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석권하는 부품 소재 분야에 도전장
[주간동아공동] 부를 만드는 과학자
▲ 최순자 인하대 교수  ⓒ
“부자가 되고 싶어 한 소녀라면 조금 생뚱맞죠? 사실 전 어린 시절부터 부자를 닮기 위해 의식적으로 책을 계속 읽었습니다. 공대로 진학한 이유도 마찬가지였구요.”

인하대 생명화학공학부 최순자 교수는 너무나도 솔직하고 당당하게 공대에 진학한 이유를 밝혔다.

“초등학교 때 쌀밥을 먹은 기억이 없어요. 목재회사에서 흘린 나무를 줍고, 기찻길을 따라 가며 조개탄 줍고, 연탄 타나 남은 거 줍고, 고철을 줍고…, 또 뭘 주었더라? 가난했지만 항상 스스럼없이 행동했다고 자부합니다.”

많이 배워야 부를 창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성숙한 소녀는 현재 우리나라 산업을 윤택케 하는 유능한 과학자로, 학생들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교육자로 변신해 있다. 최근에는 한국여성공학기술인협회 초대 회장까지 맡아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쓴다
“재밌는 일화 하나 들려드릴까요? 초등학교 때 지능지수(IQ) 검사를 했더니 99가 나왔어요. 당시 IQ가 두자리수이면 대학에 못간다는 얘기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중학교 때는 검사지를 나눠주는 동안 문제를 미리 보는 부정행위를 해 IQ 138을 받았죠.”

이 때부터 최 교수는 학교에서 천재로 불렸다는데, 주변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서 아주 열심히 노력하다보니 실력이 뛰어나게 됐다고 한다. 진짜 IQ를 궁금해 하자 최 교수는 자신도 한동안 궁금해 했다면서 나중에 정식으로 검사한 결과 중간 정도가 나왔다고 한다. IQ가 정말 낮았는데 열심히 하다보니까 높아진 것 같다고 덧붙인다.

학창시절 과학과 수학을 좋아했던 최 교수는 사회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공대를 졸업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인하대 화공과에 진학했다. 이후 아르바이트를 해 학비뿐만 아니라 생활비까지 대면서 일찍 여윈 아버지의 빈 공간을 채우는 역할을 했다.

“멋진 여성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지만 대학에서 공부에 전념하지는 못했습니다. 졸업하던 해 우리집을 위해 3년만 일 하자고 결심했는데, 막상 기업에 들어가기가 어렵더군요. 원서를 안 받아줘서 이력서에서 사진만 아까워 떼어내고 찢어버린 적이 많아요.”

결국 최 교수는 당시 공대를 졸업하면 주던 준교사 자격증을 활용해 교편생활을 시작했다.

“부천공고에 나갔는데 어려운 아이들을 기능사 시험에 붙게 해주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그러다보니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교에 매달려있었습니다. 당시 기능사 시험에 통과한 제자들이 지금도 고맙다고 찾아오는데 정말 뿌듯하답니다.”

결심했던 3년이 지나자 최 교수는 정들었던 교편을 놓고 미국 유학 준비에 들어갔다. 착실하게 유학 비용도 준비해 놓았고, 열심히 한 결과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입학허가도 받아 앞길에 대로가 뚫린 상황. 그러나 갑자기 큰 일이 터진다.

“오빠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어요. 모아둔 돈을 모두 병원비로 사용했는데 결국 생명을 구하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학비가 전혀 없어서 아무런 기약 없이 비행기 표만 들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미국 LA의 한 슈퍼마켓에서 힘들게 일자리를 구한 최 교수는 주말 동안 30시간씩 캐셔로 일하면서 서던캘리포니아대(남가주대)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매사추세츠 주립대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받을 때는 지도교수가 “하루에 25시간 일하지 말고, 일주에 8일 이상 일하지 말라”고 얘기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

“1985년 학위 끝나던 해에 당시 국내 소형 아파트 한채 살 돈을 모았죠. 그 돈은 가족을 데리고 한달 동안 유럽 여행을 하면서 모두 썼습니다. 개처럼 벌더라도 정승처럼 써야 한다는 말이 옳다고 생각하거든요.”

기저귀에서 프린터 토너까지
최 교수의 연구 주제는 고분자 재료 분야다. 고분자 화학물질들을 섞어서 인간 생활에 유용한 물질을 만들어내는 것. 그러나 오랫동안 이 분야가 발전하면서 새로운 것을 합성해 만들어내는 것은 한계에 부딪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저는 폴리에틸렌과 폴리프로필렌 고분자를 서로 섞어서 만든 필름을 개발했습니다. 아기 기저귀에 아주 유용한 물건이에요. 필름이 공기는 통하면서 물은 빠져나오지 않게 해 내부에 습기가 차지 않거든요. SK에서 상품화해 외국에 많이 수출하고 있습니다.”

또 필기도구에 들어가는 나노(1nm는 10-9m) 스케일의 형광잉크 입자를 개발한 후 상용화시켜 동남아시아와 남미로 수출하고 있다. 최근에는 활용 가능성이 상당한 미립자 소재를 개발해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다.

“수㎛(1㎛는 10-6m) 수준에서 원하는 크기대로 균일한 입자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원천 제조기술을 갖고 있지 않은 프린터 토너의 핵심 기술이에요. 현재 전 세계에 관련 특허가 미국과 일본만 2개씩 갖고 있는데, 특허를 출원 중인 상황입니다.”

최 교수는 삼성과 LG 등 국내 프린터 제조사들은 매년 수백억원 이상을 이 소재 수입에 사용하고 있어 수입 대체효과가 상당하고, 궁극적으로 엄청난 규모의 전 세계 토너 시장에도 진출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또 개발한 소재를 LCD 기판에 들어가는 도전필름(ACF)에도 활용할 수 있다고 한다. ACF의 미립자 소재는 시그널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데, 1kg에 7천만원일 정도로 고가로 현재 전량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다.

“과학기술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바탕을 제공하며 연구결과가 바로 다양한 산업에 활용됩니다. 저는 일본이 석권하고 있는 부품 소재 분야에 계속 도전하려고 합니다.”

산업쪽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몇년 전 인하대 MBA(경영학석사) 과정을 마쳤다는 최 교수는 이공계 출신은 경상대나 행정대학원에 갈 수도 있어도 반대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공계 출신이 한 우물만 파지 않고 시야를 넓히면 경쟁력이 막강하다는 설명. 특히 여성이 이공계에 진출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라고 얘기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이공계 분야에서 여성은 경쟁력도 있고, 유리한 점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를 벗어나면서 여성에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하는 마이너리티 플랜이 시작되고 있거든요. 이런 분위기가 계속될 수 있도록 저한테 주어진 일을 100% 이상 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학생 잘 가르치고 연구도 많이 하며, 시간을 쪼개 전국 대학의 여성 교수들에게 “교수에 안주하지 말고 사회를 움직이는 주요 인물이 되자”고 강연하러 다니는 최순자 교수. 부자가 되고 싶어 했던 소녀는 이미 꿈을 이룬 듯 하다.

 
닭보다 달걀이 큰 프린터 시장
전 세계에 진출해 있는 다국적 회사 휼렛패커드(HP)를 얘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컴퓨터를 떠올리지만 실제 프린터로 먹고 사는 회사다. HP의 전체 매출 가운데 프린터 사업의 비중은 30%에 불과하지만 전체 순익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80%에 달한다.

전 세계 프린터 시장의 규모는 약 1천억 달러(약 1백10조원)로 추정되고 있다. 4백억 달러인 반도체와 6백억 달러인 TV를 훌쩍 뛰어 넘는 규모다. 프린터 시장이 이처럼 큰 이유는 끊임없이 소모품을 함께 팔 수 있기 때문이다.

프린터는 현재 잉크를 뿌리는 잉크젯 방식과 레이저빔을 이용해 토너를 열로 종이에 압착하는 레이저 방식이 양분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은 빠른 속도와 저렴한 유지비, 뛰어난 인쇄품질과 보존성을 자랑하는 레이저 프린터가 궁극적으로 프린터시장의 승자가 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프린터 시장은 면도날을 팔기 위해 면도기를 제공하는 고전적인 사업모델을 따르고 있다. 프린터를 하나 팔면 최소 3-4년 동안은 카트리지와 토너도 함께 팔 수 있기 때문에 원가 이하로 팔더라도 지속적으로 마진이 생긴다. 이 때문에 프린터 가격은 계속 떨어지고 있는 반면 카트리지와 토너 가격은 오히려 오르고 있다.

국내에서는 삼성전자가 프린터 사업을 7대 미래전략산업으로 선정해 2007년까지 세계 선두권 진입을 목표로 집중 투자하고 있다. 또 인하대 생명화학공학부 최순자 교수의 미립자 제조기술이 레이저프린터 토너의 원천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김홍재 기자   ecos@ksf.or.kr
2004.11.25 15: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