 많이 피셨구....ㅎㅎ
반가운 만남이었지요.
화가 황추 선생님께서는 가족이 시카고로 이민 오셔서 사시다가 돌아가시고
그 분 따님만 시카고에 살고 있지요.
맞아요. 그 분은 노을 지는 바닷가를 많이 그리셨어요.
저의 집도 그분의 그림이 있었었죠.
오랫만에 인천 이야기를 하니 좋네요.ㅎㅎ
유 순애 선배님!!!
작곡가 김 노현씨의 이야기는 이번 주말 이메일로 또 보내 드릴께요.ㅎㅎ.
황추 선생님......
저랑 같이 송도에 계셨는데
이 곳에서 뜬금없이 선생님의 소식을 듣게 될 줄이야........
고맙습니다.
그리고 특히 "짐다방"은 제게도 잊지못할 추억이 많습니다
예전에 그곳에 대해 쓴 적이 있어서인지
옥인님의 소개가 반갑기만 합니다.
산학 후배,
황 추 화백께서 송도 학교에서 가르치시기도 했는 가 봐요?
저는 그건몰랐네요.
어디?
여기 홈피에 짐 다방 추억을 썼나요?
그럼 산학 후배는 "짐"( 혹시 Jim, James의 줄인 이름인지도 모르겠네요)의 뜻을 아나요?
도산학 선배님께서 언급하신 "송도" 라는 지명에
어느새 어린 시절로 돌아가 봅니다.
해마다 소풍가던 곳이지요?
지난번 가보니 신시가지로 변했던데,
요즘학생들은 어디로 소풍을 가는지 궁금하네요.
" 짐다방"을 모르면 인천출신이 아니라고 해야겠어요 ㅎㅎ
예전에 어디에 그곳에 대해 쓰셨나요.?
알려주시면 읽고 싶어요.
난 짐다방보다는 커피코너를 더 많이 다녔었어요.
짐다방에서는 주로 외국팝송이 나오고
커피코너에서 클래식음악이 나온것 같아요.
커피코너는 답동성당 바로 건너편 육교다리 아래에서 이충으로 올라가 있는
아주 작은 찻집이었는데, 주인마담이 유난히 이뻤었지요.
내가 가면 신청을 안 해도 베토벤의 "황제"를 틀어주곤 했지요.
짐다방에 가면 내가 외국팝송을 잘 몰라 신청을 잘 못해서.......
그래도 내가 기억나느것은 "Let it be"라는 음악을 듣고 참 좋구나하고 느꼈었어요.
지금 흐르고있느 이 음악 "Smoke gets in your eyes"를 들으니
짐다방안에서 내 친구 임선모를 기다리고 있는것 같은 기분이예요.
내 기분은 아직도 20대인데 이제 60을 넘은 할멈이라니, 왠지 좀 슬퍼지네요.
성님 !성님! 우리 춘자성님~! 슬퍼하지 마시라요~
60 못넘고 세상떠난 사람들이 들으면 성나시갔시요.
지는요 나이드신 분들이 존경스럽구먼요.
시상이 아무리 좋아져도 우리인생 제맘대로 안되잖아요.
고저 고저 장수는 하나님의 축복이잖나요 ...
아프시지말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면서 옛날얘기 지금처럼 들러주시고
지금얘기도 몇년후에 옛날얘기처럼 하면서 우리모두 살아가자구요.
.
(저의 엉터리 이북사투리도 잘 이해해주실줄 믿습네다.)
???명옥아,춘자야,산학아,순애야,옥인아,영희야.....!!!!!!!!
너무 너무 짐다방의 얘기가 재미있다.ㅎㅎㅎ
사실 나는 누구보다 더 짐 다방을 특별하게 기억하고 있단다.
짐다방에서 데이트하고 있는데,
윤 순영씨 전화왔습니다. 하고 카운터에서 찾는거야.
어~누군가 나를 찾을 사람이 없는데...
고개를 갸웃하며 전화를 받었지.
"여자가 얌전히 집에 있지 일요일에 어딜 그렇게 나 다니십니까?"
어머 이 사람은 누구야?
이 사람은 지난 주에 학교 대표들의 모임에서 서울대 대표로 나온 사람이었어.
13개 학교의 대표가 모이는 자리였는데.....
어머 별일이야 하고는 그 때 만나던 남자와 낄낄거리며 놀고있는데
레지가 와서는 저쪽에서 손님이 찾는데요 하길래 쳐다 보았더니
그 남자가 와서 앉아 있더라.
"아이스 크림 먹으러 갑시다."
웬 남 데이트 하는데 와서는 뜬금없게 아이스 크림?
그런데 호기심이 발동해서
'저사람이 아이스 크림 사준다는데 갔다와도 돼?'
"가지 말란다고 네가 안갈꺼냐? 마음대로해."
이 아이스 크림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지뭐냐.ㅎㅎㅎ
지금의 옆지기다.
그 다음 들은 이야기로는 그 날 동인천역에서 신포동까지
다방마다 전화걸어서 28번째로 짐다방에 걸은 거란다.
엄한 부모님이라 절대로 전화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해도
막무가내로 신분 밝히고 전화하고, 학교로 찾아오고해서
이 몸이 넘어갔지.
그러니까 요샛 말로 신발 꺼꾸로 신은 꼴이 되었어.ㅎㅎㅎ
그 후에 다른 남자들 얼씬 못하게 손 본것은 말 할것도 없고....
결혼하고 꼼짝 못하고, 설설기며 산다고 소문이 파다했었어.
내가 좀 자유 분방하고, 활발하고 남학생하고도 잘 어울리는 형이었거든.
그렇게 40년을 살았는데, 지금은 나이들어서
나에게 져주면서 산다.
물론 살살 눈치껏 알아서 기지만....ㅎㅎ
ㅎㅎㅎㅎ~~ 감격의 스토리에요 ~~28번씩이나 다방전화를 하셨다니...
그 역사적 헌팅사건 그분도 물론 기억하시겠죠?
그 후에도 짐다방에서 자주 만나셨어요? 아주 궁금ㅎㅎㅎ
우리의 영원한 주장언니!
아름답고 낭만적인 소설이네요. 28이란 숫자가 너무 맘에 들어요.
언니의 여전히 아름답고 앳된 모습이 그 때의 모습을 쉽게 상상하게 되네요.
유명희랑 통화했어요.
배구부였던 덕에 명희랑은 기-ㄴ 시간 친한 친구로 지냈었지요.
자주 그 애 집에 갔었고 항상 손을 꼭 붙잡고 놓지않던 친구였습니다.
새어머니 눈치 보느라고 그랬는지 우리 집에 편하게 놀러오지 못했어요.
언니랑은 대학 때에도 가깝게 지냈었고 언니가 그 애 결혼식에도 가셨었다구요!
너무 오랫만이라 그런지 보고싶다고 하면서도 머뭇거리더군요. 저도 그랬지요.
요즘 대안학교 교사로 다녀서 오후 4시 이전엔 시간이 없다더군요.
언제 만나기로 하긴했는데 방학이 휙 지나가버려서 놓쳤습니다.
명희 만날 때도 언니가 명령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주장언니 <합숙 훈련하고 운동하던 때가 그립습니다. 몹시~~~~~>
[인천인물 100人·94]화가 황추 | |||||||||||||||||||||||||||||||||
지역미술 色 발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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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의 불모지라는 인천, 게다가 먹고 살기에 바빴던 50~60년대. 인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지역 미술계를 주도하던 인물이 있었다.
또 문화공보부가 주최하는 현직작가초대전과 대한미술협회전에 작품을 출품, 1975년에는 한국미협전에서 이사장상을 받기도 했다. 이로써 1971년 대통령장 문화훈장을 수상한 화가 박영성씨와 함께 인천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히게 됐다. 1924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황추는 1947년 해주미술학교에서 서양화 표현기법을 배웠다고 한다. 이 때 서양화단의 원로로 알려진 박성환 화백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6·25전쟁으로 고향 해주를 떠나 인천으로 오게 된 그는 1953년 인천 송도고등학교의 미술교사로 부임한다. 24년간 교사로 재직할 당시 그림에 대한 애착을 갖고 끊임없이 미술에 매달려왔던 것으로 당시 작가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황추의 제자였던 화가 박송우(66)씨는 "황 선생님이 군부대에서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미술에 관심은 많았지만 대학수준 이상의 전문 교육은 받지 못한 것으로 들었다"며 당시 기억을 더듬었다. 황추가 나온 해주미술학교는 현재의 전문학교 수준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 박씨는 "6·25전쟁 이후 당시 문교부에서 미술을 정규과정으로 만들면서 부족한 교사들을 대거 확보하던 시기에 황 선생님이 송도고등학교에 부임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당시 다른 학교 미술교사였던 박영성, 장선백, 박응창, 김옥순 선생 등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던 이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미술에 더 매진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당시에는 화가들이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작품활동을 해온 터라 학교를 중심으로 미술계의 활동이 이뤄졌던 시기였다. 황추는 인천이 경기도에서 분리되기 전에 경기도 미술교사 협회 회장직을 맡으며 교사들 사이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1965년에는 대한미술협회 경기도지부장을 맡고 제4회 경기도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지역 미술계를 이끌어 '미협 맨'으로 통했다고 한다. 그는 인천에서 1959~64년 당시 미협회원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작품을 출품할 수 있는 '앙데팡당전'을 여는 등 지역사회 미술전 곳곳에 작품을 출품했다. 1963년을 시작으로는 개인전을 11차례나 지속적으로 여는 등 화가로서의 작품활동에 매진했고 인천 라이온스 클럽의 회원으로서 지역을 위한 봉사에도 일조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교사로서 학생들의 지도에도 열정을 쏟았다고 한다. 제자 박씨는 "카메라를 항상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서 학생들한테 그림공부를 시켰고, 당시 대학에서 실시하는 각종 미술대회에서 자기 학생들이 큰 상을 받게 하려고 정말 기를 쓰고 가르쳤다"고 밝혔다. 이렇게 국내에서 화가와 교사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황추가 1976년 돌연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시카고로 이민을 가게 됐다. 당시 미협에서 함께 활동했던 이철명씨는 "이민 즈음에 중구의 답동관이라는 식당에서 송별회를 하면서 황 선생에게 국문과 영문으로 공로상을 만들어 전달했던 것이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며 "당시 이민이 쉽지 않았을 땐데 중앙정보부 쪽에서 일했던 황추 선생의 동생이 미국으로 파견을 가면서 초청이민을 도운 것으로 안다"고 했다. 미국에서도 시카고 시장 초대 개인전이나 LA현대 미술관 초대전, 워싱턴 국립미술관 초대전 등에 참여하고 한인미술협회를 조직하는 활동을 해왔지만 국내에서만큼 인정받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여 원로 화가들은 아쉬움을 표했다고 한다. 김옥순씨는 "누런 황소라는 별칭을 붙일 정도로 정말 쉬지 않고 열심히 그림만 그리셨던 분이셨다"며 "황 선생이 미국에 가시지 않았더라면 국내에서 더 활동을 많이 하시고 좀더 오래 사셨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황추는 미국에서 20여년 가까이 살면서도 영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아들이 교통사고를 내 엄청난 벌금을 물면서 경제적인 타격도 입는 등 타국에서 생활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단다. 그의 딸이나 부인이 김씨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황 선생이 많이 외로우신 것 같으니깐 미국으로 와서 함께 활동해보라는 내용이 잦았다는 것이다. 그는 1985년 귀국해 여의도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고 1988년에는 인천 몽마르트 화랑에서 두 번째 귀국전을 했다고 한다. 이 때에는 기존의 풍경화 위주에서 벗어나 추상화로 전환해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단다. 이경모씨는 "황추 선생이 인천의 미술계를 주도하며 쌓아온 업적에 비해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한 채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라며 "지금이라도 황추 선생을 재조명하고 인천의 인물로 되살려 나갈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윤문영기자·moono7@kyeongin.com> |
고향 인천은 뭐니뭐니해도 바다가보이는 모습이 지금도 건재하지요.
인천공항에서 보이는 신도시를 뒤로하고 옛도시의 상징인 자유공원에서 보이는 바다를 보며 옛추억에 젖어보았어요;
황추선생님의 누런바다가 바로 이 인천 앞바다 황해를 뜻함이겠지요....
지난번 자유공원 돌아보면서 어릴적 사생대회 참가했던 추억이 물씬 났었어요.
어릴적 사진을 보면 모두가 쬐끄만 흑백사진에 테두리가 하얀것으로 되었있었는데
10월의 꽃들과 더불어 여러색조를 그곳에서 보면서
기억속 흑백사진들과 그 시절이 향수를 갖고 그리워졌었지요.
떠나온 고향은
떠난자의 머리와 맘속에 언제나 살아
고향을 생각하며 그곳을 향하면 저절로 어린시절이 살아 나는 것이겠지요?
옥인후배!
만국공원을 보며 추억에 잠겨보았어요.
그 소년시절엔 내가 이렇게 환갑이 넘은 할매가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저 팔각정도 기억에 생생하고 맥아도장군 동상아래서 친구와 만났던 일도.......
언젠가 한 4년전엔가 가 보았더니 그 공원에서 내려다 보면
우리 원형교사가 잘 안 보이더군요.
다 낡아져 있는것을 보며
나도 이제 세월이 흘러 낡아져있겠구나 했지요.
그리나
추억은 아름다운것이지요?
늘 우리들에게 좋은것들을 공급해 주는 옥인후배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나는 오늘 예배 마친후
지닌번 가려다 몸이 아파 못 갔던 Solvang에
후배랑 선배님들이랑 봄놀이 간답니다.
비가 올가봐 걱정했는데 아주 쾌청한 날씨입니다.
김춘자 선배님
만국공원이라는 옛이름에 가슴이 자르르해져요...
맞어요 그전에는 그렇게 불렸지요?
선배님은 지금쯤 Solvang에서 계시겠네요.
여기는 한국보다 8시간 늦은 한밤중 자정이 지났어요.
L.A는 여기보다 9시간 늦는다고 하니 지금쯤 오후 3시가 지났겠네요...
지난번 선배님과, 부영후배가 올렸던 사진들이 떠올라서 그곳에서 지내시는 모습이 상상 되어요.
김혜경 선배님께서 미주 신년행사위원장님이신 춘자 선배님을 격려,치하,회상하시던 독립편에서
선배님의 입술마담격으로 짐다방에서 조근조근 대화되는 분위기로 한참 고조되던중에
제가 짐다방역사를 더듬다가 인천 전역주제로 확산되어 분위기 깬듯하여 죄송했어요.
그래도 다행히 7기 도산학 선배님이 다시 신장개업 다방분위기로 이끄시니
우리 바쁘신 김춘자선배님 수고를 덜어드리면서 유지되네요 ㅎㅎ
오늘처럼 봄맞이도 하시면서 푸욱쉬시고 건강해지셔서
4월방문하시는 2기 선배님들께 신선모드로 맞이 하시기 바래요.^^
저는 짐다방에서 시작하여 더 다른 곳으로 관심이 번져가서
이래 저래 찾아보니 상상외로 자료가 꽤 되네요,,
다행이지요?고향떠나 사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아~! 정말 바닷바람을 맡고 싶어요...
옥인후배,
저희 아버지는 언제나 한국을 방문하면 자유공원에 가서 사진을 찍자고 하셨어요.
마치 맥아더 장군에게 인사라도 가야 하는것 처럼,
그리고는 한참 부두가를 내려다 보시고는
월미도로 가시곤 했지요.
아버지가 아끼시던 황추 선생님 사진이랑 맥아더 장군을 보니
눈물이 납니다.
혜경선배님,
저의 친정이 인천을 떠난지 오래되어
선배님처럼 한국방문때마다 항상 찾지를 못했어요.
지난번에는
일부러 찾아가서 옛모습을 머리속으로 그려보았지요.
선배님 아버님께서는 부둣가를 내다보시며
멀리 떠나온 아버님의 고향을 그려보시며
또한 고향찾아온 따님에게 잠깐이지만 인천고향을 만끽시키시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요...
세월이 지나도 ,,그곳 자유공원에는 그만큼 우리 인천의 역사가 숨쉬고 있으니까요.
저의 친정어르신네들도 살아생전 두고온 황해도 고향을 그리워 하셨어요.
그래서 ,인천은 실향민들중 제2의 고향이된 사람들이 많었겠지요.
황추 선생님께서 미국으로 가신후 80년대도 바다그림을 그리신 것을 보니
인천에 대한 향수가 짙으셨던듯 합니다.
저도 제가 살고있는 유럽의 항구도시( 함부르그나 노르망디 등등 )에가면
언제나 고향 인천이 떠오르며 그리움에 항구가를 마냥 걸어봅니다.
옥인후배!
만국공원이 인기가 너무 높아서
우리 짐다방은 불이 꺼졌네요 흑흑흑.......
내가 쏠뱅에 갔다왔더니
불이 꺼져 싸늘해지고
매담도 딴 다방으로 옮겨가시고........
내 실력으론 다방을 운영할 수도 없고.......
섭섭하단 말이 아니고
이 방이 이렇게 성황을 이루니 좋단 얘기예요.
해외지부에서 후배에게 인사했지요?
옥인후배와 함께 여행하면 참 재미있을 것 같은데
언제 한번 여기 안 올라요?
춘자 선배님~
해외지부에서 행복한 모습 잘 보았어요.
요즘 비엔나는 꽃샘추위로 영하를 밑도는데
솔뱅은 따뜻하니 정말로 아름답더군요.
제가 언제인가는 꼭 선배님 사시는 곳에 갈거에요.
그때 만나서 우리 고향얘기도 맘껏하자구요
부디 건강살피시고 나날히 행복하셔요.
헤고오오,,,옥인후배님,,,이제는 또 인천회장자료작전으로 돌입???
그러자니 미술에 관한 관심까지,,,,,도무지 헤아릴수 읎는 여인,,,옥인후배님,,
이 글을 인제서야 열어봐서 죄송해요,,
그 짠물 인천,,,그리과 만국공원,,,특히 아카씨아 나무가 우리학교 주변으로 해서 많았죠??
인천서 자란 젊은이들에게 데이트의 낭만을 제공했던 만국공원/자유공원...
더운 여름 시민들에게 바람을 쐴수 있던 장소,,,
저 위의 김하진작가님의 인천회상기를 보니 미쳐 생각 못한 것들,,
또 황추화가님에 대한 회상자료,,,
별로 소중치 않게 생각됬던 것들이 저리 소중하게 회상되네요,
예전에 저런 귀한 분들이 다 학교교편을 발판으로 활동을 했지요,
옥인후배님의 인천회상 관심도가 심상찬은 조짐을 보이네요,
ㅎㅎㅎ 정순자 선배님께서 이렇게 먼길을 마다하시고 자유공원까지 왕림을 ... 기쁘고 반가워요
요즘 해외동문들의 관심이 인천에 더 ~모여드는 것같아요 ㅎㅎ
국내분들은 자주 찾으시니 오히려 옛모습을 더 잊으셨을지도...
사실은 김혜경선배님과 김춘자 선배님 글중 짐다방이 등장하고
여러선배님들이 인천지명을 등장시켜 대화하시는데,
지금은 저의 기억에서 아물아물해진 고향인천을 살피고 싶어지더라구요..
그냥 제대로 알고 싶다는 단순한생각이 ㅎㅎ.
심상찮은 조짐이라고 하시니 웃음이 나면서 갑짜기 그럴까? 라는 각오까지 들려고 하네요ㅎㅎ
그런들 이렇게 멀리 떠나온 처지에 무얼 하겠어요.
그래도 여기에서 대화를 나누다 보니 저의 무의식중에 깔려있던 희미한 추억의 조각들이
형체를 나타내며 점점 뚜렷해지는 듯해요.
선배님의 고향추억은 어느 정도인지요?
저는 우리가 자란 인천이 부모님의 본적은 경상도지만 저에게는 고향이지요.
그 시절, 모든 것이 풍족하고 화려한 시절은 아니였는지 몰라도
제 마음속에 아주 낭만적인 바닷가의 고향도시로 남아 있지요,
소녀시절,,,우리 친구 다섯은 무척 속닥거리며 미래의 꿈을 나누며 마냥 걷기를 좋아했죠,
특히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서로 설래이는 마음을 안고 서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찿아와
한없이 자유공원으로 바닷가로 중국촌으로 해서 홍예문으로 너머와,,
또 어느 다방에든 들어가서 조명과 음악이 맞아 떨어지면
의자에 깊숙히 박고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며 다시 야그를 끊임없이 이어갔죠,,
낭만은 보라색이겠지요???
옥인후배님 /해경/춘자후배님 덕분에 옛고향 야그에 빠졌네요,,,
옥인후배님은 모든 분야에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계신분이야요,,
심상찮은 조짐????맘대루 소신것 하세요오,,,하하하하
아니예유우ㅜㅜㅜ!!!절라도는 귀경두 몬 혀봤쓰라요이,,,
우리 이이는 충청도 청양군 온직리,,,그 칠갑산 들어가는 입구 동네랍니다,
제가 지난 어느떄 비디오 연속극
울밑에 선 봉선화야,,를 빌려다 본적이 있었는데,,
그때 전라도 사투리가 너무 재밋써 흉내를 내다가 요리 옮아삐려,,
특히 홈피같은데서 전국 8도 사투리를 더듬는 것은,,,
같은 말도 사투리를 쓰면
악의가 없이 그냥 우스운 효과?를 보기 떄문이지요,,,하하하하하
아아아!!!저 추억의 홍예문,,,지금 보니 너무 아름답네요오,,
개나리로 단장된 모습이 너무 정겹네요,
언젠가 가면 꼭 미선이칭구하고 같이 팔걸고 걸어봐야겠네요,,
그전엔 저 위에 차들이 없었는데,,,,,
에고오,,이방 더 계속하세요,,,넘 조아요,
아아, 지나간 보라색 추어억,,
헤구우,,,,순영언니의 몸이 넘어간 러브스토리를 이제야 발견해서 죄송죄송,,,
화아아 너무 재밋따아,,
그 형부는 그때부터도 그리 뱃장으로 뭉쳐진 싸나이였군요,
웜매애,,그 데이트하던 남자는 그냥 그렇게 신사같이 노쳐버리고이,,
아마 지금의 그남자 형부보다는 언니의 말릴수 읎는 성격에 더 포기항게 되네요오,
갤국은 그래서 화끈하게 살아드렸잖아요오,,
뭐 좀 순종/쩔절매며 살아준 기간도? 있었나보죠???믿거나 말거나아,,,하하하하
두 분의 삶속에 멋진 스토리가 무궁무진할 것 같애요,,
흐흐흐흐 우리 이이는 결혼 절대 안 하고 미국 간다던 30세 노총각이
선 본날 건너편에 앉은 제 밥숫갈위에 어른들이 게신대도
불고기 한점을 푹 올려놓길래 놀래서 쳐다봤더니 샤악 웃더니만
그 후로 어른들 허락을 받아낸 후 365일 저를 보려 출근을 하고
집에 돌아가서 또 전화하고,,,일년 후 결혼,,,하하하하
가난한 유학 준비하는 강사가 아마 돈을 몽땅 써도 모지랄 정도로 매일 데이트를 나갔죠,
근데 언니 야그는 더 아주 주겨주네요오,,,하하하하 넘 재밋따아,,,
10기 유혜동 후배가 작년 올렸던 인천 사진을 다시 살펴보다가
제물포 구락부가 옛날 인천시립박물관이었다는 글을 읽었어요.
후배가 찍은 사진을 조금크게 확대해서 올려봅니다.
혜동씨~! 허락 없이 옮겼는데,,, 괘않지요?
제가 지금 뱅기타고 날라가서 사진을 찍을 형편이 안되어서,,, 이해해주세요.
사진들 정말 제맘에 쏘옥들어요.고마워요.
10.유혜동 2010.04.12 14:14:34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제물포 구락부가 나온다.
우리들 학교 다닐 때는 인천시립 박물관이었던 곳이다.
옛정취가 물씬 나는
제일아래 간판의 옛날사진들 보시면서 그 시절이 기억나세요?
이런 시절이 있었네요...기억들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