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잡이'가 된 한국 육상 여제(女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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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연합뉴스) 고상민 기자 = 무더운 날씨에 응원 열기까지 더해진 12일 오후 대전 한밭운동장.

훅훅 찌는 더운 열기에도 묵묵히 서서 방아쇠를 당기는 두 중년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제39회 전국소년체육대회 육상트랙 심판으로 참여한 박미선(46) 인천체고 감독과 이영숙(45) 안산시청 감독은 직접 트랙에 나가 스타터 심판(출발 신호를 알리는 심판) 자격으로 따가운 햇별을 맞아가며 직접 '총'을 쏘고 있었다.

두 감독은 한국 육상의 오래된 보물이다.

박미선 감독은 86년 아시안게임 때 세운 여자 200m 기록(23초80)을 지난해까지 보유했고 이영숙 심판이 1994년에 세운 여자 100m 기록(11초49)은 아직도 깨지지 않는 벽이다.

지난해 전국체전에서 김하나(25.안동시청)가 한국신기록(23초69)으로 우승하기까지 박미선 감독의 기록은 23년간 그야말로 `언터처블'이었다.

박미선 감독은 "하나가 내 기록을 깼을 때 무엇보다 시원했다. 육상인으로서 기록이 경신된다는 건 기쁜 일이다"라고 말하며 후배를 응원했다.

두 감독은 단거리 육상의 명문 인천 인일여고 1년 선후배 관계로 한때에는 한국 육상 단거리의 정상 자리를 놓고 경쟁을 펼쳤지만 지금은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 사이가 됐다.

이영숙 감독은 "다행히 언니와 100m, 200m 기록을 나눠가졌다"며 20년 넘게 다져온 우정을 과시했다.

한국 육상에서 여자 심판이 경기 현장에 나가 심판을 본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김경식 대한육상경기연맹 경기과장은 "내년에 대구에서 펼쳐지는 2011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맞아 국제적인 추세를 맞추기 위해 이번 소년체전부터 여자 심판들을 트랙에 직접 올려 보냈다"고 말했다.

기록실이나 시상계 심판으로 꾸준히 각종 대회에 참여했다는 두 감독은 "트랙 위에서 경기를 펼치는 후배들을 코 앞에서 바라보니 너무 예쁘고 뿌듯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찜통 더위에 고생스럽기도 하지만 출발선에 서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가슴이 뛴다는 두 고참 선배의 표정은 마냥 밝았다.

박미선 감독은 올해 소년체전을 겪으며 눈에 들어온 육상 유망주가 누구냐는 물음에 "이혜연이 돋보이더라. 체구는 작아도 쭉쭉 치고 나가는 걸 보니 대성할 것 같다. 무엇보다 근성이 남달랐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경기 비산초등학교에 다니는 `꼬마 탄환' 이혜연(12)은 키가 또래 선수들보다 한뼘이나 작은 150㎝ 단신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회 100m와 200m를 싹쓸이하며 2관왕에 올라 주목을 받았다.

한편 이영숙 감독은 "소년체전 유망주를 계속 육상 스타로 키워내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이른바 인기종목에서 미리 빼내 데려가는 경우가 아직도 많아 걱정이다" 라며 비인기종목인 육상의 미래를 염려했다.

이어 "뭐니뭐니해도 작년 전국체전에서 200m 한국기록을 갈아치운 하나에게 시선이 많이 쏠려 있다. 잦은 잔부상만 해결되면 앞으로도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라며 여자 육상의 차세대 주자 김하나에게 힘을 실어줬다.

쓴소리도 이어졌다.

박미선 감독은 "내년 세계선수권대회를 우리나라에서 치르는 건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라면서도 "상은 우리가 차리고 남의 잔치가 될 가능성이 크다. 결선에라도 나가야 할텐데.."라고 말하며 중국과 일본에 비해 한참 뒤떨어져있는 한국 육상의 현주소를 걱정했다.

두 심판은 13일 오후부터는 각자 맡은 팀에 복귀해 지도자로서 구슬땀을 흘릴 예정이다.

gorious@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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