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을 당했을 때는 경황이 없어 슬픈지 어떤지 몰랐었다.
삼오까지 지내고 나니 새록새록 아버지 생각이 나는 게 여간 슬프고 허전한 것이 아니다.
자식이 옆에서 편히 모셨으면 조금은 더 사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죄스럽기도 하다.

" 온 몸이 칼로 난자 당하는 것처럼 아파.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질 않는구나."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주무시다가 그 밤에 가시었다.

아버지는 가시기 전날까지 자리에 눕지 않으시고 조석을 손수 끓여 드셨다.
엄마도 노인이라 두 분이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다.
몸뚱아리 움직을 수 있을 때까지 어느 누구의 손도, 자식의 손조차 빌리지 않으려고 애쓰시더니 결국 당신이 생각한 대로 사시다가 가신 것이다.
후두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지 일년 육 개월 만이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년 이맘때가 생각난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시며 농사일을 준비하셨다.
편히 쉬며 몸을 회복시키는 것이 먼저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비틀거리는 몸으로 밭을 갈아 씨를 뿌렸다.
감자 고추 상추 쑥갓 고구마 토마토 호박 콩 팥 무 배추 알타리 쪽파 가지 등은 일일이 아버지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우리는 작년 내내 그것들을 먹었다.
아직도 아버지가 기르신 배추로 담근 김장김치를 먹고,
아직도 아버지가 캐 주신 고구마를 먹고,
아직도 아버지가 털어 주신 콩과 팥을 먹고, 아직도 아버지가 보내주신 쌀을 먹고 있다.

아버지의 밭에는 풀 한 포기도 없었다.
빈땅도 없었다.
비실비실 자라는 농작물들도 없었다.
아버지 밭은 깨끗했으며,
구석구석까지 농작물들이 가득 차서 언제나 실하게 자라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신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삶의 방식을 가르치신 것이다.

봄이 되면 다시 농사를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엄마와 우리 형제들의 기대와는 달리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담담히 끝내고 계셨다.
내 몸은 내가 안다. 여름까지 살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렇지가 않아.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가시기 일주일 전부터는 당신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셨다.
혼자 남은 엄마의 거처며 형제간에 일어날 수 있는 분쟁의 불씨까지 다 현명하게 처리해 놓으셨다.  

빈소에는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은 조문객들로 붐볐다.
누구는 취직을 시켜 주었고,
누구는 중매를 서 주고,
누구는 떨어진 학교를 다시 넣어 주고,
누구는 어려울 때 돌보아 주었다며 아쉬워하며
추억하고 또 추억했다.

아버지는 강화도 길상면 장흥리 선영 모셨다.
마침내 그토록 그리워하던 할머니 할아버지 곁으로 가신 것이다.
전등산 맞은 편 바다가 보이는 그 곳,
해와 달이 번갈아 빛을 쪼여 주는 곳,
사시사철 꽃이 피어 꽃대궐 같은 곳-
지금 아버지는 그곳에서 편히 쉬고 계시다.

아마도 前生에 우리 형제들은 태산과 같은 덕을 쌓았나 보다.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나 오십 평생 그 큰사랑을 받고 살았으니 말이다.
來生이 있다면 그분과 어떤 인연으로  맺어져 태어나
지금까지 받았던 사랑을 돌려드리고 싶다.