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2일(수요일)

 

지나간  일주일이  꼭  꿈만  같다.
인간이  그렇게  순식간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지금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저녁을  드시고  잠자리에  드셨는데 

기침을  두번  크게  하길래  잠들기  전에  감기약이라도  드시게  하려고 약을  갖다  드렸더니 

벌써  혀가  말려올라가  놀라서  구급차를  불러놓고  손을  따는데  피가  한방울도  나오지  않더라는  엄마의  전언이다.
달려온  구급차  요원은  이미  숨을  안  쉰다고  했고
그렇게  88세  인생을  마감하셨다.

 

늦은  밤에  닥친  일이라
상청은  내일  9시나  차려진다고
짧은  3일이다.
우리  아버지는  평소의  성격대로  가셨나보다.
불같은  성격에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해 

자식이  여덟이나  두시고도  그  흔한  환갑  칠순  팔순    잔치를  한번도  안  받으셨는데  이렇게  가시는  길도  짧은  3일이라니.....

만  7년을  파킨슨  병을  앓으셨기에  맨날  그렇게  안방에  누워  계실지  알았는지
우리는  영정사진  하나  준비하지  않았다.

 

2016년  6월  23일(목요일)

 

다음날  부랴부랴  차려진  상청위에  아버지의  사진이  올라왔다.
웃는  얼굴이  우리들을  내려다  보고있다.
자식이  많으니  근  천여명의  문상객이  다녀갔고  다들  호상이라  말한다.
호상은  호상이었을까?
우리  아버지가  예뻐하던  초등학교  1학년인  지원이가  문상객이  잠깐  빈틈에  방에서  나와서는 

자기도  할아버지께  절을  해도  되느냐  묻길래  "그럼"  이라  했더니
두손을  이마에  모으더니  절을  하는데  다들  깜짝  놀랐다.
언제  저렇게  절을  조신하게  하는  법을  배웠을까?
그런데  절을  끝낸후  또  묻는다.
할아버지가  내가  춤을  추면  제일  좋아  했는데  지금  춤을  춰도  되냐고?
"그럼"  이라고  했더니  할아버지  영정앞에서  앙징맞게  삼바춤을  추는데  그런  구경거리가  없었다.
다들  웃었다.
귀여운  손녀딸  덕분에  장례식이  축제가  되어버렸다.

 

4시에  입관식이  있었는데
요즈음은  입관식도  예쁘게  동화처럼  진행을  해서  무척  놀랐다.
전문학교에서  장례지도사를  수료한  젊은이들이  진행을  하는데
옷을  다  입혀드린  후에  발목에  놓여진  색종이  하나로  연꽃을  피워내는데  꼭  마술을  보는  느낌이다.
연꽃은  의미는  "정화"이므로  혹여  이승에서  지은  죄,  다  씻고  가라는  의미란다.
내가  절에  다니니  다라니경을  준비했는데  마지막으로  다라니경을  덮어드리고  또  다라니경을  덮어드리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다.
아버지가  들어가실  관도  들어온  화환에서  한송이  한송이  모은  꽃을  깔아드리고  자손들이  그  위에  꽃을  덮는다.
유난히  꽃을  좋아해서  아버지  방에  꽃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마지막에는  꽃속에  묻혀서  가시니 
우리  아버지  그래도  복이  많으신가?
장례지도사는  가시밭길  말고  꽃길  비단길을  가시라고  축원한다.


저녁  8시에  미국에  사는  식구들이  도착했다.
또  울음바다다.
멀리  살아  자주  뵙지  못했으니  이  또한  불효라  하며 통곡을  한다.

 

우리집  문상에  좀  특이한  점은

목사님이  두분,  신부님이  네분  그리고  스님이  오셔서  기도를  해  주신  점이다.

평소에  우리에게  결혼을  하면  시댁의  풍습을  따르라고  하셨으니  시댁에  따라  종교가  달라진  것인데

그  결과  여러  종교의  기도를  받으며  가셨으니  진정  종교의  화합을  이룬  분이  아닌가  했다.

물론  우리  아버지는  어디에도  나가지  않으셨지만  금강경을  좋아해 

매일  불교방송을  보시며  그  어려운  7년을  견디신  것은  아니었을까?

 

 

 2016년  6월  24일(금요일)

 

새벽  4시가  되니  아버지를  운구할  군인들이  도착했단다.
 서둘러  상식을  올리고  발인이다.
아버지의  관이  대형  태극기에  싸여서  나온다.
8명의  군인이  운구하며  천천히  정중하게   아버지가  나온다.
바로  내일이  6.25가  아니던가?
우리  아버지가  대학생의  신분으로  참전했던  바로  6.25  전쟁이  내일이라니  그것도  내  눈에는  예사롭지  않다.
그래도  내  조국이  그분들의  희생으로  이만큼  잘  살아 

돌아가신 후에라도  이렇게  예우를  해  주고  있다니  갑자기  대한민국  내  조국이  너무  고맙다.

 

마지막으로  국립  이천  호국원에  도착이다.
1시  30분에  강당에서  합동  안장식이다.
오늘  모신  분은  23위인데  가족대표가  신위를  모시려  무대에  올라가면  정중하게  예를  갖추고  유골함을  안겨준다.
국기에  대한  경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에  이어  조사가  낭독되고  유골함을  전달하는  것이다.
무슨  곡인지는  모르지만  장엄미사곡  비슷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안장식이  끝나고
모두가  기립한  가운데  강당을  한바퀴  돌고  숲속에  설치된  벽화에  안장된다.

벽화로  이루어진  유골함은 
거의가  6.25같은  전쟁이야기  을지문덕  장군이야기   살수대첩등으로  꾸며져  있어  납골당이  아닌  흡사  박물관에  온  느낌이다.
그것도  숲속의  박물관..... 

숲속에  이름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나뮷잎  스치는  소리,  바람소리,  맑은  공기

바로  이곳이  천국이  아닌가?

 

중학교  때부터  함경북도  명천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공부를  했기에  방학때만  뵐  수 있었던  부모님을  그리워해

파주  "통일동산"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자식들의  간곡한  설득으로  불과  몇달  전에야  허락을  했던  국립묘지...

혹시  아버지의  마지막을  하나라도  잊을까  봐

이  글을  올린다.

 

아버지!

여덟이나  되는  많은  자식을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감사합니다. 

이제는  당신이  그토록  자랑으로  여겨왔던  조국의  품안에서  편히  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