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한 숨 3

부제(副題) : 조지훈의 시(詩) 승무(僧舞)에 바치는 전설(傳說) 

얇은 사(紗) 하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깍은 머리 박사(薄紗)고깔에 감추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불이........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지우고... 
나는 쓰던 펜을 놓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본다. 

그녀의 영상(映像)이 아롱진다. 

20 여 년 전 
그녀는 고교생으로서 전국 무용 예술제에서 
쟁쟁한 전문 춤꾼들을 물리치고 
승무(僧舞)를 추어 그해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녀의 이름은 ‘서미영’. 

그녀는 일찌감치 한국의 무용계를 이끌어갈 대들보로 
지목(指目)받아온, 
최승희 이후의 가장 걸출(傑出)한 인재(人才)였다. 
7살 위의 그녀의 오빠는 
나와 대학동기로 우리 셋은 함께 자주 인적(人跡) 뜸한 
동해의 어느 어촌(漁村)을 찾아 여행을 다녔다. 
그의 오빠 ‘서강남’은 미국 하버드 대학원의 교수로 
28세에 저술한 책이 
세계 비교종교학의 교과서가 되어버린 
비교종교학의 태두(泰斗)였던 천재중의 천재였다. 
그런데 어느 해 귀국해서 부모님 성묘하러 가던 길에 
그는 교통사고를 당해 척수마비가 되었다. 
‘미영’과 나는 그를 태워 우리가 늘 자주 다니던, 
머리 위 가까운 언덕위에 자그마한 절이 
돛단배처럼 걸려있는 그 한적(閑寂)한 어촌에 갔다. 
거기서 우리 셋은 바다의 청량(淸凉)한 바람과 
그 바람타고 울려오던 
맑은 풍경(風磬)소리에 안타깝고 슬픈 마음을 달랬다. 

‘강남’이 편히 깊은 잠에 들었을 때는 
‘미영’이와 나는 절에 올라가 
그의 건강을 기원(祈願)하며 함께 삼천 배(拜)를 올렸다. 
그러면서 우리 둘의 사랑도 
슬픔을 먹으며 함께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강남’은 기울어진 생명의 추(錘)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끝내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아! 비탈 위 언덕에서 오빠의 유골(遺骨)가루를 
저 아래 바다에 뿌리던 하얀 소복(素服)의 
그녀는 허허(虛虛)로운 한 점 뜬 구름이었다...! 

그녀는 그 해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평생을 내 어깨에 기대라고 
그리 간절한 눈빛을 주었으나 
그녀는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그렇게 떠나갔다. 

그러구러 
15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가 돌아왔다.
[세계무용예술제에 한국대표로 비구니 스님 참가!] 
바로 그녀, ‘서미영’이었다. 

“오빠 실내분위기가 많이 익숙하지 않아요?” 
무용제에서 그녀를 만나 
그녀가 산다는 이곳 조그만 절까지 
함께 밤길을 달려와서 
차(茶)가 아닌 커피 잔(盞)을 마주하고 앉았을 때 
그녀가 던진 말이었다. 
그랬다. 
그의 오빠가 점점 생명의 끈을 놓아갈 무렵 
멀리 동해바다까지 거동(擧動)이 힘들어지면서 
우리가 늘 찾아갔던 그 곳 카페의 실내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풍경(風景)이었다. 
부처좌상이나 연화대, 탱화 대신 마치 
커다란 수족관(水族館)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으로 꾸민 
그 조그만 절! 
더욱 찬찬히 둘러보니 
절에 어울릴 듯한 불구(佛具)들은 전혀 없고 
커피내리는 고급 커피메이커가 있고  
부처상이 놓여야 할 자리에는 
100호도 넘는 큰 그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 거기에 우리가 늘 함께 찾아 
피눈물로 얼룩진 기도(祈禱)를 하던, 
바다 위 비탈진 언덕에 돛단배처럼 걸려있던 
그 작은 절이 수족관 같은 실내와 어울려 
그윽한  카페 La Mer를 연출(演出)하고 있었다. 

“오빠가 죽기 전(前) 
마지막 혼(魂)을 불 사르며 그린 그림이에요. 
끝내 저 덧문은 완성하지 못하고 그렇게 오빠는 갔죠. 
그래서 저렇게 문이 없는 암자(庵子)가 되었는데 
그게 늘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부처님의 가슴 같아 더 좋아 보여 
저도 손을 대지 않고 그냥 놓아두었죠.” 
그녀 남매는 미술에도 보기 드문 천재로 
그들 남매의 작품이 
미국 뉴욕 현대 미술관에 상시(常時) 전시되어있고, 
그녀도 국전에서 특선을 3번이나 한 초대작가이다.

일부러 반주(伴奏)음악도 끈 채 
조명(照明)도, 음악도 관객도 없는 그 밤 
교교(皎皎)한 달빛아래에서 추던 그녀의 승무(僧舞)! 
달빛이 조명이고 귀뚜라미 소리가 반주였다. 

“오빠가 내민 손을 잡지 않고, 
기대라던 오빠의 어깨에 나를 내맡기지 못한 것은 
그 후 살아오면서 큰 바위덩어리로 
늘 나를 짓누르고 있었어요.” 
라는 말과 함께 이윽고 천천히 일어서던 그녀! 
그리고... 
오직 나 하나의 관객(觀客)을 위해 
정성들여 곱게 화장을 하고 
몇 겹의 옷과 고깔까지 차려입고 
한 마리 나비되어 
사뿐히 날아오를 듯 추던 그녀의 춤사위! 
장장 그렇게 2시간을 나갔다, 들어오고, 
돌리고 다시 휘감고, 그리고 풀며, 
마치 저 하늘을 향해 
경건(敬虔)한 제사를 봉행(奉行)하듯 하던 승무 춤!

나를 떠나면서 눈물 한 방울도 아끼던 그녀인데... 
온몸이 땀으로, 눈물로 물먹은 솜이 되어가고, 
나는 그 자리에서 
눈물 흘리는 장승처럼 굳어있던 그 밤이... 

고서점(古書店)에서 내가 조지훈의 승무라는 시집(詩集), 
더군다나 당시
 이러한 내용의 자서(自序)가 실린 책은 
10권밖에 찍지 않았다는, 
그 책을 펼쳤을 때 그것은 감동 그 자체였다. 

그들이 다니던 그 카페 La Mer는 거짓말처럼 
아직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덕수궁 돌담을 끼고 이화여고 쪽으로 200걸음, 
거기서 다시 오른 쪽으로 100걸음, 
물론 6척이 넘는 거구(巨軀)였던 ‘지훈’보다 
몇 걸음씩은 더 걸어야 했지만 
이렇게 자서(自序)에 쓰여 있는 그대로 찾아간 그 곳에 
마치 ‘청마’(靑馬)의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지아의 손수건처럼 
<바다/La Mer>라고 쓴 깃발하나 무심(無心)히 바람에 
나부끼며 오도카니 자리 잡은 그 카페 La Mer! 
도심(都心)이라는 광야(曠野)에 잘못 
난파(難破)되어 올라온  돛단배 같던 그 카페! 
그러나 지금이라도 막 바다로 떠나갈 것 같은 
그 카페 La Mer가 거기 있었다. 

오늘도  나는 La Mer 에서 커피를 마신다. 
‘서미영’처럼 설탕없이 밀크만 탄 커피를... 
한 마리 나비처럼 하늘하늘 춤추는 
그녀의 길고 넓은 소매가 토(吐)해놓는 
환영(幻影)을 눈앞에 그리면서... 


승무(僧舞)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 올린 외씨버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 속 거룩한 합장(合掌)인 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아직 까까머리 학생시절 
승무(僧舞)라는 시(詩)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영롱한 새벽이슬을 보았고, 
바람 없는 몽롱하고 그윽한, 고즈넉하다 못해 
고막(鼓膜)이 터질 것 같은 
적막(寂寞)한 작은 산사(山寺)로 날아간다.

속세(俗世)의 진애(塵埃)를 털어버리듯 
빡빡 밀어 파랗기 조차한  민숭머리를 
넓게 삼각진 고깔로 가리고, 
넓고 길다 못해 땅까지 끌리는 
긴 장삼 소매를 감았다 뻗고 다시 휘감아 뻗고, 
어깨와 고개를 틀어 돌리며  
슬쩍 발을 몸 쪽으로 들어 올리는 그 춤사위! 
소매 밖으로 얼핏 얼핏 비치는 그 가녀린 하얀 손! 
교교(皎皎)한 달빛아래, 
그 하늘거리고 너풀대던 정경(情景)... ! 
대웅전 덧문 창호지에는 너울대는 촛불따라 
또 하나의 그림자가 춤을 추고.... 
꿈꾸는 환상(幻想) 속 그림이 아닌가...! 

그 때의 그 감동을 언젠가는 
조지훈의 승무(僧舞)에 금박(金箔)을 입히듯 
전설(傳說)로 봉헌(奉獻)하고 싶었다. 

내 너무나 짧고 아둔한 글 때문에 금박(金箔)이 아닌 
동박(銅箔)이 되어버린 안타까움은 있지만 
이순(耳順)의 문턱에 서 있는, 
이제는 빛바랜 흑백사진첩에나 끼어있을 
이 중(中)아닌, 중(重)늙은이가 주책  맞게  
헌정(獻呈)이랍시고 이런 시답지 않은 글로 
과거의 찬란(燦爛)했던 상상(想像)에 때를 묻힌다. 

그런데 이런 장중(莊重)하고 격조(格調)있는 시(詩)를 
조지훈(본명: 조동탁)은 
내가 이 시를 만난 17~8세에 지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부터는 댓글입니다.

 
 
3.김혜경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를 한줄 읽으시고 눈가가 촉촉해 
지시던 국어 선생님이 한분
계셨었습니다..
먼 엣날 같은 
그시간으로 돌아간 듯한 아침입니다.
그림 같은 시인의 이야기가 
아름답습니다 2007-10-26
21:41:44
  
 
 
 
 
 
용상욱
  건방진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저는 어디까지나
잠시 사랑방에 기탁해 있는 객이고
더군다나 여기는 여학교 홈피인만큼
댓글을 달며 자주 들락거리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 않고 자칫 사감선생님에게 한 말씀 들을 수도 있어서
저는 가능한 한 댓글에 답글을 다는 것을 삼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첫 댓글이고 4기와 동기인 저에게는 선배시고
게다가 글을 보니 아마도 미국 동부에 사시는 분이지 싶어
마음같아서는 맨발로라도 뛰어나와 인사를 드려야 도리겠습니다.
사람은 겉 보고 모른다고 시커먼 얼굴에 작은 키의 
꽤나 우둥퉁한 몸매의 저도
이 시에 참 까닭없이 눈물 많이 흘렸습니다.
어린 시절이나 지금이나...
선배님은 참 맑고 여린 국어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셨군요.
저는 사실 글이나 언어를 다듬는 공부를
할 수 있는 국문과 출신도 못되고
장돌뱅이를 30 여년 했던 무지랭이인 데...
어쨌든 먼 이역만리에서 늘 건강하시길 빕니다. 2007-10-27
08:51:01
  
 
 
 
 
 
5.이인선
  너무 멋진 이야기와 글솜씨에 감탄을 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국문과 출신이 아니라면서 이처럼
아름다운 글을 쓰시다니 천재에 가까운 분?
시 한수에 눈물 흘릴 정도의 감수성에 놀랍고 궁금하군요. 2007-10-27
03:13:02
  
 
 
 
 
 
3..송호문
  얇은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와 함께 
님에 글은 읽는이로 하여금 맘을 얼게 하는군요 
언제던 환영을 합니다 위에 혜경이 또한 인선후배 달다 보니 저와함께 모두 미주에 살고 있군요 
홈 안에서 거리가 문제가 아니련만도 고향을 떠난 저희들에겐 이런글들이 더욱 향수에 젖게 하는 
촉촉한 이 아침입니다 허 회숙 선배가 이글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2년전 1회에 허 회숙 언니를 
그리는 글을 올렸으나 아직 열람을 못 하셨는지 ? 아무도 댓글이 없는 가운데 외로히 그방을 지키고 
있더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안녕 2007-10-27
03:47:19
  
 
 
 
 
 
3. 한선민
  여러 예술 방면에 조예가 깊고 훌륭한 내 친구가 첫번째로 글을 달기에...
또 호문이도 내 친구이기에 마음 편하고...
늘 글을 읽으며, 요즈음은 바빠서 인선, 용혁후배에게 고맙다고 한줄 쓰지도 못했는데... 
고모의 팬이 되어서 그 가족의 기쁨이 내 기쁨인양 반가운 고모!
어쩜 시누 올케가 그리 혈육보다 더 혈육 같은 인선 얼굴도 보여서
용기를 갖고 한 줄 쓰고 싶었습니다.
상욱님! 
좋은 글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며 마음이 촉촉히 젖어옵니다.
어찌 이리 감동을 주시나요.
고맙고 반갑습니다. 2007-10-28
00:49:41
  
 
 
 
 
 
5.이인선
  호문 선배님 선민 선배님 반가와요.
이렇게 인터넷으로 사는 곳이 어디든지
한달음에 만나지니 얼마나 고마운지요!
선민언니가 고모에대하여 후편을 기다리신지 오래되셨지요?
읽어주신것 참 신이나요! 2007-10-28
04:00:28
  
 
 
 
 
 
허회숙
  허회숙 2007-10-28
09:22:36
  
 
 
 
 
 
3.송호문
  아! 재준 동상 활명수에도 취하시는 술 실력! 술 뒷자리 챙기시느라 더 분주한 없어선 아니되는 술좌석에
시중군! 안녕 하시군요 ~ 인사동 세상 만들기에 기고하신 '음주 문화와 필자' 를 읽고선 제가 떠 올린것이 
아 글쎄! 제가 포도를 먹고 취한적이 있습죠 그뿐인가! 요즘은 알콜 성분이 없는 포도주로 성찬식을 
하지만 전엔 약간에 성분이 있어서 일요일 아침 빈속에다 성찬식을 맞을땐 혼자서 얼굴만 취해서 빙글 
빙글 화끈 화끈 혼자서 열을 뿜다가 예배가 끊날때쯤이면 가시더라구요 ~ 
헌디 동상! 그 글은 반만 실렸다고 했는데 나머지 반은 어디메에 올리셨는지요 ? 
만나서 반갑습니다 곧 5호가 출간 되겠죠 ? 손이 쉽게 닿는곳에 놓고 가끔 사진까지 보죠 안녕 2007-10-28
10:24:51
  
 
 
 
 
 
용상욱
  !!!허회숙 누님. 보셨군요.
너무 너무 반갑습니다.
당장 찾아뵙고 싶지만 40여년간 제가 살아온 자취와 냄새를
조금이라도 느끼실 수 있는 서신을 10 여 차례 더 올리고
더욱 반가운 해후를 하기 위해 이대로 꾹꾹 더 참겠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초등학교시절에는 원예반, 중학교 때에는 합창반에 기웃대며 
오직 거의 반 평생을 써온 일기 이외에 글과는 무관한 저에게
과분한 칭찬의 말씀, 특히 이인선 님의 표현의 인플레이션에 가까운 말씀에
그저 따뜻한 격려의 응원으로 알고 황송하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알고 보니 제 짐작과 달리 
김혜경님, 이인선님, 송호문 님, 한선민 님 유재준님 모두
동부가 아닌 미국 서부에 사시는 분들이군요.
그리고 유려한 필봉을 휘두르시는 이미 공인된 문사님 그룹이시지 싶어
무척 조심스럽지만 반갑습니다.
술자리에서는 10년을 벗한다는데 인터넷 글마당에서는 
남녀노소가 진솔하고 허심탄회한 소통이 가능하다 믿고
훌륭하신 마음의 벗님들을 맞아 오늘 저는 행복에 취해도 되겠지요? 2007-10-28
16:21:58
  
 
 
 
 
 
3. 한선민
  상욱님!
저는 미국이 아니고 서울 살며
울 3기 컴 방장을 맡고 있습니다.
강남에서 청춘 남녀들 관계되는 웨딩 일을 하며
인일 컴을, 또 우리 깃수의 컴을 아끼고 있습니다.
귀한글 자주 올려 주세요. 2007-10-29
13:41:02
  
 
 
 
 
 
허회숙
  나로 하여금 수십년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인일여고 단발머리 시절로 초대해준 용상욱님!
사랑하던 동생 용이를 10년 전에 불의의 사고로 잃고 '애통'함의 의미를 새롭게 깨닳았었는데, 
용이의 친구이면서 나와 얽힌 일화를 글로 써서 보내 준 서신 , 너무 반가웠습니다. 제2신으로 '승무'에 얽힌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은 너무도 간동적이었습니다. 참으로 오랫만에 바삭바삭 말라버렸던 제 감성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용상욱님! 
지금 미국 동부 어디쯤 살고 계신지요? 지금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도 궁급합니다.
한가지 여쭈어 볼께요. 혹시 아버님 존함이 용자 이자 식자 성함이 아니신지요?
예날 사시던 댁이 수문통 근처가 아니었는지요?
경기고로 전학한 후 서울 필동에 집을 사서 여동생과 지내지 않으셨었는지요.
편지를 읽고난 후 여러가지 추억이 밀려오고 불현듯 궁금한 것이 많아졌습니다.
나는 지난 8월 28일 인천교육연수원장으로 있다가 정년 퇴임을 하고, 9월 3일 인천 학익초교 앞에 '교육문화경영연구원'이라는 조그마한 연구원을 냈습니다. 
이 연구원에서는 앞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여러 프로젝트를 벌여 제도권 밖에서 청소년 건정 육성을 도와 나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는 인하대 객원교수로 위촉되어, 상담심리 강의를 학부 학생들과 대학원 학생을 상대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년간은 건강이 유지되는 한 강의와 연구원 일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다시 한번 시공을 초월하여 나로 하여금 아름다웠던 소녀 시절로 되돌아 가게 해준 용상욱님께 감사드리면서, 또 연락 바라겠습니다. 
허회숙드림 2007-10-30
15:30:30
  
 
 
 
 
 
용상욱
  누님!
정말 반갑습니다. 
댓글 하나가 더 달려 그냥 무심코 들어 와 보았는데 
바로 누님이라니...! 
지금 학익초교 앞에 교육문화경영연구원을 세우고 
여전히 청소년의 건전한 교육에 힘쓰고 계시다고요? 

참 기억력도 좋으시군요. 저는 제가 살던 그곳
인천시 송현동 66번지 앞을 수문통이라 했던 것이 생각이 안 나서 
개천이라고 했던가? 아님 뭐라고 했었던가? 하고 있었는데... 
그리고 서울 필동 집도 기억하시는군요. 
그리고 어쩜 아버님 성함이 이자 식자라는 것까지도 기억하시는군요. 
아버님은 5년 전에 돌아가셨고 지금 어머님 모시고 
大 식구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요. 이렇게 서신만 드리고 있으니 제가 미국에 사는 줄 착각하셨군요.
저 지금 서울 방배동에 살고 있어요. 
항상 줄기차게 영원한 현역으로 미래를 향한 하루하루 
지금 현재에 충실해 계신 누님! 
다만 저는 40 여년이라는 세월이 
너무 길고 아득하기에 과거의 추억에만 잠겨 있는 
하릴없이 마음이 먼저 늙은 젊은 노인들을 
제일 애석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면서도 
누님과의 그 텅 빈 도화지에 차곡차곡, 
아니 얼기 설기 나마 기억의 연결고리를 
채워놓고 더 실질적이고 반가운 재회의 순간을 누리려고 
당장 달려가고 싶은 마음 꾹꾹 눌러 참고 제가 그동안 친구들에게 
편지형식으로 써오던 글을 보내드리는 
젊은 노인의 모습을 택했지요. 
 

서신은 나중에도 계속 올릴 수 있으니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한 번 뵈러 갈게요.
저 인천도 자주 가는 편이거든요. 
다시 한 번 반갑습니다. 저도 궁금한 게 참 많아요. 
누님! 
만나 뵐 때까지 늘 건강하세요. 
 
지금 심정은 정말 
무지 무지 보고 싶습니다. 
상욱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