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서점에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와 한 달간 함께 일을 했던 여자였다.
복잡한 서점 일을 주인인 나 보다 더 잘 해내 나의 감탄과 신임을 받았던 내 또래의 여자였다.
그는 오후 세 시부터 일곱 시까지 근무를 하였다.
그때 학교 끝난 초등학생인 딸이 유리창 밖에서 엄마의 일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그는 생계를 위해 월급을 더 많이 주는 직장을 찾아 한 달만에 서점을 그만 두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그 후 우리 서점에 간간이 찾아와 책을 사곤 했다.
가끔 엄마 잘 계시니 하고 물으면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네 하고 말했다.  
초등학생인 딸이 올 해 고 3이 된다고 했다.
키가 170쯤 되고 단정하게 자란 용모와 말투는 누가 보아도
잘 자랐다고 감탄할 만한 여고생이었다.

가끔 그 아이를 보며 그의 엄마를 생각한다.
남편이 부도가 난 어느 날 하루 아침에 아파트에서 쫓겨나 지하 월세 방으로 옮겨야 했던 그 여자,
갖은 것이라고는 아직 가르쳐야 할 두 아이들 뿐 빚 밖에 없었던
그 여자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그 여자가 서점으로 나를 찾아 왔다.

" 어머! 그간 어떻게 살았어요?"
" 그냥요"

그리고 여자는 한참 뜸을 들이고 말한다.

" 부탁이 있어 왔어요"

여자는 우리 서점 모퉁이를 조금 떼어 장사를 하게 해 주면
거기다 ' 델리만주' 같은 빵을 구어 팔고 싶다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나는 가게가 내 점포가 아니어서 내 맘대로 할 수가 없다고 대답한다.
여자는 금방 눈물이 글썽인다.

여자는 자기가 산 지난 7년간을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야기했다.
딸 아이 고등학교 입학금이 없어 마감 당일 시간이 지나 겨우 빌려 학교로 뛰어 갔던 일,
고 일 때 수업료를 못 내어 계속 담임으로부터 채근을 받다가
어느 날 담임으로부터 상담 요청을 받아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담임이 이 동네에도 그렇게 사는 학생이 있었느냐고 놀라며
수업료 전액 면제를 받게 해 준 일,
그 담임이  학년 때 새 담임에게 인계를 해 주어 역시
수업료 면제를 받고 학교에 다니고 있는 일이며,
아들은 고등학교 내내 급식 도우미를 하며 급식비 면제를 받고
자기가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대학 등록금을 냈던 것들을 물며 말했다.  

" 아침에 일어나면 눈도 뜨지 않고 그대로 죽고 싶어요.
그렇지만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저 아이들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생각해요.
남편의 직장이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아요.
지금까지 제가 음식점 같은 데서 일하며 번 돈으로 살았어요."

한때 여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는 동네에서 그런 부류의 계층과 교류하며 우아하게 살았었다.
그러나 7년간 밑바닥에서 살았고 지금 역시 어느 한 구석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신문이고 라디오고 체감경기가 최악이라는 뉴스뿐이다.
아마 내일은 여자의 상황이 지금보다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둡고 희망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여자는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다.
여자에게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보호본능이 여자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여자는 갔다.
여자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나는 가끔 돈이 좀 많이 있었으면 할 때가 있다.
누군가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도와줄 만큼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