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스승의 날 나는 제자들이 마련한 자리에 초대받았다.
제자들에게 해 준 것이 없어 극구 사양을 했지만
자기들도 선생님 핑계삼아 만나는 거니 꼭 나오라고 하였다.

그렇게 옛날 24살 시골학교에 초임 발령 받았던 국어선생과
그때 열 네 살이었던 산골 소년들과의 만남은 이루어졌다.
그때 말이 없던 아이들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그때 떠버리였던 애들은 여전히 떠버리였다.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사람은 겉모습만 변해갈 뿐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아이는 아들 사진을 가지고 나와 자랑했고
어떤 아이는 고위층이 다른 나라 외상을 만나는 자리에서
통역하는 사진을 들고 나와 자랑했다.
마흔이란 나이를 먹었어도 학생 때
작은 일도 자랑하며 어리광부리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시골 학교에서 서울에 와
고생하던 시절의 이야기들이 무용담처럼 흘러나왔다.

그들은 모두 경기도와 충청도 경계인 오지마을의 종합고등학교를 진학했다.
그렇지만 대학을 들어가야겠다는 집념으로 모여 앉기만 하면
어떻게 공부를 할 것인가를 의논했다고 한다.
학교에서는 진학지도는 커녕 인력을 동원해
화초 가꾸기며 꽃길 가꾸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나중에는 그것을 점수화 시키기까지 했다.
아무리 공부하게 해 달라고 건의해도 소용이 없었다.

고등학교 이 학년이 되자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건이 닿는 애들은 서울로 전학을 가기로 했다.
친척집들을 다니며 어떻게든 공부를 하고 싶으니
주소를 옮겨 달라고 하소연하며 다녔다.

그때  4명이 전학을 왔다.
전학을 오니 국 영 수만 같고 나머지 과목은
시골 종합고등학교와는 생판 다른 과목들이였다.
문과인 애들인데 이과에 배정 받기도 했다.
시골 촌놈들이 부모들 떨어져 서울 처음 온 것만도 어리둥절한데
아주 다른 교과로 서울 애들하고 경쟁하며 내신 받기는 정말 힘들었다.
그때는 내신이 30%나 들어가 대입시에 크게 작용하던 시절이었다.

서울에 적응이 되지 않는 한 아이는 학교를 그만 두려고 짐싸 들고 고향에 내려갔더니
어머니께서 서울학교 교복 입은 아들 보는 것만으로도 신기해
온 동네방네 자랑을 시키고 다니더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다시 짐을 꾸려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 아이는 이 학기 때부터 자기 나름대로 요령과
방법을 터득해 나가며 자기 위치를 찾았다.
그때 다른 아이가 그 아이를 보니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머리가 하얗더라고 했다.
(그 머리는 대학 들어가니 다시 검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하던 그 아이는
삼 학년 때는 거의 모든 과목에서 백 점을 받아
서울대 무역학과에 진학했고
거기서 행정고시를 보아 지금은 건설교통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일 학년 때 아버지는 7남매를 남겨 놓고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그 지방에 대대로 내려오는 유림집안이었다.
할아버지 뿐 아니라 아버지까지 갓 쓰고 도포를 입고 다녔다.
그런 지방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 그의 종중산이 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다들 땅값이 올랐다고 부러워했는데
그의 아버지는 군으로 도로 다니며
그곳으로 길이 나면 안 된다는 뜻을 전하고 다녔다.
결국 당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목을 메어 죽음을 택했다고 한다.

" 선생님 저는 어떻게든 공부를 해야만 했어요.
소신을 위해 스스로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 죽음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해야 했어요.
땅에 대한 한이 맺혀 건설교통부를 지원한 거구요."

그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또 한 아이는 이과에 배정받아 고전을 했고
대학은 경제학과에 들어갔다가 재수해서 다시 법대에 들어갔다.
많은 방황 끝에 그 아이는 고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사법고시에 합격해 고향에서 변호사를 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말했다.

" 선생님! 전요, 어떻게 이 자리에 앉았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요.
그냥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어느 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예요"

러시어학과 나와 모기간에 근무하는 아이와
시립대 나와 구청에 근무한다는 애와
토목과 나와 건설회사에 근무하는 애와 회사를 두 개나 한다는 애들....
참 열심히들 자기 자리를 찾아 들어가 자리하고 있었다.

더욱 더 대견한 것은 세 아이는 중학교 일 학년 때
두 아이는 아버지를,
한 아이는 어머니를 여윈 아이들이었다.

서울로 전학 온 애들은 시골에 남아 있는 애들까지 챙겨가며 공부를 했다.
나중에 시골에 남은 애들도 뜻 있는 애들은 다 대학에 들어갔고
지금은 서로들 의지하며 사이좋게 중년을 나고 있었다.

가슴 아팠던 것은 제자들 모두 내가 보았던 중 3때 키 그대로였다.
한창 자랄 때 객지로 떠돌아다니며
잘 얻어먹지 못하고 공부하느라 더 이상 자라지 못한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처럼 고생을 다 한 애와 고생 안한 애와 똑같은 위치에서
어떠한 일이 주어졌을 때 그 일을 해 낼 수 있는 이가 누구겠느냐 하고.....
미래의 사회는 아름다운 촌놈 너희들의 것이라고......

아이들과 헤어져 돌아오며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한 번도 그들처럼 전력질주 해 본적이 없었다.
모험을 해 본적도 없었다.
나는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위해 살았다.

옛 제자들은 어느 새 나의 스승이 되어 나타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