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관한 단상**

여자가 쓰는 칼럼의 주제치고는 좀 느닷없다는 생각을 할 지 모르겠다.
나는 술에 관해서는 절대 내숭을 떨지 않는다.
다른 어느 것에 비해 솔직하다.
좋아한다, 즐겨한다, 자주 마신다.....술에 대한 그러한 표현들을 거침없이 쓴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술주정뱅이는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고 했다.

나는 세상이 편안하게 보여 술을 마신다.
알콜을 통해서 세상을 보면 편안하고 아름답고 근심걱정이 없다.
그래서 잘 웃고 목소리가 조금 커지고 기분도 좋아진다.
성질 못되기로 유명한 남편도,
얼굴에 파리가 앉다가 미끄러지기 안성맞춤이게  뺀질거리는 아이들도
여간 예쁘게 보이는 게 아니다.
살림 사는 것도 신통치 않고,
돈 버는 것도 잘 못하고,
게다가 고분고분한 것도 아니고,
주위의 기대에 부응해 사는 것도 아닌 나 자신에 대해서조차
이만하면 꽤 괜찮은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결코 밝게 보이지만 않던 미래도 봄동산처럼 환하게 보인다.

남편은 약간의 술은 정신 건강에 좋다며 자주 권한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마시는 것은 아니다.
친정은 워낙에 술에 강한 집안이라
술 먹고 주정을 하는 사람들을 별로 본 적이 없다.
큰집 오빠나 동생이나 다른 사촌들 역시
아무리 먹어도 웃고 말이 좀 많아질 뿐 비틀거리고 주정하지 않는다.
나 역시 특별히 취하고자 마음먹고 마시기 전에는
아이들과 남편 앞에서 취해서 주정해 본 적은 없다.

술을 자주 마시기 시작한 것은 남편과 함께 장사를 시작했을 때부터다.
아침부터 밤 열두 시까지 뛰다가 퉁퉁 부운 발을 하고 집에 들어오면
몸은 견디기 힘들게 피곤하다.
확 풀고 얼른 잠이 들고 싶은데 그럴 때의 잠은 언제나 인색하다.
그때마다 남편과 함께  마시기 시작한 술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아이들은 도시락도 없이 학교에 갔고
우린 어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다시 서둘러 가게로 나와야 했다.
거의 한 달간 아이들 얼굴을 보지 못했던 적도 있었고
거의 한 달간 같은 옷을 입었던 적도 있었다.
말 그대로 장사꾼이었다.
그런 와중에 아이들 도시락 걱정은 일종의 배부른 사치였다.
아이들보다도 생존이 더 절박했던 시기였다.

그렇다고 남편과 마음이 맞아 오순도순 함께 일했던 것도 아니었다.
함께 일을 하고 부터 남편은 생전 내가 본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이 되었다.
남편도 착하고 온순했던 아내가 저랬구나 하고 놀라워했다.
싸움도 많이 했다.
싸울 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남편 입에서 술술 나왔다.
부부싸움조차 별로 해 본 적이 없는 내가
그때 처음 안 것은 싸울 때 서로의 감정은 똑같구나 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마음 상했으면
상대방도 똑같이 마음 상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시절을 견디게 해 준 것이 다름 아닌 술이다.
낯설고 모르는 세계에 처음 뛰어 들어가 우왕좌왕 할 때
두려움을 잊게 해 준 것도 그것이고,
피곤한 육체를 편안하게 해 준 것도 그것이고,
서로의 감정이 날카로워졌을 때 무디게 해 준 것도 그것이다.

큰 아이는 고3 때 수능시험 백일 남겨 놓고
백일주라는 것을 너무나 확실하게 마셨다.
아마도 엄마 아빠 매일 매시는 술 뭐 그렇게 대수롭겠나 싶어
아무 것도 모르고 마셨을 것이다.
그날 아이는 술 먹고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했다.
한 번 혼난 큰 아이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작은 아이는 즐겨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먹어야 할 때는
내숭 떨지 않고 마시는 모양이다.
마셔도 볼이 약간 발개질 뿐 취하지 않는 것은
외가와 친가를 다 닮은 것 같다.

그렇게 자유롭게 마시던 술을 요즘은 큰 아이의 잔소리 때문에 눈치를 본다.
거실에 앉아 술을 마시면 조목조목 조항을 열거하며
중독 수준이라며 잔소리해 댄다.  
걱정이 되니까 잔소리하는 것일 테지만
벌써 아이의 잔소리를 들을 나아가 되었나 싶어 대견하기도 하고
너무 나이를 많이 먹은 것 같아 서글프기도 하다.

남편은 아내로서의 내 역할 중 술친구 역할이 가장 맘에 든다고 한다.
이제껏 아들에 대한 욕심을 한번도 내비치지 않았던 남편이지만
아이들이 크자 함께 술 마실 아들이 없는 것이 섭섭한 모양이다.
그러나 아들이 없으면 사위가 언젠가는 그 자리를 대신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언제라도 대작해 줄
영원한 술친구가 있는데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